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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일본에서 성행했던 식인
게시물ID : mystery_90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18
조회수 : 1174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8/24 11: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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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이후 : 빠르게 한파 시작


● 농민반란 급증

d9a638e243bc26d5ed0b116bb6d0100a.png 과거 일본에서 성행했던 식인


● 정부의 대책

당시 에도막부 시대의 일본은 봉건체제로 각 번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기 대문에 국가적인 대책은 세울 수 없었음.

거국적으로 구휼책을 실시하던 조선과는 사뭇 달랐던 양상


● 아비규환

온갖 식물의 뿌리는 다 캐 먹고, 짚을 갈아 가루로 먹어가며 연명, 독초도 마다않고 뽑아서 삶아먹을 정도

개, 말과 같은 동물 닥치는대로 잡아 먹음.

종이도 가리지 않아, 이 때 절의 경전을 모두 먹어 치움

어느 영주는 기근을 버티는 묘책으로 진흙이나 배설물을 익혀 먹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도


●식인 횡행

당시 식인에 대한 여러 사건 괴담


●죽은 사람의 고기를 서로 빌려주는 일

어느 집에 눈보라를 헤치고 한 여자가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이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한쪽 팔이던 한쪽 발이던 나누어 주세요.

우리 할머님도 2, 3일 안에 돌아가실 것 같으니 그 때는 꼭 답례하겠습니다."


●하치노헤 마을의 살인귀

하치노헤 마을에 꽤 부유한 집이 있었지만,

기근 탓에 가족 여섯 명 중 네 명이 굶어죽고 말았다.

남은 것은 아버지와 10살 난 아이 뿐.


아버지는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집 안의 것을 모두 처분하고아이를 집에 남긴채 마을로 나갔다.


몸이 에일 듯이 추운 날이었다.

입에 넣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이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마루에 떨어져 있던 썩은 가지를 씹는 사이, 자신의 손가락을 뜯어 먹어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아이는 피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먹고 있었다.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에

아버지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사 온 음식을 아이에게 배부르게 먹였다.


그리고 아이가 잠들자,

아버지는 아이의 목을 잘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다른 지방으로 시집을 갔던 딸이

아버지와 남동생이 걱정돼 친정에 왔다.


하지만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시체 뿐이었다.

그녀는 울면서 남편에게 가서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장례식을 치뤄줄 수도 없으니 집에 불을 지르고 와라.

개한테 뜯어 먹히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도 곧 가마."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여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불을 피우려 했지만,

두 사람의 시체를 보는 사이 배고픔을 참을 수가 없어

난로의 불에 시체의 한 쪽 팔을 구워 보았다.

그리고 여자는 두 사람을 모두 먹어 치웠다.

굶주림을 채우자 더 이상 부모도, 형제도 없었다.

여자는 정신을 놓고

나중에 찾아온 남편과 자신의 아이도 죽여 그것마저 먹었다.

여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는 굵어지고, 눈의 색도 이상하게 빛났다.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들판을 헤매며 시체를 찾아 방황했다.

기근 때문에 죽인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들개들이 몰려다니는 곳에 가면

사람의 시체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여자는

살아 있는 아이들에게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게된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여자를 쫓아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불안했고,

오히려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간신히 여자를 산 속으로 쫓아냈지만,

이번에는 나물을 캐러 가는 사람들을 덮쳤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사냥꾼을 불러 여자를 총으로 쏴 죽이고 말았다.


●히라가쵸 마을의 노파

히라가쵸 마을에는 아기를 버릴 때,

강 아래 절벽으로 버리게 되었다.

그 벼랑은 무너지기 쉬워서 기어오를 수 없었기에

언제부터인가 거기에 버리게 된 것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아이를 버리는 것이기에, 울며 외치고 벼랑을 기어 오른다.

하지만 흙이 무르기에 바로 무너져서 떨어진다.

그런데도 갓난아기들은 어머니의 젖을 그리워하며 기어오르는 것이다.

