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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2. 악마의 음모(2)
구본오가 여운형의 집으로 온 것은 지난밤이었다. 총독부에서 ‘조선언론보국회’ 결성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불교신문의 발행인 자격이었다. 여운형을 비롯하여 이왕 위장부왜를 해 온 사람들은 기밀유지를 위해 부왜단체에 적극(?) 참여하라는 것이 연맹의 지침이었다. 저녁 늦게 경성에 도착한 구는 건국연맹이 돌아가는 상황도 파악할 겸 여운형의 집에서 잤다.
둘은 겸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구를 생각해서 비린 것 하나 없는 조촐한 밥상이었다. 밥상을 치우면서 여운형이 말했다.
“아무래도 같이 가는 것보다 따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내가 먼저 가리까, 구동지가 먼저 가시겠소?”
“아무리 땡초라지만 내가 그만한 눈치도 없겠소. 여동지는 어젯밤은 나와 자느라 부인께서 섭섭하셨을 테니 부인 손이라도 한번 잡아드리고 오시오.”
여운형이 껄껄 웃었다.
“모르는 것이 없으니 땡초가 맞기는 맞는가 봅니다그려. 그렇잖아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고 있소이다. 그런데 구동지, 그자들이 절대 눈치챌 행동은 하지 마시오. 손뼉도 열심히 치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여동지나 잘하시오.”
다짐을 받듯이 하는 여운형에게 구는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정말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조심하고 조심해야 했다. 기밀유지가 거사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총독부에서 건국연맹을 알게 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었다.
구는 여운형의 집을 나서 천천히 걸었다. 경성 부민관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행사를 시작하려면 시간이 제법 남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입구에는 ‘경축, 조선언론보국회 창립’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때는 6월 초순이라 아직 아침나절인데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빽빽한지라 찜솥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다들 알 만한 인사들이었다. 지금부터 어떤 자들이 어떤 행동・어떤 발언을 하는지 눈여겨봐야 했다.
지식물을 먹었다는 부왜분자들은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신문사 사장들을 비롯해 간부급 기자들, 문화계 인사 등등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건국연맹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인사를 나누며 앞자리로 가서 앉았다. 여운형이 들어왔다. 여러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한참 후에야 여운형은 단상에 마련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구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여운형의 모습에 하마터면 소리내 웃을 뻔했다.
행사가 시작됐다. 국민의례가 있고, 정무총감 엔도가 연단에 올라 축사를 했다.
“에, 친애하는 언론인 여러분! 그리고 각계의 내빈 여러분! 에,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들 참석해 주신 데에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에, 여러분들이 열렬히 성원해 주신 덕분에 우리 황군은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에, 이제 성전을 승리의 영광으로 끝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에, 이번에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성전을 보다 영광스럽게 끝내기 위해서 언론도 총력을 결집하는데 빠질 수 없다는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 그리하여 조선언론보국회를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에, 거듭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떠나갈 듯이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뻔히 아는 거짓말을 해대는 엔도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지만 구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다. 몇몇은 아예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총독부 관리들에게 한번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발광들을 하는 중이었다. 모두 따라 일어나기 시작했다. 막판에는 구와 여운형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구는 속으로 염불을 외고 있었다. 곧 단죄받을 자들을 위한 기도였다. 부처님, 이 불쌍한 중생들을 굽어 살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임원선출이 있었다. 여운형은 명예회원에, 구본오는 참여로 선출되었다. 회장으로 선출된 최림이 연설을 시작했다.
“에, 친애하는 동지여러분! 에, 바야흐로 승리의 날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에, 우리 대일본제국의 목표는 그냥 승리가 아닙니다. 완승입니다. 에,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사회 각분야의 궐기가 요망되지만 특히, 에, 우리 조선의 언론도 총력을 결집하여 사상전에서부터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 사상전에서 패배하면 승리할 수가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조선언론보국회 결성을 시작으로 몇 달 잠잠했던 부왜단체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본토결전의 결의를 과시함으로써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을 맞는다는 대본영의 전략에 따라 부왜단체들을 총동원해 연일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베와 엔도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조선언론보국회 결성을 계기로 대본영의 지시에 따라 각종 궐기대회를 조종・독려했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지 않아 사그러들고 있는 중이었다. 날이 갈수록 패색이 짙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시도들이 효과를 발휘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지난번에 경찰서에 보낸 지시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때가 임박해서는 일이 되지를 않을 것 같소. 무슨 뜻인지 알겠소?”
드디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아베가 은밀한 눈빛으로 엔도를 바라봤다. 엔도는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알겠습니다, 각하.”
“시끄럽지 않고 은밀히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대책을 조속히 강구해 보시오.”
“예, 알겠습니다, 각하.”
엔도는 군인처럼 부동자세를 취했다.
박충금이 엔도가 보내준 차를 타고 총독부로 들어왔다. 엔도가 반갑게 박가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쓰다 이치로 의원님.”
“그동안 잘 계셨소이까, 총감.”
“날씨가 무척 덥지요?”
“앞으로는 더 더워지지 않겠소이까.”
깎듯이 예의를 갖추는 엔도였다. 박가로 말하자면 조선인이라고 하더라도 동경에서 민선 중의원을 두 차례나 지낸 인물이었다. 민선 중의원은 관선 의원들과는 천양지차였다. 주어지는 권력으로 따져도 대신들 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비록 전직 의원이라고 해도 박가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엔도로서는 천금보다 귀한 존재였다.
총독부가 당장 시작하려는 것은 조선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잡아다가 아무도 모르게 학살하는 일이었다. 단시일에 끝내야 하는 만큼 지금의 경찰력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검거 작전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전선이 왜국에 불리해지면서 현재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모두 전선으로 배치된 상태인 조선군을 동원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대규모 소요라도 일어나면 큰일이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인원이 급속도로 불어나서 이제 한반도 전체에 산개해 있다는 건국유격단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신경이 쓰였다. 지금 조선군은 유사시 관공서와 왜인들의 안전을 지키는 정도지 다른 어떤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결사적으로 저항을 한다면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모든 조건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총독부는 이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이 돼야 했다. 나중에 전말이 드러나더라도 그렇게 우길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엔도가 생각해 낸 것이 박가였다. 박가야말로 이번 일의 적임자였다. 이 일에 써먹기 위해서 대일본제국의 국민들이 박가를 두 번씩이나 중의원에 당선시켜 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조직적인 테러에 그만큼 경험이 많은 인간은 세계에서도 드물 것이었다.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한 충성심으로 따져도 박가보다 마땅한 자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온전히 조선인 내부의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 책임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박가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첫째, 현직 의원이 아닌데도 정무총감이 깎듯이 의원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좋았다. 정무총감으로부터 이렇게 깍듯한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조선인으로는 자신밖에 없을 터였다. 이게 다 중의원을 두 번이나 지낸 덕분이었다. 조선인으로서 왜국의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어디 쉬운 일인가.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아직껏 민선 중의원 의원이 된 조선인은 자신 뿐이었다. 이 모두가 일본과 천황폐하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내지인들에게 인정받은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