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감사하게도 저번 글을 베오베로 보내주신 덕분에, 이제 눈팅족에서 종종 글 올리는 유저(?)로 변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베오베 티켓 한 번 써보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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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중퇴.
열 여덟에 집을 나왔고, 당시 수중에 단 한 푼도 없던 나는 배가 고팠다.
친구의 도움으로 쪽방을 구했다.
대각선으로 누워야 다리를 다 펼 수 있는 월 14만원짜리 고시원.
급한대로 주방보조일을 시작했다.
한여름 삼계탕집 주방.
한창 배가 고플 나이, 푹푹 찌는 주방에서 복날을 세 번 이겨내는(?) 동안 나는 매일 배가 고파 하루 서너 번 현기증이 났다.
하도 배가 고파서 사장님께 여쭸다.
"혹시 가게에서 제가 맘껏 먹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버려지는 거나 팔 수 없는 그런 거요."
맘씨 좋은 사장님은 골똘히 생각해보시더니 대답했다.
"글쎄. 무? 치킨무? 너 일 열심히하니까 그정도는 맘껏 먹어라. 하하하."
그때부터 나는 틈날때마다 무를 엄청 먹었다.
사람 몸뚱이만한 다라에 그득 담아둔 치킨무를 주걱으로 푹푹 퍼담아 그릇에 수북하니 쌓아놓고 먹었다.
허겁지겁 씹어먹는 무는 시큰했지만 맛있었다.
눈시울도 조금 시큰했다.
괜찮아. 머지 않아 나는 글을 쓸 거니까.
버티자.
첫 월급을 현금으로 모두 인출해 친구에게 절반을 건넸다.
쪽방에 널브러진 만 원짜리들을 내려다보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드디어 동네를 조금씩 돌아다녀봤다.
근처에 헌혈의 집이 있었다.
"헌혈 하면 초코파이 준다던데..."
더벅머리의 나는 홀린듯 문을 밀고 들어가 예쁜 간호사 누나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헌혈하러 왔어요."
그때부터 2주에 한 번 헌혈을 했다.
한 번 갈 때마다 초코파이와 오렌지주스를 많이도 먹었다.
그 즈음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대학에 가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택배 상하차, 공단 라인맨, 까대기, 보안요원, 현금수송, 텔레마케팅, 편돌이, 호텔 연회팀, 카페 바리스타, 건설현장, 안전감시단, 음식점 서빙...
덜컹거리는 승합차에서 영어단어를 외웠고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면서 시를 외웠다.
조금만 더 버텨 보자. 나는 건강하니까.
머지 않아 대학에서 글을 배워서 좋은 글을 쓰게 될 거야.
육군 3대 꿀보직이라는 155미리 견인포 주특기로 군생활을 마치고, 다시 2년을 닥치는대로 일하며 공부했다.
할 수 있어. 이제 진짜 다 왔다고.
그렇게 스물 다섯 겨울, 나는 제주도 농장에 있었다.
하필이면 또 무밭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서울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합격하셨습니다. 등록은 몇일까지..."
"저 예비 18번인데 합격이라고요? 보이스피싱 아니에요?"
거짓말처럼 서울의 모 대학에 들어선 나는 과대표와 학생회, 부조교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하면서도 모든 과목 A+를 찍었다.
학교생활은 그냥 숨만 쉬어도 너무 좋으니까, 힘들지 않았다.
사실 링겔을 세 번이나 맞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가 소설을 배우고 있어.
내가 지금 시창작 강의를 듣고 있다고.
그 와중에도 버릇처럼 헌혈은 했다.
어쩐지 계속 배가 고팠으니까.
1학년 말, 전학년 통틀어 그 해 최고의 단편 소설에게 주어지는 최우수 상을 받아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1년 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버린 나는 휴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집 주방.
양파와 대파를 무지하게 썰어댔고, 손도 몇 번이나 썰었다.
그래도 오히려 에너지가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언제든 다시 돌아가면 되니까.
조금씩 이뤄내고 있으니까, 충분히 쉬고 다시 시작해보자. 나는 건강하니까.
그러던 어느날.
서른 몇 번의 헌혈 중 언젠가 등록했던 조혈모세포 기증 동의(골수기증) 건으로 전화가 왔다.
"XX님 혈액샘플과 일치하는 환자분을 찾았어요. 20대 여성이신데, 혈액암으로 투병중이세요."
다시 여름 주방에서 땀을 흘리고 있던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나와 같은 20대가 투병중이란다.
심지어 기증을 받지 못하면 높은 확률로 사망한다고 한다.
나는 10여년 전, 치킨무를 허겁지겁 입에 쑤셔넣던 나를 떠올렸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시행착오를 이겨냈던 10여 년.
그건 내가 건강해서 할 수 있었던 거다.
의지가 있고 꿈이 있는데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면, 나는 10여년 동안 조금씩 이뤄왔던 것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유전자가 일치하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기증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게 안되면 그냥 죽는 수 밖에 없다면.
아주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할게요. 합니다."
코디네이터의 안내대로 혈액검사를 다시 진행했고, 이식 가능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그리고 몇 차례 더 연락이 오갔다.
"환자분께서는 크리스마스에 기증받길 원하세요. 물론 기증자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고, 기증자님이 편하신 날로 잡으시면 됩니다."
"크리스마스로 잡아주세요."
기증 일자에 맞춰 미리 주방 직원 대타를 구하고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마치 임산부가 된 기분으로 꾸준히 운동을 하고 가려먹고 잘 자려고 애썼다.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이식 3일 전.
헌혈처럼 진행되는 기증이었기에, 골수를 혈액에 흐르게 하는 유도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3일동안 헉,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가 욱신거렸다.
생각보다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순간에도 누군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는 생각에 묵묵히 버텼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몇 시간에 걸친 추출이, 그리고 이식이 진행됐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 골수가 구급차에 실려 떠났다.
너무나도 다행히, 무사히 이식이 완료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라는 생각에 그제야 뿌듯해졌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다.
법적으로 제한이 되어 알 수도 없다. 오직 센터 코디네이터의 중계로 진행될 뿐이다.
이식을 한다고 해도 무조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공들여 기증을 진행했고,
덕분에 완전히 망가졌던 골수가 재생되기 시작해서 마침내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다면.
그거면 된 거다.
평등은 공정한 기회라고 배웠다.
개인이 사회를 단 번에 바꿀 순 없지만, 적어도 다른 한 명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거다.
나의 작은 수고로움이 누군가의 삶이 된다면, 거기서 망설이면 안되는 거다.
본의 아니게(?) 수입이 끊긴 상황.
마침 연락이 온 학교 선배를 따라 장르소설을 배우러 평택으로 떠났다.
몇 개월 후, 평택 사무실에 편지가 도착했다.
(신상정보가 배제된 상태고, 편지 주신 분의 뜻에 누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사진을 올립니다.)
그 감사함으로 열심히 글을 썼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났다.
그리고 내일, 메이저 사이트에 내 글이 연재되기 시작한다.
(연재할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홍보로 비춰질 수 있을 것 같아 자제하겠습니다. 혹시나 원하시는 분께선 꼬릿말 링크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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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인포메일 시절부터 오유와 함께 나이를 먹어왔습니다.
며칠 전 글로 난생처음 베오베를 가고 나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요즘 여러 문제로 오유가 시끌시끌한데, 조금은 따뜻한 글을 보여드리고 싶어 썼습니다.
앞으로는 짤막하게나마 재밌는 글을 주기적으로 올려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부지런히 정의롭게 살겠습니다.
오늘도 많이 웃는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