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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원이라는 출판사를 아시는지.
게시물ID : mystery_95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포김사장
추천 : 9
조회수 : 239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07/22 14:4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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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고려원이라는 출판사를 아시는지.

파격적인 홍보로 대한민국 최대 단행본 출간을 자랑하던 곳이지요.

출판사 이름을 모르더라도 <영웅문>이나 <우담바라>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걱정을 하는구나”라는 TV 광고는

기억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중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소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책을 입수했는지 경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정가가 3,000원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주구장천 읽었던 수많은 추리소설 중에서도 

단연 ‘넘버 원’이었다는 겁니다.

 

제가 출판사를 차리고 가장 먼저 들여다 본 목록 가운데 하나가

‘망한 고려원에서 출간한 추리소설’들이었는데

<유니스의 비밀>은 출간 1순위였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계약하고

오랜 고민 끝에 제목을 <활자잔혹극>으로 바꾸었지요.

 

<활자잔혹극>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안 팔릴 수 있나 싶을 만큼 안 팔렸어요.

왜지.

홍보를 제대로 못해서?

제목이 별로라서?

이미 한번 나와서?

5년 뒤에는 계약 만료로 절판의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창고에 쌓인 책들을 처분할 때는 정말 눈물 나더군요.

 

한데 조선일보에서 ‘물리학자가 추천한 혐오를 이기는 책’으로

김상욱 교수가 <활자잔혹극>을 소개하며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한 겁니다.

젠장(털썩). 전화가 올 때마다 머리가 쑥쑥 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저로서는 “출판사에도 책이 없습니다, 미안해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활자잔혹극>은 추리소설로서는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를 처음부터 밝혀 버리거든요.

살인의 동기는 황당합니다.

범인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즉 자신이 문맹임을 감추기 위해 한 가족을 살해했습니다.

문맹이란 그토록 부끄러운 일인가?

사람을 죽일 만큼?

이 대목을 김상욱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나라는 문맹이 거의 없으니 이렇게 가정해 볼까요.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파티에 갔어요.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당신은 궤변 같은 첫 문장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도 얻게 될 겁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복간할 결심을 하진 못했어요.

이미 한 번 복간했다가 홀랑 망했기 때문에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지요.

그런데,

누군가 인터넷서점에 올린 이런 글을 올해 초에 읽게 되었습니다.

 

“김상욱 교수님이 추천해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소장하고 싶습니다!

중고가 3만원에 돌아다녀요ㅠㅠ”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이 말이

제 안에 남아 있던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저자와 다시 계약한 뒤에 번역을 다듬고 디자인도 새롭게 했지요.

물론 “이 사달이 난 것은 전부 김상욱 선생님 때문이니까 책임지셔야 한다”

고 협박(?)하여 엄청나게 바쁜 김상욱 교수의 추천사도 받아냈습니다.

 

아아 그리하여 10년 만에 다시 펴냅니다.

영국의 거장 루스 렌들의 걸작 장편,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추리소설 <활자잔혹극>,

북스피어의 ‘복간할 결심’ 시리즈 제1권입니다.

이번에도 안 팔리면, 정말 큰일 난다는 걸 좀 알아주셔야 해요...




두 번이나 복간했으면 한 권 정도는 사주는 것이 강호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마포 김 사장 드림.

 
출처 https://blog.aladin.co.kr/711186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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