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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고역이라거나, 인간관계에 치여 정신이 붕괴 직전일 때 어떻게들 하시는지. 일전에 의사로 일하는 친구가 “전혀 모르는 장소에서 멍하니 있으면 기분전환이 된다”고 조언해준 적이 있다. 이를테면 낯선 고장의 호텔에 누워 스마트폰도 티비도 꺼둔 채로 낯선 풍경을 보며 빈둥대면 좋다고. 일종의 ‘정신적 입원’ 같은 거란다.
친구의 조언을 듣고 딱 한번 ‘무작정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기댈 곳 없는 허전함으로 방황하던 때였다.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도착해 보니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이었다. 어느새 해가 져서 주위는 어둑해져 있었다. 마침 일본식 료칸처럼 보이는 온천장(과 ‘대형 욕장 완비’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한데 지방도시 변두리에 흔히 있는 싸구려 숙소겠거니 생각하고 들어간 나는 조금 놀랐다. 재도색 작업을 마친 듯 크림색 내벽은 산뜻했고 통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카운터에서 기모노 차림의 여성과 와이셔츠를 입은 남성이 나를 맞아 주었다. 여성은 웃는 낯이었고 남성은 무표정이어서 사장과 직원의 관계가 아닐까 짐작했는데 과연 그랬다.
숙박비는 놀랄 만큼 저렴했다. 내가 카드를 내밀자 여주인은 “감사합니다”라며 또 방긋 웃더니 “손님, 공교롭게도 오늘은 투숙객이 없어 큰 욕실을 닫아 두어서. 내일 아침에는 대형 욕실을 이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커다란 온천장에 손님이 나 혼자뿐이라. 하지만 덕분에 제일 경치 좋은 방을 배정받았으니 상관없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남직원의 안내로 방에 들어간 나는 한숨 돌리고 샤워를 한 뒤 침대에 펼쳐져 있던 유카타를 입었다. 그럭저럭 하다 보니 허기진 배가 꼬르륵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프런트에 전화해서 룸서비스로 간단한 식사가 될지 물었다. 잠시 후. 여주인이 남직원과 함께 객실로 식사를 가져왔다.
대형 욕실을 제공하지 못해서 서비스를 준비했다며 여주인은 청주 한 병을 좌탁 위에 올려놓았다. 한데 음식을 가져다주고 돌아갈 줄 알았던 여주인은 전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남직원에게 “수고했어요. 여긴 이제 됐어요”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까딱하고 객실을 나갔다. 방 안에는 둘만 남았다. 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색함을 감출 요량으로 직업이 추리소설을 만드는 편집자라는 둥 쓸따리없는 소리를 잔뜩 지껄이고 말았다. 여주인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틈틈이 짤막하게 장단을 맞춰주는데 어쩐지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말로 느껴졌다. 나는 기가 살아서 마치 <연애의 목적>에 나오는 박해일처럼 더욱 주접을 떨었다.
한데 어느 순간 여주인이 치켜뜬 눈길로 의미심장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어, 손님.”
“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저, 실은 아까부터 마음이 자꾸 설레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때 내 머릿속에 야릇한 상상이 스쳤다. “설레다니, 어째서……?” 하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얘기를, 제가, 지금 손님에게 들려드리고 싶어져서요. 추리소설을 만드신다니 이런 일에 관심이 많으실 것 같고.”
나는 웃어 보였지만 여주인은 웃지 않았다. 실내 온도가 조금 떨어지고 서늘한 정적이 먼저처럼 내려 쌓이는 기분이었다. 순간 나는 여주인이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종류인지 감을 잡았다. 그것은 삼대에 걸쳐 운영해 온 이 온천장에 가보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어떤 상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 형제자매 여러분. 오랜만에 낚싯줄 한번 드리워 봅니다. 이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분들은 지난주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신작 『인내상자』를 열어주시길. ‘안내상자’ 아니고 ‘인내상자’입니다. 열고 싶어도 참아야 (인내해야) 한다, 결코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에 얽힌 이야기. 요즘 같은 계절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에요. 즐겨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