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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게시물ID : history_30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익승리
추천 : 3
조회수 : 62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2/16 21:47:54
 국적: 당나라 사주 연수현 출신, 백제 유민
ㅇ 이정기 세력 (4대, 765-819) 공격 시, 친당 세력인 왕지흥의 소장으로 복무. 장보고는 이정기 토벌의 공로로 819년 등주 적산포 신라소의 초대 대사로 임명됨. 
- 당나라는 번진(藩鎭)의 반란을 진압한 후, 819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국 동해안 백제의 유민들에게 과세할 목적으로 신라방·신라소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를 대사(大使)라 하였다. 당나라 기본법전인 대당육전(大唐六典)」에도 “무릇 모든 군진의 대사와 부사 이상은 모두 겸인(시종)을 거느린다(凡諸軍鎭大使副使皆有廉人)”고 되어 있으며 이들의 임기는 4년(四年一替)이었다. 즉 신라방·신라소는 당나라의 지방행정기구이고, 그 책임자인 대사는 당나라의 관리였다.
- 강단유사사학은 장보고가 적산 법화원을 건립했다고 주장하나, 신라소가 설치되면서 법화원이 창건되고, 장보고가 신라로 간 후 신라소의 후임 대사들이 법화원을 관리하므로 개인 사찰이 아닌 신라소의 공공사찰로 보아야 한다.
- 장보고가 828년에 신라로 가므로 그는 제2대 대사도 역임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적산포 신라소의 대사 자리에 있으면서 부를 쌓았을 것이다. 
ㅇ 청해진 대사 (828년)
- 당은 쇄국하고 있던 신라의 시장을 노리고, 신라를 압박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여 신라의 시장을 개방시키면서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3대 대사로 연임되지 못한 장보고가 신라시장의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치청절도사를 설득하여 청해진 설치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 장보고가 당의 관료이므로, 장보고의 교관선(交關船)도 사무역선이 아니고 치청절도사의 지분이 있는 무역선이다. 엔닌은 장보고의 교관선을 이끌던 최운십이랑을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 최병마사(崔兵馬使)’라 하는데 대당매물사는 당의 물건을 파는 당나라의 수출관이란 의미이다.
ㅇ 신라의 무역 규제 (834년)
- 신라는 청해진 설치 6년 후인 834년에 외래품의 소비를 규제
흥덕왕(興德王) 즉위 9년, 태화 8년에 하교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에는 존비가 있으니 명칭과 법칙도 같지 않으며 의복 역시 다르다.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서로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서, 다만 신이하고 진기한 물품을 숭상하고 오히려 비야(鄙野)한 토산품을 경시하니, 예절이 점차 잃어가는 참람함에 이르고 풍속은 언덕이 평평해지듯이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옛 법칙에 따라 분명한 명령을 내리니, 만약 고의로 어기는 사람은 일정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무주 도독 김양 청해진 폐쇄
- 청해진이 폐쇄되자 장보고는 장도에서 기회를 기다린 것으로 추측됨
장도(조금도 장군섬, 완도항에서 북쪽 7km) 유적
장도는 해발 42m의 작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섬 둘레 1,296m, 면적은 약 10정보의 작은 섬이다. 그리고 경작 면적은 겨우 1정보 남짓해 농가 한 채도 살기 어렵다. 게다가 우물도 바닷가에 있는 옹달샘이어서 썰물 때만 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섬의 지형이 바다를 향하고 있는 동남쪽은 높고, 육지를 향하고 있는 서북쪽으로는 낮은 데다 장좌리까지는 불과 2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까닭에 밀물 때는 섬이지만 썰물이 되면 거의 육지와 이어져 있다. 거기에다 섬 근처의 수심도 불과 1-2m 내외여서, 항구는 물론 해포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구비 조건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곳이다.
ㅇ 김우징과의 연합으로 무역 재개 추진
- 흥덕왕 사망(835년) 후 흥덕왕의 후사가 없어 왕위쟁탈전
- 김우징 장보고에게 피신 (837년)
- 838년 김우징파 무장 김양 합류
- 장보고는 당나라가 김우징을 책봉하도록(838년 10월)하고, 전비 지원.
- 무주도독 김량순 합류
- 839년 김양 부대 승리, 4월 김우징 신무왕 등극
- 신무왕 장보고에게 식읍 2천호 하사, 신무왕 7월 사망
ㅇ 장보고 피살
- 839년 즉위한 신무왕의 태자 문성왕은 무역 재개하지 않음, 당나라 책봉하지 않음
- 840년 봄 일길찬 홍필이 모반을 시도하다 발각되자 청해진으로 망명
- 장보고는 문성왕에 대한 불만으로 홍필을 받아들임
- 841년 7월 당은 당나라에 파견나와 있었던 신라관리 김운경을 신라에 파견, 무역 재개 시 문성왕 책봉하겠다 제시. 문성왕은 장보고 제거 계획 중이어서 불응
- 김양은 장보고 제거하기 위해 심복인 염장을 무주 도독 별가(비서실장)로 임명
- 염장은 거짓 망명하여 장보고 암살
ㅇ 장좌리(장도에서 200m, 썰물 시 장도와 이어짐) 상왕봉 ‘장보네 묘’ ‘목 없는 맷’ ‘장군 맷’로 불리는 6기의 묘. 장보고 일족의 목 없는 무덤으로 추정됨. (목들은 경주로)
ㅇ 까투리 설화
아주 먼 아득한 옛날, 완도읍에는 엄 장군(염장 추정)과 그의 장인 장 장군(장보고 추정)이 살고 있었다. 엄 장군은 가용리 엄나무골에 살았고, 장 장군은 장좌리 장도에 살았다.... 장인과 사위는 사이가 좋아 이따금씩 서로 내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어느 날 하루는 해뜨는 시각을 기준으로 장도에서 건너다 보이는 동쪽 까투리섬에 누가 먼저 깃대를 꽂나 내기를 했다. 그런데 두 장군은 모두 재주와 도술에 뛰어났다. 그래서 장 장군은 까투리로, 그리고 엄 장군은 매가 되어 앞에 보이는 섬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매가 된 엄 장군은 날아가는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까투리가 된 장 장군을 그만 잡아먹고 말았다. 지금도 고금면 상정리 서해에 있는 섬을 까투리섬, 혹은 까튼섬, 또는 같은섬으로 부르는데, 그 섬 이름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역 등 해조류가 많이 나는 이 지역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하러 갈 때, 장인과 사위가 동행하는 일이 있으면 액을 만난다 하여 이를 피한다고 한다.(<완도군지> 8편)
ㅇ 보론 
- 841년 신라가 장보고가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제거하자 당과 신라는 5년 동안 왕래하지 않다가, 846년 신라가 변명하는 사신을 보내자, 당은 847년에야 6년 전에 즉위한 문성왕을 승인하는 책봉사를 파견하였다.
-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은 장보고가 신라인이며 장보고가 신라인의 해상활동능력을 조직화하였다고 주장하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보고는 당의 힘을 이용하여 중국 동해안 백제유민들의 해상무역 활동을 신라와 일본에까지 확대하려 하였던 사람이다. 유사사학이 장보고를 신라인으로 왜곡하는 것은 백제유민의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동해안백제의 실상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 장보고함 작명은 넌센스.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083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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