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텍스트는 대학교 수업시간동안 발표한 내용의 기조 텍스트입니다
예술을 정의내리는 것이 갈수록 난해해져감에 따라 - 다다이즘이나 팝아트(고전 예술의 정의를 정면에서 부정) - 예술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그 내포를 줄여가다보면 결국 예술에는 ‘던져진 메세지’ 라는 개념이 남게된다. 즉 예술이란 작가가 던지는 메세지, 즉 소통이다. 아무리 자기 파괴적이고 원본 부정적 예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 의 마음에 최소한의 유의미한 메세지도 던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우발적인 노이즈에 불과하다. 예술이 일종의 소통이라는 것을 논하기 위해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그것 은 오늘 내가 하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오늘 매우 독특한 방식의 소통의 구조를 가지고 있 는 문화컨텐츠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게임은 다른 매체들이 갖지 못한 강력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양방향 소통가능 성이다. 이전까지의 예술작품의 소통의 구조가 마치 라디오와 같이 작가가 감상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일방적인 메세지였다면 게임은 무전기를 통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과 같다. 물론 그 주제는 작가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만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의도를 투영할 기회를 얻는다. 소설이나 영화, 회화같은 예술작품들이 그것이 씌여지는 순간 작가의 메세지가 작품속에 고착되고 이를 감상하는 이에게 남겨진 자율성이란 결국 독해 의 자율성 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플레이어의 의도가 전체적인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매체는 게임만한 게 없다.
여기 아주 간단한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의 제목은 Excution, 즉 처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게임을 시작하면 맨 먼저 짧은 경고문구가 출력된다. ‘당신의 행동에 따라 결 과는 달라진다. 옳은 선택을 하라’는 메세지다. 경고문구가 출력된 뒤 스페이스바를 누르 면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플레이어의 마우스를 따라 크로스헤어가 움직이고 화면 에 가운데에는 눈을 가린 사람이 기둥에 묶여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플레이어는 크로스헤 어를 사람에게 조준해 총을 발사할 수도 있다. 만약 총을 사람에게 발사하게 되면 게임은 그 즉시 끝나고 화면에는 게임오버가 출력된다. 이 게임이 던지는 메세지는 이 게임을 다 시 실행했을때 나타난다. 게임을 다시 켜보면 게임이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한번 죽인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않고 쭉 그대로 죽은 상태로 남아있다. 이러한 내용은 컴퓨터의 레지스트리에 저장이되기 때문에 복잡한 레지스트리 조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게임을 다시 지웠다 깐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방법은 컴퓨터를 포맷하는 수 밖에 없다.
이 게임에서 ‘You win’ 이라는 메세지를 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숨겨져 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게임을 끄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은 게임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라면 꽤 떠올리기 어려운 방법이다. 만약 게임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 인다면 이 게임은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게임 오버의 결과를 안겨준다. 그리고 그 게임오버 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게임오버이다. 사람은은 왜 게임상의 사람을 죽이는가? 게임상의 사형수가 어떠한 죽어마땅할 행위를 했는가? 단순히 게임상의 사람이라서? 아니면 게임을 다시 켜면 살아날 것이라 생각해서? 게임을 진행시키기 위해, 점수를 위해, 아니면 다 른 목적을 위해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것은 정당한가? 나는 심지어 이 게임을 통해 사형제도의 폐지에 대해 논할 수도 있고 정해진 프레임 내에서의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서 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희곡이 모방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예술이라 면 게임은 당신의 선택과 행위,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까지 모방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생생하게 그 감정을 전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고정된 과정과 결과를 강요하는 선형적 스토리의 게임도 있고 말초적인 욕구나 단순한 성취감만을 유인으로 하는 게임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영화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세상에는 예술 영화가 있는 한편 뿌셔뿌셔로 일관한 트랜스포머같은 영화도 있는 것이고 사람의 고뇌를 담은 시와 소설이 있는가하면 투명드래곤같은 소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 대의 게임산업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해주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다. 게임이 다른 문화매체 에 비해 예술성이 높은 작품의 출현빈도가 현저하게 낮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상한 점은, 과거 기술력이 부족했던 시기에도 작품성이 높은 게임이 자주 나타났던 반면 요새는 기술력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말초적이고 단선적인 게임들만 범람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MMO게임의 발달로 게임산업은 전례없이 거대해졌으며 앞으로도 지속 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반하는 부작용들도 점점 드러나고 있는 상황, 심지어 몇년 전 정부의 한 부처에서는 게임을 ‘마약’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게임산업을 죽이려 한다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지만 과연 게임을 죽이는 것이 비단 정부 뿐일까? 그렇다면 게임을 죽이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전이라고 말하기엔 조금더 오래 전, 온라인 게임의 대세는 유료화 게임에서 부분 유료화로 옮겨갔다. 게임플레이 자체에 과금을 하지 않지만 게임을 원활하게 플레이하 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심지어 요새는 게임 자체를 돈 주고 파는 패키지 게임 시장에서도 이러한 부분 과금시스템의 수익성을 의식해 게임 내에 게임의 진행도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는 방식의 부분 유료과금 체계를 점점 도입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이런 부분 유료화의 꽃은 통칭 캡슐 - 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에서 만개했다.
