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빈 손이었기에 근처 샵에서 오천 원짜리 우산을 샀다.
예정대로 옷을 몇 개 사고 밖에 나오니 여전히 비는 거셌다.
오천 원 짜리 우산은 청바지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려니 했다. 집은 가까웠으니까.
이어폰에선 철 지난 가요가 재생 중이었다.
그렇게 영화관 앞을 지날 때쯤, 오른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나와 눈을 마주친 누군가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눈이 나쁜 나는 내가 잘못본 거겠거니 하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다시 한 번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주위엔 나 혼자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 이어폰을 뺐다.
"예?"
그녀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 앞 택시승강장까지만 우산 좀 씌워주실 수 있나요?"
철 지난 가요 반, 그녀의 목소리 반.
두 귀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요."
"감사합니다."
택시승강장은 불과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녀가 굳이 우산을 빌려써야 할 만큼 비는 거셌다.
우리는 말없이 잠깐을 걸었다.
연애하던 습관이 남아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우산을 치우친 채 걸었다.
그런데, 아직 반쯤 남아있던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우산을 든 내 오른손을 그녀가 말없이 내 쪽으로 스윽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는 이미 다 젖어서 괜찮아요. 집도 가깝거든요."
그러자 내 의지와 별 상관없는 말들이 내 입에서 나왔고,
"네? 집이 가깝다구요? 집이 어디신데요?"
그녀는 정말 놀란듯한 목소리로, 그리고 동그래진 눈으로 되물었다.
"뛰어가면 5분이면 도착해요."
"네? 정말요?"
몇 마디 나눴다고 벌써 택시승강장이었다.
아주 잠깐, 우리가 붙어 있던 시간은 정말이지 아주 잠깐이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 잠깐을 견디지 못하고,
"저... 우산 잘 쓰세요."
"네?"
그녀 손에 우산을 쥐어준 뒤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철 지난 가요가 양쪽 귀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잠깐 동안 멀리도 가버린 정신은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집에 가는 길, 나는 비싼 술과 튼튼한 우산을 샀다.
그리고 일부러 불을 켜 둔 집에 도착했다.
내 직업은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글이 써지질 않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비도 오질 않는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겠지 하는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창밖으로 훅훅 다가오는 가을에 심장이 자꾸 덜컹덜컹한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다른 건 몰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어쩐지 바보처럼 굴어서 미안합니다.
다시 한 번 거센 비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영화관 앞에서, 우산이 없이 서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집이 가깝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