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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4. 전야(4)
선실에서 왜인들의 가방을 뒤지던 정봉석이 뒤에 있던 우종구에게 은밀한 손짓을 했다. 앞에는 말끔한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초로의 사내가 자고 있었다. 우가 데리고 온 송동호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이시이였던 것이다. 하늘도 거사를 돕는 것일까. 이시이의 옆에는 부관처럼 보이는 자도 없었고, 거기다 몇 시간이나 청년단원들을 따라다니느라 진절머리가 난 순사들은 하나같이 갑판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거나 널부러져 쉬고 있는 중이었다.
셋은 이시이를 둘러쌌다. 송이 살며시 주머니에서 꺼낸 손가락보다 조금 큰 목각 불상을 이시이의 발 아래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이시이가 눈을 떴다.
“이거 네 거지?”
“아니다.”
바닥에 떨어진 목각 불상을 가리키며 송이 묻자 이시이는 셋을 노려보며 짧게 대답했다. 곧바로 정의 주먹이 이시이의 턱을 강타했다.
“이 씨ㅇ랄 도독놈으 새ㅇ가 거짓말을 해?”
바로 기절한 이시이는 부산 청년단에서 힘이 제일 세다는 정의 크고 우악스런 손에 멱살까지 단단히 잡혀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와 송은 이시이의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빼고 시계와 반지도 뺐다. 주변의 왜인들은 겁에 질려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도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이미 숨이 끊어져 갑판으로 끌려나온 이시이는 패대기를 당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이 분이 덜 풀린 것처럼 씩씩거리며 엎어져 있는 이시이의 뒷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바닥에 짓찧기 시작했다. 안경이 박살이 나고, 피가 튀기 시작했다.
“이 ㅇ팔놈이 거짓말을 해! 이 개새ㅇ가아!”
“마, 고마하소! 고마하라꼬!”
송과 우가 뜯어말리는 시늉을 했지만 정은 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뒤늦게 달려온 순사들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정의 등짝을 몇 번이나 찍고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이시이의 얼굴은 누구도 아니, 이시이 자신도 못 알아보도록 처참하게 뭉개지고 난 뒤였다. 아무도 모르게 약삭빠르게 본국으로 피신하려던 악귀 이시이는 그렇게 잘코사니로 황천으로 가고 말았다. 강성종의 지시를 정이 완벽하게 이행한 것이었다.
정은 경찰서로 끌려가고, 이시이의 시체도 하선했다. 신원도 확인 불가능한 끔찍한 시체를 관에도 넣지 않은 채 싣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년단원들은 자청해서 이시이의 시체를 들고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주머니를 뒤졌다.
“왜 죽였어?”
“도독놈으 새끼가 거짓말을 해가 패 준 거라요.”
“임마! 거짓말했다고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
“패다보니 디진 걸 우짜란 말이오? 내가 원래 꼭지 돌아삐머 눈에 보이는 게 없으요. ㅇ새ㅇ가 그래 와 거짓말은 하고 지랄이고, 지랄이!”
“임마, 싸구려 불상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여? 그거 시장통에서 파는 거야, 임마!”
“싸구련지 고급인지 무식한 내가 우째 아요?”
“내지인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모르요.”
“임마, 사형이야, 사형!”
“네에미 ㅇ팔, 그라머 도독놈 패서 잡지, 사정하면서 잡으까아?”
순사들과 정이 주고받은 승강이였다. 사형? ㅇ까는 소리하고 있네, ㅇ발ㅇ들아. 나는 낼모레면 나가거덩, ㅇ발ㅇ들아. 정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합동 검색은 즉각 중단됐다. 신문사에 있던 여운형은 엔도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이래서야 합동으로 뭐를 하겠습니까?”
“아니, 무슨 말이오?”
“선생님이 추천하신 사람들이 살인을 저질렀단 말입니다.”
“아니, 누구를 그리했단 말이오?”
혹시 이시이인가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누구냐가 중요합니까? 얼굴도 몰라보게 두들겨패서 죽였답니다. 싸구려 불상 하나 땜에요.”
