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근초고왕은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
게시물ID : history_304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익승리
추천 : 0
조회수 : 89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2/19 08:36:00


  1. 동서양성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을 동시에 통치해야 했던 백제는 한반도에 별도를 두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였다. 김부식은 동서양성을 기술하는 『구당서』를 단순히 인용하기만 한다. 『三國史』 「雜志 地理 百濟」 舊唐書云, “百濟扶餘之别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髙麗. 其王所居有東西两城.”

『구당서』는 그 왕은 거주하는 곳이 동서 두 성이 있다고 명시한다. 『신당서』도 동서 두 성이 있다고 한다. 『新唐書』 「東夷/百濟列傳」 百濟,扶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贏,濱海之陽,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

웅진과 사비를 동서양성으로 보는 견해도 정재윤, 「웅진성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백제문화 59』, 백제문화연구소, 2018. 5쪽.

있으나 바로 붙어 있는 성을 동서양성으로 하면 국가 경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양서(梁書)』와 『남사(南史)』는 고구려에 크게 패한 후 여러 해 쇠약해지더니 남한으로 옮겨 머물렀다고 『梁書』 「諸夷/東夷/百濟列傳」 尋為高句驪所破,衰弱者累年,遷居南韓地. 『남사』도 같은 내용이다. [양서(梁書)는 중국 남조 양나라(梁, 502년 ~ 557년)를 기술한 역사서이다. 요찰(姚察)이 편찬을 시작하였고, 아들인 요사렴(姚思廉)에 의해 635년 완성되었다.] [남사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역사를 하나로 정리한 사서로, 이연수(李延壽)가 659년에 완성하였다.]

하는데, 『삼국사』도 무령왕이 양에 국서를 보낼 때의 상황을 설명하며서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 격파되어 쇠약해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 때에 와서”라 기술하고 있다. 『三國史』 「百濟本紀」 武寧王 21년(521年)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髙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稱, “累破髙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強國.”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 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양 나라의 답신이 “백제왕(百濟王) 여륭(餘隆)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라 하는 『三國史』 「百濟本紀」 武寧王 21년 十二月, 髙祖詔冊王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逺修貢職, 廼誠款到, 朕有嘉焉. 冝率舊章, 授兹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것으로 보아 무령왕이 한반도에서 국서를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령왕 때 대륙에서 공주로 이동하고 그 이후로는 왕이 대륙으로 거의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령왕 이전의 백제 기사는 대륙인가 반도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고구려에 패한 후 남한으로 옮겨 갔다는 말은 한반도에서 싸운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대륙에서 고구려에 크게 져서 한반도로 옮겨 갔다는 말이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행해진 것이다.

2. 서도 한성에서 동도 한성으로 천도

온조의 위례성은 한산(漢山) 부근 한수(漢水) 남쪽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백제본기」에서는 한산, 『고전기』를 인용하는 부분에서는 한성으로 371년 천도했다고 기술한다. 일연도 371년 북한성으로 옮겨 105년간 도읍으로 하였다고 한다. 김부식과 일연 모두 『고전기』를 인용하고 있다.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ㄱ) 근초고왕 26년 (371년 (음))

『三國史』 「百濟本紀」 近肖古王 26년, 移都漢山

〔26년(371)〕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ㄴ) 『삼국사』의 『고전기』 인용

『三國史』 「地理 百濟」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温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夲扶餘, 至慰礼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髙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 移都熊川.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庾信與唐蘇定方討平之.

『고전기(古典記)』를 살피건데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묘년에 홀본부여(卒本扶餘)에서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한성에 도읍했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이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63년이 지나고 26세 성왕이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 31세 의자왕에 이름에 122년이 지나고 당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의자왕 재위 20년 때에 신라 유신(金庾信)과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함께 토벌해 평정하였다.

(ㄷ) 『삼국유사』의 『고전기』 인용

『三國遺事』 「紀異」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按古典記云. 東明王第三子温祚以前漢鴻佳三年癸酉, 自卒夲扶餘至慰礼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移都漢山 今廣州歴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咸安元年, 取髙句麗南平壤移都北漢城 今楊州歴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即位元徴三年乙卯, 移都熊川 今公州歴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歴一百二十年.

『고전기(古典記)』에 이런 말이 있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에 홀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州)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아마 『고전기』에는 김부식이 인용한 것처럼 한성이라 표현되었을 것이다. 일연은 구 국도도 한산이고 신 국도도 한성이라 하니 신 국도는 더 북쪽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여 북한성이라 표현하였을 것이다. 근거 없이 사료를 부정하거나 마음대로 해석하는 강단유사사학은 강남에서 강북으로 옮겼다고 하거나 강남에서 더 강남으로 옮겼다고 하여 『삼국사』와 『삼국유사』의 천도 기사를 실질적으로 부인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근초고왕 천도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3.6. 현재)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왕력편에는 이때 “북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北漢山]”는 기록이 있으므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지금의 북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라는 해석(李道學, 32쪽)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북한산성에서는 아직 백제 때의 성곽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학계는 대개 본 기사의 한산을 남한산으로 해석하고 고구려의 반격에 대비해 도읍을 잠시 산성으로 옮긴 것이라고 하거나(李丙燾, 375쪽), 기존의 하남위례성을 왕성으로 한 도읍체제에서 평지의 북성과 산지의 남성을 연계한 한성 도읍체제로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천도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근초고왕의 한성 천도를 알기 위해 먼저 남평양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고전기』는 백제가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한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남평양은 고려 이후의 기록에서만 나타난다. 윤경진, 「고구려 남평양의 실체와 출현 배경」, 『서울과 역사 95』, 2017. 7쪽.

