야키족 출신의 인디언 주술사인 돈 후앙(Don Juan)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놀랄 때가 많다. 그가 남긴 영성적인 수사들은 동양정신의 명상적 전통과도 적지 아니 상통했다. 그의 가르침은 '인디언판(版) 도교(道敎)'로도 불린다. 돈 후앙을 주인공으로 10여 권의 책을 썼던, 페루 출신의 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는 그를 고대 멕시코 톨텍문명의 후예로 소개했다. 사실 돈 후앙이라는 인물을 만나 본 사람은 카스타네다가 유일하다. 그러다보니 돈 후앙이 실존인물인지 아니면 작가가 창조한 인물인지에 관해선 논란의 여지도 있는 것 같다. 어찌됐든 내가 인디언들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런 돈 후앙이 빌미가 됐다.
돈 후앙은 어느 날 광야의 한 바위 앞에서 제자인 카스타네다에게 말한다.
"저것을 바위로 인식하는 바로 그대와 같은 인간들 때문에, 저것은 바위이다. 저것을 바위로 보지 말라. 그냥 보라. 그냥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무위(無爲)'이다. 이 광야의 참된 전사(戰士)들은 저걸 바위로 보지 않고, 그냥 본다. 전사들이 저것 앞에서 '무위'를 행할 때, 저것은 바위를 훨씬 초월한 그 무엇으로 존재하며, 마침내 전사들은 저것으로부터 큰 힘을 얻는다."
노장(老莊)의 '무위'를 어느 인디언 주술사의 어록에서 만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더욱이 그 주술사는 '무위'를 관념적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자연 속의 일상에서 생생하게 육화해 냈다. 돈 후앙은 바위뿐만 아니라, 풀과 나무, 새와 동물 등 자연계의 어떤 존재를 만나더라도, 인디언 전사는 그것들 앞에서 '무위'를 행한다고 말한다. 돈 후앙이 말하는 '무위'는 무슨 뜻일까. 그는 '무위'를, '행할 줄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유위(有爲)'는 '무위'의 상대적인 말이다. 그렇다면 '유위'는 '행할 줄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일 듯싶다. '행할 줄 아는 것'이란 달리 표현하면 인간이 사물을 대할 때,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고 가치판단을 하는 모든 준거들의 총화이다. 돈 후앙은 지극히 인간 중심의 관점들인 그 준거들의 무용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무위'는 놀랍게도 노장의 그 '무위'와도 일치했다.
'무위를 행하라.' '행할 줄 아는 것을 행하지 말라.' 돈 후앙의 말은 선언적일만큼 단호하다. 그의 말은 유위적인 삶에 익숙한 인간에겐 거의 혁명적인 주문에 가깝다. 바위를 바위로만 보아온 인간에게 바위를 바위로 보지 말라는 것이니, 결국 그것은 인간에게 내면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사물을 보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함을 암시한다.
"당신이 바라볼 때 사물은 어떻게 보입니까?"
"사물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 다만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그 외연이 달리 보일 뿐이다. 우리의 내면이 침묵했을 때, 이 세상은 비로소 그것이 지닌 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돈 후앙은 혼란에 빠진 제자에게, 이번엔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무위'를 설명했다. 그는 철학적인 언어 따위로 치장하지 않고, 자연계의 구체적인 사물들을 예로 들었다.
"나무를 보되,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무 자체만을 보지 말라. 그 나무에 달린 무수한 잎사귀와 잎사귀 사이에는 여백이 존재한다. 그 여백을 관찰하라. 줄기도 그림자를 만들고, 잎사귀도 그림자를 만든다. 그 그림자들을 놓치지 말라. 나무가 뿌리를 내린 대지를 보라.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저 허공과 하늘을 보라."
대부분의 인간은 나무를 볼 때 돈 후앙의 말과는 반대로 본다. 그들은 나무의 종류와 수형, 줄기, 꽃과 열매, 잎의 모양 따위를 관찰한다. 그들은 식물학적 관점이랄지 그 나무에 대해 갖고 있는 경험적 감성이나 지식 따위를 통해 그 나무를 해석할 뿐이다. 그것은 돈 후앙의 표현대로라면, 일상에서 늘 해왔던 것처럼 '행할 줄 아는 것을 행하는 것', 바로 유위의 방식이었다.