여운형은 죽은 자가 이시이라고 확신했다. 강성종이 지시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제 이시이의 신병은 확보한 셈이었다. 물론 내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런 고얀 일이 있나! 아무리 도둑이라 한들 사람을 그리하다니! 당장 중형에 처하도록 하시오!”
“중형은 나중 일이구요...... 선생님 측 사람들은 직접 수색은 하지 말고 그냥 뒤에서 지켜보는 걸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비명에 가신 분께는 조선 인민들을 대표해서 심심한 조의를 표하오!”
합동 검색은 재개됐으나 청년단원들은 계속해서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날이 바뀌기 전에 출항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에도 임창식의 도장에는 몇이 모였다.
“하눌님도 우리를 이리 도우시니 모레면 이 땅이 확실한 대한민국이 될 것이오! 더구나 김동지 같은 지장(智將)이 있으니 실패할래야 실패할 수가 있겠소? 참 대단하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 예측할 수가 있소? 대단하오, 대단해!”
“선생님,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마동지는 또 어떻소. 두 동지만 있으면 대한민국은 독립 후에도 끄덕없을 거요!”
모두 희색이 만면한 가운데 마동주와 강성종은 뒷머리만 긁고 있었다. 이미 하얼빈으로 잠입했을 광복군 특공대의 이시이 강제실종(?) 작전을 중지시킬 방법은 없었다. 중경에서 최창익에게 이야기했다. 이시이가 이미 피신하고 난 후일 수도 있다고. 그러면 바로 철수를 하라고. 만약 잡더라도 어차피 산 채로 국내로 압송하기는 힘들 것이기에 제거하고 흔적을 없애 실종된 것으로 꾸미라고 했다. 그도저도 안 되면 죽은 것이 알려져 쓸모는 없을지라도 제거를 해 버리는 것이 인류를 위하는 길이었다. 이제 국내에서 이시이를 확보(?)했으니 광복군 특공대가 피해 없이 무사히 하얼빈을 빠져나오면 될 일이었다.
“주석 각하 일행은 아직 소식이 없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출발은 하셨을 것 같은데 연락할 방법도 없고......”
안 그래도 강성종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마지막 교신에서 배편으로 입국하는 계획을 전달받았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방법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했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봅시다. 임정의 도착이 늦더라도 우리의 계획엔 변동이 없소.”
말은 그렇게 해도 여운형의 얼굴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소련군의 진격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3일만에 길주까지 점령한 소련군은 왜군의 저항이 격렬해서가 아니라 열렬한 환영 때문에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해방지원군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마당에 원주민들의 환영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각 단위 인민위원회며 노동조합 ・ 농민조합이 계속해서 환영식을 개최하는 바람에 장교들은 연단에 올라 인사라도 해야 했다. 이 모두가 소련군의 진격을 늦추려는 건국연맹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건국연맹 맹원 모두는 공격해야 할 목표물까지 지정 받아 예행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경찰서와 주재소는 돌로 집중공격을 퍼부어 유리창을 먼저 깨고 투항을 종용한다. 투항하지 않고 무기를 들고 나올 경우 광복군・유격단・청년단 등 전투요원들이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총・표창・죽창 등으로 제압한다 등등 구체적이고 세세한 행동요령까지 익히고 있었다. 모두들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믿었다.
다음날, 여운형은 스스로에게 임무를 맡겼다. 엔도가 내일이면 합의문을 써줄 거라고 굳게 믿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았다. 왜놈들이 전혀 모르는 상태와, 눈치를 채고 준비를 하는 상태일 때를. 누구를 속인다는 것이 개운치는 않았지만 민족과 인민을 위해서라면 그런 거짓말은 만 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전략이고 전술이라고 믿었다.
아침부터 엔도가 볼멘 소리를 했다.
“선생님, 어제는 연락선이 한 대도 출항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측에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순사들이 못 해먹겠다고 난립니다. 살인까지 저지르고......“
“다들 경험이 없고 요령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겠소. 차차 속도가 빨라질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하오. 우리나라 인민들을 대표해서 사죄한다고 유족들에게 꼭 전해 주시오.”
“유족이라니요? 누군지를 알아야 유족을 찾든지 말든지 하지요. 검시한 의사도 그 상태로는 누군지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한답니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선생님 측은 모두 깡패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걸 엔도는 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