수서(隋書)에서 고구려의 三京으로 평양성 국내성 한성이 언급되고 있는데 『隋書』「東夷列傳, 高句麗」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 漢城 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爲 三京.

고구려의 한성을 백제의 한성과 구별하기 위해, 후세인들이 고구려의 한성을 고구려의 남쪽 중심지라는 의미를 가지는 남평양으로 칭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평양성에서 출토된 각자성석(刻字城石)에 漢城이라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한성(남평양)은 지금의 평양이다. 371년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집안인 황성이었고,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었다.

따라서 남평양(고구려의 한성)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더라도 모순되는 점은 없고, 오히려 남쪽 중심지인 지금의 평양에 삼경의 하나인 한성을 두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강단유사사학은 남평양을 서울 강북이라 하나 여호규,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2021. 48쪽. 여호규는 남평양을 475-551년만 운영했다고 한다.

명백한 증거인 각자성석에 반하며, 서울 강북은 대부분의 시기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의 영토가 아닌 시기도 국경이었으므로, 고구려의 도회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각자성석이라는 명백한 증거에 반한다.

근초고왕은 371년 태자(근구수왕)와 함께 당시 평양(요양)을 공격하였다. 『三國史』 「百濟本紀」 近肖古王 26년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髙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백제의 평양성(요양) 공격은 한반도와 요동반도에서 모두 가능한데, 371년의 공격은 한반도 백제에서 행해졌다. 369년 9월 고구려가 치양을 공격하였는데, 『三國史』 「百濟本紀」 近肖古王 二十四年, 秋九月, 髙句麗王斯由帥歩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戸.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495년 고구려의 치양 공격시 신라가 도와주었으므로 『三國史』 「百濟本紀」 東城王 17년 秋八月, 髙句麗來圍雉壤城, 王遣使新羅請救. 羅王命將軍徳智, 帥兵救之, 麗兵退歸.

치양은 한반도의 지명이다.

369년 11월 근초고왕은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였고, 『三國史』 「百濟本紀」 近肖古王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黄.

371년 패강 상류에서 고구려와 싸우며, 『三國史』 「百濟本紀」 近肖古王 二十六年, 髙句麗舉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急擊之, 髙句麗兵敗北.

371년 10월 평양성까지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三國史』 「百濟本紀」 近肖古王 26년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髙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근초고왕은 369년부터 계속하여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싸웠고 371년 평양(요양)까지 진격하면서 한성(남평양)을 점령하고 청천강이나 고구려의 남평양은 강북에 있었을 것이므로 남평양을 취하였다면 청천강까지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압록강을 경계로 한반도 북쪽 영토를 확대시킨 후 한반도의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지금의 평양을 점령하여 한반도의 땅이 크게 늘었으니 지금의 서울인 한성을 수도로 삼은 것이다.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서쪽 대륙의 한성이 도읍이었으나, 동도인 한반도의 한성 즉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동강 하류 황해도 북부 황주 토성리 주거지(평양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5km 지점)에서 백제계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최종택, 「黃州 出土 百濟 土器例」, 『한국상고사학보』, 1990. 329-340쪽.

이는 근초고왕이 평양을 점령했을 시기의 유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한성을 잠깐만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남평양(고구려 한성)을 점령한 2년 후인 373년 청목령에 성을 쌓았고 『三國史』 「百濟本紀」 近肖古王 28년 秋七月, 築城於青木嶺. 秃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

386년에는 청목령 일대에 관방을 쌓았는데, 『三國史』 「百濟本紀」 진사왕 二年, 春, 發國内人年十五歳已上, 設關防, 自青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395년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가 날씨가 추워 군대를 돌려 한산성에 이르렀다고 하며, 『三國史』 「百濟本紀」 아신왕 4년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次於青木嶺下. 㑹大雪, 士卒多凍死, 迴軍至漢山城, 勞軍士.

469년에는 청목령에 목책을 세우고 북한산성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고 하므로 『三國史』 「百濟本紀」 개로왕 15년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青木嶺, 分北漢山城士卒戍之.

청목령이 북한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수림왕 때 바로 남평양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 관련 기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고구려는 뺏긴 사실을 기록하지 않기 위해 회복한 사실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고 백제도 점령한 것만 기록하고 한성(남평양)을 빼앗긴 것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20481545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