어리고 얇은 그 손가락에는 피가 스며들고,

이윽고 힘도 다해 울음소리도 점차 가늘어진다.

아침이 되면 까마귀가 먹구름 같이 달려들어 눈을 쪼아먹고,

배를 갈라 그것까지 쪼아먹는다.

그리고 어느 밤,

한 명의 노파가 아들에게 끌려와 벼랑 위에 왔다.

"살려다오! 살려다오! 이제 다시는 뭘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게!"

노파는 울부짖었지만, 아들은 듣지 않는다.

그리고 비정하게도 울부짖는 노파를 벼랑 아래로 밀어 떨어트렸다.

강가에 굴러떨어진 노파는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간신히 근처를 둘러보고 몸을 떨었다.

보이는 것은 갓난아기의 백골과 썩어가는 갓난아기의 시체,

그리고 까마귀가 먹다 버린 시체 뿐.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갓난아기의 흐느낌까지, 완전히 지옥이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노파는 흙을 잡고 올라가려다 깨달았다.

자신이 잡은 것은 끊어진 갓난아기의 다리였다.

아마 까마귀가 먹다 흘린 것이거나 떨어지다가 잘려나간 갓난아기의 다리일 것이다.

내던지려다 노파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가지고 간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뼈만 남은 다리를 쪽쪽 빨고 있었다.

그 이후로 노파는 버려진 아이를 먹으며 목숨을 이어 나갔다.

사냥감을 빼앗긴 까마귀는 기분 나쁜 듯 모여 날다가,

이윽고 노파에게 덤벼 들었다.

"쉿! 쉿! 저리 꺼져라!"

노파는 썩은 나뭇가지 같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까마귀 무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노파는 일어서서 새를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갓난아기의 뼈에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만다.

그 순간, 까마귀들은 그것을 신호로 한 것 같이 노파를 쪼기 시작했다.

눈을 찌르고 옷을 찢었다.

노파는 벼랑을 기어오르려 했지만 흙은 무너질 따름이었다.

까마귀는 가차 없이 머리카락을, 다리를, 그리고 손을 찢었다.

이윽고 까마귀들이 날아 오른 뒤 남아 있는 것은 노파의 백골 뿐이었다.

그 이후로 강의 이름은 붕천(崩川)이 되었다.

기근이 끝나고도 그 곳에서는 밤마다 갓난아기가 흐느껴 우는 소리나

노파의 비통한 절규가 밤바람에 섞여 들려 왔다고 한다.


결과

● 아사자 속출 -> 인구의 급감

* 위의 수치는 출생으로 인한 인구증가를 무시했기 때문에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이 보다 많았을 것이다.


● 잔악무도했던 텐메이 대기근

위의 수치에서 보듯, 대기근의 피해는 일본 못지 않게 조선도 심했음.

그런데 조선에서는 식인에 대한 기록은 경신대기근 때 불과 1차례였지만,

일본의 경우 그 수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음.


● 한국에서는 잊혀진 역사, 일본에서는 뚜렷이 기억하는 역사

한국에서 조선 후기 대기근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믈다. 국사시간에 전혀 안 배우기 때문에...

하지만 일본에서 텐메이 대기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체에서도 많이 다루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았기 때문에

어쩌면 섬나라라는 고립된 특성과 화산, 지진 등의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텐메이 대기근은 과거에 있었던 일인 동시에, 미래에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는 두려운 자화상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의 대천원이라는 절에 있는 텐메이 대기근 사망자 추모 비석 (1785년 건립)

비석의 뒷면에는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후에 누군가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의도적으로 깎아서 없앴다.



텐메이 기근

1783년 5월, 아사마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 폭발에 의해 엄청난 수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지만,

정말로 두려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화산 폭발로 인한 환경 재앙이 발생한 것이다. 

용암과 화산 폭발물이 인근의 논밭을 황폐화 시킨 것은 물론, 화산재와 이산화황이 온 하늘을 가득 덮고

햇빛을 차단한 채 지속적인 산성비를 뿌려댔다. 