돈 후앙은 무위를 설명할 때, 역으로 그 허를 찔렀다. 그는 나무의 실상을 보려면, 그런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방식은 '행할 줄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 곧, '무위'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반의 상식적인 관점과는 달리, 한 그루의 나무 안에서 '여백'과 '그림자'를 보고, 나무가 서 있는 '대지'와 '허공'과 '하늘'을 보라고 말한다. 나무 자체만을 보지 말고, 나무와는 무관하게 보이는 그런 존재들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나무의 본성과 전체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무는 나무가 아닌 것들과 물 샐 틈 없이 일체가 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무뿐만 아니라 만물의 공통적인 존재방식이기도 했다. 돈 후앙의 관점에서는 나무를 그처럼 보는 것이야말로, 바로 나무 앞에서 '무위'를 행하는 방식이었다. '무위'를 그런 비유법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니, 그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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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캡션> Gleitman, <루빈의 컵>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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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Gestalt)심리학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예화가 있다. '루빈(Rubin)의 컵'으로 불리는 흑백 그림이다. 백색 이미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 그림은 컵이다. 그런가하면 흑색 이미지를 중심으로 보았을 땐,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다. 이게 과연 컵인가, 두 사람의 얼굴인가. '루빈의 컵'을 심리학적인 접근과는 관계없이, 돈 후앙의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지도 모르겠다.
"참된 전사(戰士)는 컵을 컵으로 보지 않는다. 참된 전사는 얼굴을 얼굴로 보지 않는다. 컵의 본성과 전체성을 보려거든, 사람의 얼굴을 보라. 사람 얼굴의 본성과 전체성을 보려거든 컵을 보라."
사실 나무를 보는 관점에 대한 돈 후앙의 말을 들여다보면, 미묘한 상징성이 가득하다. 그가 말한 것처럼 '여백'과 '그림자'를 보고, '대지'와 '허공'과 '하늘'을 봄으로써, 과연 나무의 본성과 전체성을 볼 수 있는 것일까. 돈 후앙은 제자와 문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심을 이미 드러냈다. 그것은 내면의 '침묵'에 관한 것이었다. '여백'들을 보라는 주문은 나무에 대한 인간 중심의 모든 관점을 포기하라는 의미였다. 그런 관점은 사물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돈 후앙의 가르침이 비록 상징처럼 보이긴 했지만, 언젠가 실험삼아 그의 방식을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몹시 놀라운 체험을 했다. 내가 바라본 대상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어느 열나흘 밤이었다. 마당에 나와 보니 달이 떠 있었다. 달이 밝았다. 달리 표현하면 달은 '밝음' 그 자체였다. 한편 달이 아닌 존재들은 산도 하늘도 모두 대체로 '어둠' 그 자체였다. 달의 존재로 인해 그곳엔 밝음과 어둠이 공존했다. 어둠도 달로부터 먼 곳은 칠흑이었고, 가까운 곳은 그만큼 덜 어두웠다. 달로부터 먼 하늘에 뜬 별들은 반짝반짝 빛을 냈지만, 달과 가까운 곳에 있는 별들은 아예 보이질 않거나 빛을 잃었다. 내가 움직일 땐 내 그림자도 함께 움직였는데, 마당가에서 자라던 채송화와 민들레는 어느 순간 그 그림자에 묻혀 보이질 않았다. 그 풀꽃들은 달과 '나' 사이에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오랫동안 관찰하다보니 문득 어둠과 산과 하늘과 별, 풀꽃 등 모든 물상들의 존재양상이 달의 또 다른 표현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독립적인 개체성을 갖고 달과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달과 상호교섭하며 달빛에 따라 자신들의 존재양상을 변화시켜 갔다. 그들은 모두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였다. '달'이라고 부르는 밤하늘의 '그것' 역시 단순히 달이 아니라, 이 모든 물상들의 존재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어떤 존재처럼 보였다. 그 순간 다시 달을 보다가 그만 전율하고 말았다. 달을 보면 떠오르곤 했던 내 마음속의 언어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도대체 '달'을 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달은 내가 일상적으로 인식해온 그런 달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돈 후앙이 설파했던 인디언들의 지혜에 깊은 두려움 같은 걸 느꼈다. 실제 그의 방식을 따라보니 그 가르침은 단순히 상징만도 아니었던 것이다.
앞에서 돈 후앙은 사물을 볼 때 '무위를 행하라'고 말했다. 그와 동일한 맥락으로 그는 다시 '그대 자신의 역사를 버려라'라고 말했다. 이 말 역시 사물을 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돈 후앙에 따르면 자연계는, 낮은 낮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밤은 밤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또한 낮에는 낮의 존재들이 있고, 밤에는 '밤의 존재'들이 있다. 문제는 '밤의 존재'들이었다. 그는 '밤의 존재'들을 '힘'과 '영혼'이랄지 혹은 '조력자(助力者)'와 같은 매우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인간이 낮 동안엔 감지할 수 없었던 존재들이다. 그 존재들은 실재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어떤 내면을 갖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창조된다. 돈 후앙은 인간이 올바른 방식으로 존재했을 때는 '밤의 존재'들이 '조력자'가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적'이 되어 인간을 해친다고 말했다.
어느 날 밤 돈 후앙은 카스타네다와 함께 광야로 나가 제자가 '밤의 존재'들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저것을 보아라!"
