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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feature=shared
유병록, 마흔이 내린다
하늘은 어둡고
저 높은 곳에서 빗방울이
아래로 아래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나도
아래로 아래로
열일곱 살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은 첩첩산중
단점을 찾는 건 재빨리
가까운 사람은 자꾸 줄고
미워하는 사람은 줄지 않고
내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여전히 서투르고
봄비는 그치지 않고
웃으며 뛰어다니던 시절은 저 멀리
기상청에서는
올해는 비가 덜 내리고
무더운 날씨 이어간다는데
비오는 날만이라도
훌륭한 사람 되기로 마음 먹어야 하나
그건 가능한 일일까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데
벌써 마흔의 비가 내리네
꾸짖듯이는 아니고
그저 넌지시
아래로 아래로
내 머리 위로
최금녀, 매일 웃는다
한 집에서 영원을 산다
한 사람이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면
한 사람은 부엌에서 밥을 차린다
TV 앞에 밥상을 차려준다
한 사람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치운다
전기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괜찮다고 받는다
심심해서 보일러 온도를 낮춘다
심심해서 말의 온도를 낮춘다
노래를 듣는다, 매일 듣는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노래가 된다
말이 안 되는 말은 뽑아버린다, 멀리 버린다
명품 같은 맹세들도 버린다, 버리는 중이다
서로에게 매일 선물을 준다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의 의미를 나누어 가진다
한 사람처럼 두 사람이 산다
너무 늦게 하나가 된다
정일근, 봄꿈, 진해
꽃피는 봄밤의 꿈은 자음으로 꾼다
연로하신 어머니 곁에 누워 자는 잠 속에
진해의 36만 벚나무 한꺼번에 꽃 만개했다 날렸다
즐겁고 향기롭고 선명하였다
잠 깨면 그 꿈 이야기를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어머니에게 지난밤 꿈이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꺼냈다가 횡설수설하다 만다
나이 들면서 꿈에서 모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어머니 그 꿈 다 아시는 듯 빙그레 웃는다
맞다, 그 미소가 어제 내가 꾼 봄꿈이었구나
이병률, 면역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람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
몇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 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마스크를 태우면서 혀를 씻었다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머리에 파고들어 온 이 무언가를 잘 기억하자고
창궐하는 생각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허민, 비 오는 동물원
힘든 그대와 가고 싶었다,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어서
수직 낙하하는 젖은 총알들을 그대로 받아먹고 있는
동물원
관람객이라곤 오지 않아 빗줄기 손님들만이 가득한
동물원의 침묵 속을
우산을 쓰고 걷다보면 가끔씩
흐르는 피를 닦지 않는 상처처럼
우리에 들어가지도 않고 젖은 털을 마냥 내버려둔 채
무표정한 표정의 빗줄기 속
자신을 멍하게 바라다보는 표범 한 마리
빗줄기 감옥에 갇힌 한 마리 인간의 고독을 감상하듯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눈동자에 담지 않으면서
심드렁한 표정의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오랑우탄의 지루한 하품과 홍학들의 추락만이 가득한
선명하게 번져가는 보도블록을 밟고 있노라면
희미했던 가슴 속 표정 하나만이
빗물의 수면 위로 떠오를 뿐
세상은 모두가 예외 없이 공평한 창살에 갇히고
그런 시간에게 끊임없이 먹이를 주고 있는 빗줄기의 손가락
손가락들
그렇게 그런 우리를
고요한 창 너머로 구경하던
비 내리는
동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