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
그대에게 드리는 꿈
14. 전야(1)
“예비검속은 잘돼가고 있소?”
아베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반쯤 감은채 물었다.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소련군이 두만강을 건너 경성을 향해 진격해 오는 상황에서 잠이 올 리 없었다.
“그게......”
엔도는 말꼬리를 흐렸다. 박충금의 말에 따라 당장 시작하라고 지시는 했으나 거기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소련군까지 밀고 들어오니 내지인 후송문제가 발등의 불이 됐다. 예비검속은 물 건너간 것이었다. 그래도 안대순을 비롯해 거동이 불편한 독립운동가 몇 사람을 검거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던 셈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형이라는 자도 검거했소?”
“그자라면 아직 검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당장은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지 않고 있으니까...... 현재 조센징들 중에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자는 누구요?”
“그야 김구란 놈이지요.”
생각 없이 대답하고 나서 엔도는 아차, 싶었다. 여운형을 들먹일 때는 뭔가 다른 뜻이 있었을 것이었다. 아베가 엔도를 힐끔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으나 엔도는 힐책이 담긴 눈초리로 느꼈다.
“현재 반도에 있는 자들 중에서 말이오.”
“반도에서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여운형이지요.”
한껏 조심스럽게 엔도가 대답했다. 아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감도 나하고 생각이 같구만. 그러면 당장 여운형과 접촉을 해보시오.”
“......”
엔도는 무슨 말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 이제 정말 항복은 시간문제요. 아나미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는 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소. 본토결전은 말도 안되는 소리요. 모든 전선에서 형편없이 무너지면서도 본토결전 운운하는 아나미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소. 이렇게 나가다간 천황폐하의 안위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지......”
"......"
아베의 음성은 노기를 띠고 있었다. 엔도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를 않아 전전긍긍했다.
“조센징놈들 요즘 어떤 이상한 움직임 같은 것은 없소?”
“예. 별 움직임은 없습니다.”
금세 표정을 바꾸고 자신을 노려보듯이 하는 아베를 향해 엔도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자신이 아는 한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아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다수가 전범재판에 회부되겠지. 그러나 제국은 살아남아야 하오. 그래서 후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오. 전쟁이 끝나면 언젠가는 조선에서도 배상문제를 제기하게 될 거요. 내가 폐하께 마지막으로 충성하는 길은 배상문제에 제국의 부담이 조금이라도 적어지도록 만드는 것과 내지인들 전부를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것이오. 조센징놈들이 아예 배상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그래서 생각해 낸 거요. 여운형을 만나시오. 만나서 총독부를 인계해 주겠다고 하시오. 그자라면 받을 것 같소. 능력도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조선 지배가 합법적이었음이 증명되는 거 아니겠소. 인수했던 것을 다시 인계해 준 것이 되니까. 그러면 배상문제는 없어지는 거지. 아니, 적어도 그렇게 우길 수 있게라도 만드는 것이 중요하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엄청난 이득이 될 거요.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무사히 귀환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오. 시간이 없소. 우리가 항복을 하고 나면 그자가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오. 쫓겨가는 우리에게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계획들은 중단을 할까요?”
“무슨 소리요? 하던 것들은 계속해야지! 궁극적인 것이야 시일이 촉박해 못 하더라도 우리가 조선을 완전히 뜰 때까지 독종놈들이 갇혀라도 있는 것이 백 번 낫지 않소?”
예비검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자 아베는 화난 어조로 힐책했다.
여운형은 피신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거사계획은 이미 정해졌고 자신은 무장봉기에 별 도움이 되지를 않을 테니 잡혀 들어간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거사가 성공하면 곧바로 풀려날 테니 구차스럽게 숨고 싶지도 않았다. 설마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죽이기야 하겠나 싶기도 했고 거사가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기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신문사로 전갈이 왔다. 엔도가 저녁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잡아 가두려고 호텔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분명 아닐 터였다. 여운형은 자못 궁금했다.
엔도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제법 굽혀 인사까지 깍듯이 차리는 것이었다. 이놈이 무언가 많이 아쉬운 일이 있는 모양이지. 하기는 너희놈들이 우리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생각하면서도 뭔가 어색했다.
“아니, 총감께서 소생을 다 찾으시고 웬일이시오?”
“아니, 여선생 같은 명사를 제가 찾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너스레를 떠는 엔도였다.
“명사라니 무슨 그런 과분한 말씀을...... 이리 찾아주시니 너무 영광스러워서 하는 말이지요. 나는 잡아가려고 여기로 나오라고 하는 줄 알았소이다그려.”
“농담도 과하십니다. 여선생 같은 분을 누가 잡아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요즘 잡혀간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이오. 허허......”
“그것은 경무국에서 착오로......”
여운형이 뼈 있게 눙치자 엔도는 말끝을 흐렸다. 여상이 아니라 여선생이라고? 빨리 아쉬운 거나 털어놔라, 이 쥐새끼 같은 자야! 엔도를 보자 문득 쥐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엔도의 얼굴은 영락없는 쥐상이었다.
어색하게 웃기를 그친 엔도가 물었다.
“식사 전이시지요?”
“예, 먹지 않고 왔소이다.”
“잘 하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어쩌다가 대일본제국이 이렇게 돼 버렸단 말인가. 식민지의 이런 비협력자놈에게 내가 아부를 해야 되다니. 엔도는 비감해지고 있었다.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 엔도가 물었다.
“여선생, 여선생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이 얼마쯤 된다고 보십니까?”
“추종이라니요? 당치도 않소이다!”
이놈들이 눈치를 챘나? 속이 뜨끔했으나 여운형은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여선생, 여선생은 만약에 지금 미국과 같은 자유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다면 조선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보십니까?”
“무슨 말인지 통......”
“우리 총독부가 보기에는 대통령은 여선생이 확실할 것 같은데요.”
“......”
무슨 뚱단지같은 소린지 모를 일이었다.
음식들이 날라져 왔다. 여운형은 허기를 느끼던 참이라 먹는 일에 열심이었다. 구본오의 말이 생각나 웃으며 먹었다. 강도놈이 나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밥을 사주면서 생색을 내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내 돈이니 열심히, 더 많이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논리였다.
엔도는 아예 포크도 들지 않았다. 여운형의 손놀림이 좀 숙지막해지자 한숨을 쉬었다.
“원폭 이야기는 아시지요?”
“소문은 들었소이다.”
여운형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엔도가 하려는 말의 본론이 무엇일까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엔도는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이제 우리 일본이 조선에 있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총독부는 여선생에게 총독부를 이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인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 내가 무슨 능력이 있소이까.”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으나 여운형은 내심 무릎을 쳤다. 총독부의 의도가 한순간에 읽혀졌다. 재빠르게 계산을 했다. 분명 좋은 일이었다. 일단 협상에 임하는 척하면서 거사일까지 시간을 끌어 총독부의 눈을 가리면 될 것 같았다.
“정치적 경륜으로 보나 대중적 지명도로 보나 조선에서 여선생을 따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선생이라면 아무런 문제없이 조선을 잘 이끌어 나가실 것입니다.”
“허, 그것 참......”
“내일 아침 댁으로 자동차를 보낼 테니 제 방으로 오십시오. 내일부터 통치권 이양에 관한 협의를 해나가기로 하시지요.”
엔도의 정중하기 그지없는 배웅을 받으며 여운형은 호텔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