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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나오는 호텔
게시물ID : mystery_94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포김사장
추천 : 1
조회수 : 70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4/04 09: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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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유령이 나오는 호텔에 관해 들은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일본 특파원으로 일하는 기자와 한잔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나온 얘기다.

가나자와에 있는 해당 호텔의 이름은 히라카와초이치반,

사건의 발단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 자리에는 원래 산부인과가 있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산부인과였다.


산부인과 원장에게는 결혼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임신을 하고 20개월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한다.

온갖 검사를 다 해봤지만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이유는 밝히지 못했다.

 

지역에서 유명한 산부인과다 보니

원장 체면에 다른 산부인과로 데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딸이 남편과 크게 다투게 되었다.


화가 난 남편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는데

문제는 이튿날에도 남편이 나오지 않자 불안해진 식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더니

남편이 사라지고 없었다는 거다.

 

남편의 실종으로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딸의 사정까지 드러났고,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산부인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산부인과 건물은 오랫동안 흉물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는

이시카와현립도서관으로 가나자와가 알려지면서

그 자리에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이 들어섰다.

 

한데 그곳을 이용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령을 봤다"는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다.

아기를 낳다가 죽은 여자의 원한이 만들어낸 유령이라는 둥

꽤 그럴싸해서 현지 주민들도 놀랄 정도였다는 것이

내가 들은 얘기의 전말이었다.


지난 달, 내가 가나자와에 간 건 딱히 유령 얘기에 혹해서가 아니다.

평소에 어울리는 편집자 선배들과 일본에 놀러가게 되었는데

행선지가 하필 가나자와였고

어쩌다 보니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에 묵게 되었을 뿐이다.

우연이 겹친 것이다.

그리고 우연이 이어진 건지 묘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호텔에 투숙한 첫날 자정 무렵.

갈증으로 잠을 깬 나는

1층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뽑을 요량으로 방을 나섰다.

 

그때.

 

1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이 호텔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 하고 떠올린 순간

비상구 쪽에서 인기척을 감지했다.

 

야심한 시각에 누굴까.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여자였다.

비상구 층계참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내 그녀가 난간 밖으로 훌쩍 한 발을 내디뎠다.

아니,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아래는 콘크리트가 깔린 바닥인데. 

단단한 콘크리트...

 

내가 숨을 꿀꺽 삼키려는 찰나,

비상계단에 있던 여자가 사라졌다.

떨어졌다, 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12층에서 내려다본 콘크리트 바닥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명이 밝아서 바닥이 훤히 보였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착시인가.

떨어진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었나.

프런트에 가 볼까.

 

그런데 뭐라고 하지?

12층 비상계단에서 누가 뛰어내린 것 같은데요?

어디에 떨어졌냐고요?

모르겠어요.

사라져 버렸거든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멍청한 짓이다.

그냥 음료수나 마시자.

한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눈앞에,

선글라스를 낀 그 여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여기까지도 충분히 이상했지만 더욱 이상한 일은

그 뒤로 내 방에 돌아오고 나서 벌어졌다.

 

무섭다고 느낀 와중에 간신히 눈을 붙였다가

나는 또 다시 잠에서 깼다.

이번에는 누운 채로 꼼짝도 못할 만큼 몸이 긴장되었다.

 

방 안에 누군가 있다!

맨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타는 듯한 냄새가 풍겨왔다.

 

화재였다.

호텔 방에 불이 난 것이다.


이건 꿈인가.

아닌데.

열기로 온 몸이 뜨거웠다.

그런데 죽는 건가, 하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힘으로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아까의 그 선글라스 여자였다.

이 사람은 유령인가.

흐릿한 의식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내 옷을 꼭 잡고 있어.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잡으라고, 꽉, 잡아."


그리하여 선글라스 여자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설

『가모 저택 사건』을 간단히 요약해 볼짝시면――,


1)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처음 시도하는 본격 미스터리

2) 주인공은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인데

3) 역사, 특히 현대사를 전혀 모름(현재 일본을 상징함)

4) 왜냐면 대학 시험을 치르는 데 필요 없으니까

5) 와중에 난데없이 과거로 타임슬립

6) 그곳에서 역사적 인물의 살인사건과 맞닥뜨림

7) 주인공은 현대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해결하려 하지만

8) 노력해도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9) 즉 이 작품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 역사는 정해져 있다는 것이 작가의 대답이지만,

‘우리들’이 (미래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무의미하냐면

결코 아니라고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말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정해졌든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것,

누가 뭐라 해도 자신만의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니까 말이죠.

 

주인공도 역사를 바꾸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는 일에 목숨을 걸죠.

『가모 저택 사건』은 뛰어난 역사소설인 동시에

장절한 러브 스토리라는 것도 좀 알아주시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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