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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인생도 단 한번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61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0
조회수 : 29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5/03/17 15:20:05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feature=shared

 

 

 

 

1.jpg

 

 

조승래, 숲




몸속에 벌레 몇 마리 숨겨주었다고

속사포 쏘아대는 딱따구리에게

목탁 소리 들려주면서


저 나무는 실바람도

잘 지나도록

가지를 살짝 들어 준다


아픔이야

어느 나무인들 없으랴

그 아픔 서로 나누어 가지겠다고

나무는 숲을 이루고 산다


사람의 마을도 그렇다

 

 

 

 

 

 

2.jpg

 

 

김지헌, 유리벽




그 너머가 보여서 위험하다


언제부터였을까

빛이 꺾여버린 불투명의 방화벽 대신

시스루의 감정을 좋아하게 된 것이


막무가내 저돌적 사랑은 늘 위험하다

너머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가다 심장이 깨져버린 새처럼


수족관 속 물고기처럼 밥 먹고 싸우고 사랑하고 끝내 되돌아오고야 마는

오늘이라는 네모 상자


내시경을 끝내고 나자 의사는

당신 속이 흐려서 한 번 더 봐야겠으니 다시 비우고 오라고 한다


그는 '당신의 심연에 관심 없다'며 무표정하게 말했는데

나는 이미 검붉은 원죄를 들켜버린 사람처럼

내 안을 꼭꼭 여미고 나사를 조여둔다


투명한 내장을 가진 로맹가리의 새처럼 잔뜩 웅크린 채


내 몸을 샅샅이 들여다보던 의사가

시든 꽃잎 솎아내듯 단단히 달라붙어있던 옹이들을 떼어내며 다시 수선했으니

조금 더 사용해 보라고 한다

 

 

 

 

 

 

3.jpg

 

 

신정민, 내가 아버지의 구근식물이었을 때




늙은 호박을 열었을 때 세계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땅콩 캐던 날 뽑아 올린 줄기마다 주렁주렁 달린 것들도 그랬다


화근은 정처 없이 떠다니는 모래알갱이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았다

잡화점에서 키우던 오래전의 개는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어느 날엔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냉장고의 자석인형이 스스로 떨어지면서 목을 잘랐고

회사에서 해고당한 아들은 그것을 주워들고 우물쭈물 거렸다


모든 게 당연하거나 당연하지 않았다


마른하늘에서 개구리들은 왜 안 떨어지나

어디서든 회오리가 일어 바닥에 개구리들을 떨어뜨려야 할텐데

개구리들이 펄쩍펄쩍 뛰어야 할텐데


그때 나는 새소리를 받아적고 있었다

치릇 치릇 치치토릇 치치릇 치치읏 치치 치치또릇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입속을 크게 비워서 둥근, 이란 단어를 굴리고 굴렸다

아무리 구슬려도 둥글어지지 않는 둥근


단어들은 왜 사랑을 나누지 않을까


너와 나는 첫눈에 반했는데

너무 늦게 만나 후회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4.jpg

 

 

전영관, 허밍




풍경이 유리잔처럼 얇아서

시월은 쉽게 금이 간다

예민해져서 상심이 잦아진다

환절기의 그리움이란

시월에 장미를 보러가는 일


붉은 파도인 것 같아도

이파리를 손에 들고 보면 다른 것처럼

사랑은 보는 이에 따라 채도가 달라진다


함께 서있던 나무를 보는 감정은

음정이 조금 틀린 허밍 같은 것

곁이 빈 나무 사진을 보냈다

단풍잎은

연애를 시작하던 심장같이 붉고 뜨거운데

날카로운 외면의 끝에 찔리고도 말하지 않았다


잠은 죽음만큼 깊었는데 꿈도 짧아서

새벽은 미완성인 채로 시작된다

연락도 없이 연락할 것 같아

시월엔 주말 약속을 머뭇거리게 된다


갈꽃은 진 후의 여운이 길어서 아프고

저 붉음이 퇴색할 거라는 상심만 진해진다

오르내리는 일기에 병열(病熱)도 앓는다


단풍은 잘 팔리면서 저평가되는 연애시

흔적만 남고 통증 없는 무릎의 흉터

 

 

 

 

 

 

5.jpg

 

 

정호승, 촛불




어머니 아흔다섯 생신 날

내가 사들고 간

생일케이크에 초를 하나만 꽂고

단 하나의 촛불을 켰다

생명도 하나

인생도 단 한번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게

어머니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번이 어머니의 마지막 생신이라는 생각에

눈물로 생신 축가를 불러드리자

어머니가 마지막 토해낸 숨으로 끄듯

촛불을 훅 끄시고

웃으셨다 쓸쓸히

촛불은 꺼질 때 다시 타오른다고

어머니 대신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고

촛불이 꺼진 어머니의 초를

내 가슴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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