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초에 출판사로 묘한 전화가 걸려왔다.
“거기 북스피어 출판사죠? 사장님 계신가요?” “네, 전데요.” “문의할 게 있어서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미야베 미유키 에도물을 박스로 제작할 수 있을까요?” “할 수는 있는데, 실례지만 전화 주신 분은 누구신지.” “그냥 독자예요.” “아, 그냥 독자...분이시군요.” “네, 100세트만 박스로 만들 수 있을까 해서요.” “만들 수는 있지만 100개면 단가가 비싸져서...” “비용은 상관없고요. 다만 조건이 있는데요.” “조건이요?” “네, 박스 디자인에 원하는 사진을 넣을 수 있을지.”
출판사를 시작하고 이런 주문은 처음 받아본다. 박스 디자인을 할 때 원하는 사진을 넣어달라니, 자못 신선하다고 느끼는 한편으로 무슨 사진을 어떻게 넣겠다는 건가 궁금해져서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에. 자신이 곧 결혼을 하는데 그 상대를 북스피어 독자교정에서 만났다는 거다.
“사장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이라며 자매님이 들려준 설명에 의하면, 몇 해 전 부산 이터널저니에서 <흑백> 올나이트 독자교정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분과 눈이 맞아 연애한 끝에 결혼을 약속했고 결혼 계획을 세우며 하객선물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두 사람을 이어준 에도 시리즈를 박스로 제작하며 자신들의 사진(아래)을 디자인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나는 한참 동안 “아하”라거나 “오호” 하고 맞장구를 치며 열중해서 듣다가 마지막에는 벌떡 일어나 “그렇다면 당연히 제작해 드려야죠” 하고 시원시원하게 얘기해 주었다. 아아 마침내 북스피어 독자 커플 1호가 탄생하는 건가. 여기서부터는 이야기가 빨라져 곧 두 사람(자매님과 결혼할 남자분)이 정식으로 결혼 선물용 박스셋을 의뢰하기 위해 북스피어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들은 내용은 두 사람의 허락을 받고 쓰는 건데. 남자 쪽은 상처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십대 초에 결혼하여 아내가 1년 뒤에 임신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유산하면서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고. 남자는 아내를 잊지 못해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다가 이번에 재혼을 결심했는데, 곧 신부가 될 자매님의 말에 따르면 집안의 반대로 순탄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코로나 시국인데도 결혼을 서두르는 거라면서. 그 과정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하여, 나는 실비만 받고 만들어 드리겠노라 덥석 약속하고 말았다.
다만 제작기간이 빠듯해서 겨우 약속한 날짜를 하루 앞두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혼식 당일. 모처럼 날씨가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나는 박스 샘플을 차에 싣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북스피어의 1호 독자 커플이 탄생하는 날이라서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흥분해 있었다.
한데 신랑 신부가 입장하려던 바로 그때――.
“잠깐만요.”
낯선 여자의 새된 소리가 식장의 흥청거리는 공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신랑 신부는 물론 가족, 하객, 식장 직원 할 것 없이 모두가 목소리의 주인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그 목소리는 그토록 절박했다. 젊은 여자였다. 하얀 얼굴이지만 뺨은 발갛게 상기되고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여보!” 신랑을 바라보며 소리 친 여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저, 당신의 아내 하나예요!” 목소리가 드높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미안해요. 믿기지 않겠지만 저, 환생했어요. 다시 한 번 당신과 살려고.”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인지. 결국 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오래전 남자와 부부였고 아기를 유산할 때 함께 세상을 떠난 전처라는 여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기이했지만 혼란에 빠진 남자가 ‘하나’라는 여자를 다그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 어딘지 기억하느냐, 둘만 있을 때 불렀던 애칭을 기억하느냐, 하는 내밀한 질문에도 여자가 척척 대답을 했다는 점은 더욱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여자는 환생한 것일까.
이 소동의 전말이 궁금한 형제자매님들은 어제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기타기타 사건부>에서 확인해 주시길(뻔뻔하다). 뻔뻔한 김에 마침 오늘이 제 생일이니까 축하는 이 책의 구입으로 받을까 하는데, 어차피 아니 살 거지만 그냥 입으로만 사신다고 말씀해 주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아요. 정말로.
생일을 자축하며 오랜만에 주섬주섬 낚싯대를 드리워본,
마포 김 사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