가뭄과 냉해, 화산재는 모든 곡식을 말라죽였고 그 후 몇 년간 일본 역사에 남는 대기근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텐메이 대기근.


당시 남부번에서 기록된 것만 아사자 40,850명, 병사자 23,848명, 가족 전멸로 폐허가 된 집이 10,545채가 발생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대기근이 혼슈를 휩쓸었다. 


급기야는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지고, 그나마도 힘이 약해 남을 죽일 수 없는 이들은 밤에 갓 묻은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잡아먹고 자신의 아이를 오밤 중에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죽인 후 그 시체를 가져와 먹는 지옥도가 현실에 펼쳐진다.


당시의 참담한 지경을 묘사한 글 중에는

「(식솔을 줄이기 위해)다시는 배고프다고 울지도 보채지도 않겠다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8살 딸아이를 돌로 내리쳐죽인 후 강에다 내버린」

부모들의 이야기도 나오는 등,그 기아 사태는 가히 아수라에 비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집도 땅도 버리고 다른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했지만 

다른 마을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고, 여기저기서 난민이 발생하자 그나마 마을의 조직체가 살아있는 마을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도적떼로 변하기 전에 아예 먼저 다 죽이자는 이야기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필사적인 상황이었기에 죽고 죽이는 것은 아무런 죄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아직 힘이 있는 젊은이들과 남자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인근 마을을 습격, 몰살시키곤 했다. 

게다가 그렇게 죽인 시체들은 식량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좋은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라 어느 정도 자연재해의 영향을 덜 입은 지역의 마을 중 

식량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마을 사람들은 난민들을 가엾게 여겨 자신들의 부족한 식량을 내주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오랜 시간 굶은 난민들은 대부분 밥을 먹는 순간 죽었다고. 

몇 개월 간이나 변변한 식사를 챙겨먹지 못한 위에 갑자기 음식을 구겨넣으면 인간은 쇼크사하기 때문이다.


난민들은 눈알이 뒤집힌 채 모두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다 죽었고, 음식을 대접한 농민들 역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비극이 일본 전체에서 반복된다. 좋은 의도에서 한 생각이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부르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망명해 오는 난민들을 쫒아버리기 시작했고, 마을 인근은 아귀와 아사자로 넘쳐나 그 역시 지극히 처참한 광경이 되어버렸다.


당시의 위령비가 세워진 마을은 아직도 일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시대에 대해 자세한 민간의 

언급은 대부분 제대로 전승되지 않는다. 

너무나 처참하고 모두가 죄를 저지른 그 시대, 그 참담함은 몇 대에 걸쳐서 단단히 입막음을 당했고, 

또 그 처참한 사태에 스스로 입을 닫은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피안화의 전설

강가에서 보기 쉬운 선명한 붉은색 꽃, 피안화.

사실 이 피안화는 독을 가진 식물로, 몇 년에 걸친 텐메이 대기근으로 인해 온갖 곡식과 작물, 

나무껍질마저 다 동이 나자 사람들은 이 독이 있는 꽃마저 먹기 시작했다. 

물에 삶거나 살짝 데치면 일단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정도까지는 독을 뺄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식중독의 위험을 안은 채로 이 꽃마저 다 먹은 이들 앞에 최후로 남은 것이 바로 인육. 


즉, 인간세상이 아귀도로 타락하기 전,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인데다 피를 방불케하는 

선명한 붉은색 꽃을 피우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피안화(彼岸花)라고 불리게 되었다. 

(피안(彼岸)이란, 강 건너 저쪽 둔덕이라는 뜻으로, 속세/현세와는 상대적인 개념을 일컫는다) 

지금은 그저 그 선명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이 꽃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도 많은데다 

심지어 꽃꽃이에도 자주 이용되지만, 비교적 연배가 있는 노인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재수 없는 꽃이라며 

경원시 하는 이들이 많다.

출처 http://blog.daum.net/timur122556/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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