갑자기 스승은 어둠 속에서 속삭이듯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제자는 그곳에서 털북숭이 동물 한 마리를 보았다. 그는 긴장과 불안 속에 빠져든다. 동물은 들개나 이리처럼 보였다. 동물은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지만, 이내 잠잠한 것이 잠을 자거나 죽은 듯이 보였다. 제자는 스승에게 저 동물이 무엇이냐고 묻지만, 스승은 오직 "모른다"고만 대답한다.
"조심해라. 죽어가는 동물이라면 마지막 힘을 다해 언제 우리에게 덤벼들지 모른다."
동물은 다시 몸이 미미하게 떨리다가 한순간 갑자기 무서운 경련이 발작적으로 일어난 것 같았다. 몸이 땅바닥에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다. 비명소리도 내지르는 듯했다. 어느 때는 다리를 쭉 뻗자 허공에 드러난 발톱이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그 동물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 같았다. 제자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상상과 함께 두려움과 공포 따위를 느낀다.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다시 냈을 때 스승이 외쳤다.
"도망쳐라."
두려움에 떨던 제자가 도망친다. 스승이 다시 제자를 불렀다. 제자는 돌아와 비로소 그 동물에게 다가가 정체를 확인했다. 동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풀더미에 휩싸인 나뭇가지 무더기였다. 나뭇가지를 감고 있던 풀들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제자는 상상 속에서 동물의 털과 갈기를 보고, 발과 발톱 따위를 보았던 것이다. '밤의 존재'는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 제자는 결과적으로 마음속에서 '밤의 존재'들을 다양하게 창조하고, 자신의 피조물인 그 존재들에게 볼모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존재들은 조력자가 아니라 적이었다. 돈 후앙이 제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둠 속에서 만난 '밤의 존재'들을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는 자신의 '역사'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역사를 버려라.' 그 의미는 돈 후앙이 바위 앞에서 했던 말과 다르지 않다. "그냥 보라." 여기서 '역사'란 개인사와 같은 사사로운 역사적 사실들의 집합물이 아니라, 그런 사실들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한 개인의 내면에 형성된 가치판단의 기제(機制)를 말한다. 제자가 수풀더미에 휩싸인 나뭇가지를 두고 여러 동물과 괴물을 창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바로 그 기제가 작동됐기 때문이었다. 돈 후앙은 그 기제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산골로 들어온 첫해에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나 역시 자신의 '역사'를 버리지 못함으로써 자연을 '오독(誤讀)'했던 일들이 많았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집에 거처를 정했을 때였다. 처음 몇 날은 밤마다 집안 구석구석에서 기이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뭔가 삐걱대는 소리, 덜커덩거리는 소리, 서로 부딪혔다가 넘어지는 소리, 창문을 흔드는 소리, 한숨소리, 쥐들이 부스럭대거나 달리는 소리, 깊은 밤 고라니나 너구리 같은 동물이 집 주변을 지날 때, 그래서 그들이 낙엽 따위를 밟을 때 들려오는 소리 따위처럼 소리들은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소리는 단순히 소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 소리들은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상념들과 결합하면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 '이야기'들은 뭔가 내게는 도통 우호적이질 않았다. 내 마음속의 어떤 지식과 기억들이 그 소리들에 덧칠을 했으며, 마침내 그 상상 속에서 도둑놈 이상의 불온한 인간들이 나타났다. 바로 '밤의 존재'들이었다.
최근에 겪었던 일도 그렇다. 며칠 전 산전(山田)에서 마른 옥수수와 박을 따내던 중, 그만 날이 어둑해졌다. 리어카에 짐을 싣고 내려오기 직전, 산전 위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흰 옷을 입은 어떤 '인간'이 어둑한 잣나무숲 앞에 홀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나를 향해 말없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무슨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난 늦봄, 콩을 파종할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그 '인간'은 멧비둘기 같은 새들로부터 콩밭을 지켜달라는 뜻으로 내가 세워놓은 허수아비였다. 그 '인간'도 '밤의 존재'였다. 이런 경우 말고도 달밤에 어느 들녘을 지나다보면, 허수아비 따위에 속는 일은 많다. 숲이나 산에서는 때로 허리가 꺾인 고목에도 속는다.
눈과 귀란 것이 대체로 이렇다. 보고 듣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느끼고 생각한 대로 보고 듣는다. 심상(心象)의 풍경이 이러저러하면, 눈과 귀는 반드시 그것을 반영한다. 밤의 소리들을 불온한 '인간'과 관련해 상상하거나 산전에서 만난 '허수아비'를 움찔하며 '인간'으로 해석한 것은 감각기관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결국 속더라도 감각기관에 속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에 속는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늘 어렵다. 돈 후앙의 이야기는 미주 대륙 원주민인 인디언들 세계의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까닭에 다소 낯이 설지만, 곰곰 사색해보면 많은 시사를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