이 시스템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캡슐은 우리가 어렸을 적 동전을 넣고 조그마한 완구를 뽑았던 뽑기,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가샤폰의 캡슐로부터 그 모티프 를 채용한 것이다. 현실의 현금을 주고 캡슐, 혹은 아이템상자라는 것을 구매하고 이를 열 어보면 게임에 도움이 되는 랜덤 아이템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랜덤 아이템 중에서는 게임 내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아이템이 극히 낮은 확률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 희귀 아이템 하나를 갖기 위해서 하나에 천 얼마씩 하는 이 캡슐을 수십만원어치 지르지만 결 국 얻게 되는 것은 한무더기의 잡템들 뿐 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 게 이용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돈을 투자하는데, 만약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을 투자하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계속해서 돈을 투자할 것인지 아니면 투자를 멈출 것인지에 대해 결정해야 한다. 경제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투자를 멈 추고 손을 털고나가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지만 사람의 심리는 매몰비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모든 캡슐의 뽑기가 독립시행이기 때문에 이전까지 얼마의 금액을 투자했든 상관없이 원하는 것을 뽑을 가능성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확률적으로 이미 많은 돈을 투자했으니 조금만 더 투자하면 원하는 것을 뽑을 수 있다고 착각을 하게되며 이 상 태에서 투자를 멈추는 것은 이전까지 사용된 금액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환상을 심는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별 가치도 없는 물건에 수십만원을 쓰게 되는 것 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물건의 가격은 물건에 대한 기대가치의 총체이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 물건이 자신에게 줄 만족이나 행복감이 그 가격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재화나 용역을 팔 때 그 물건의 가치를 거짓으로 꾸며 비싸게 판다 면 그것은 사기이다. 물론 게임의 캡슐시스템은 그 가치를 구매자에게 객관적으로 적시했 다는 점에서 사기는 아니지만 이러한 게임산업의 행태를 지적하는 더 정확한 표현을 우리 는 알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사행성’이다. 우리가 어떠한 가치를 기대하며 현금을 지불하지만 그 결과로 얻는 것이 지불한 금액과 상응하지 않고 현저히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는 것은 사실상 게이머를 상대로 슬롯머신을 운영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게임 회사는 강원 랜드처럼 정식으로 등록된 카지노이거나 마사회에서 승인한 경마장도 아니면서 온라인상 에 상설 도박판을 열어놓은 셈이다. 한 게이머는 이러한 내용을 비꼬며 두근두근 월급상자라는 패러디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법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보상으로써의 월급의 가치를 운에 맞긴다면 게임 개발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게이머들도 자신들이 지불한 금액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기를 원한다.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게임 개발에 투신한 사람이 몇몇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의 주류 퍼블리셔들의 게임 개발 방향은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고 게이머로부터 많은 돈을 퍼올리는 시스템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게임의 개발방향은 흥미롭고 의미있고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쩔수 없이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게임을 만드 는 것이 목표다. 어떤 것에 몰입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것이 재미있고 즐거워서 몰입하게 되는 것과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중독되어서 몰입하게 되는 것. 상대적 으로 전자는 만들기 어렵고 창의력을 요구한다면 후자는 만들기 쉽고 몇가지 중독적 요소 만 넣으면 된다. 심지어 몇몇 회사들은 게임의 중독방지를 위해 게임 시간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피로도’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으나 또 한편으로 돈을 내면 피로도에 관련없이 얼마든지 게임을 할 수 있는 ‘어떤의미로’ 창의적인 과금체계를 도입하면서 또 다른 돈나올 구석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오로지 돈이 중요한 회사에게서 게임의 질을 바란다는 것은 거의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요새 게임업계에서 정부가 게임산업을 죽인다는 식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게임 개발자 협회에서는 자회의 홈페이지에 게임산업의 죽음을 알리는 근조 배너를 올리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나는 게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들의 행태가 고와보이지 만은 않는다. 정부가 게임산업을 죽이고 있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난 게임산업이 이미 오래전에 게임을 죽였다고 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