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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 영토 확장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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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우익승리
추천 : 0
조회수 : 103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2/26 08:22:01

[고구려 초기 동북으로의 영토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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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서기전 36년 요동외요 동북쪽으로 추정되는 비류국, 서기전 32년 당산지역의 소국으로 추정되는 행인국, 서기전 28년 북옥저, 서기전 9년 홀본 북쪽의 선비를 복속시켰고, (삼국사기)

여율왕이 12년 漢으로부터 독립한 후, 14년 양맥과 漢의 고구려현을 점령하였다. 14년과 18년 사이에 고구려는 요동고새까지 진출하였다. 이는 패수와 대수 사이의 백제인들이 흉년으로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사에 의해 알 수 있다.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37년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髙句麗者一千餘戸, 浿·帶之間, 空無居人.

패수와 대수는 낙랑군을 흘렀던 강들이다. 왕검성의 패수는 영정하였지만, 왕검성이 파괴되고 왕검성 주민을 낙랑군으로 이주시키자 영정하는 살수가 되고, 44년 유수가 반격하여 살수가 고구려와 후한의 국경이 되는데, 어양과 우북평이 후한의 영토로 되므로 살수는 영정하로 추정된다.

낙랑군을 흘렀던 강을 조선인들이 패수라고 하였다. 비류 일행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건넜던 패수와 대수도 낙랑군의 강이다. 패수와 대수 사이의 백제인들이 19년에 고구려로 갔다는 것은 그 이전에 고구려가 요동고새까지 차지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동고새 북쪽의 주민 상당수가 오환인 즉 조선인이었고, 新의 상황이 혼란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쉽게 상하장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고구려는 44년까지로 일시적이긴 하지만, 여율왕 때 이미 예맥조선과 韓의 경계였던 영정하를 지나 진번조선과 燕의 경계였던 요동고새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요동고새까지 차지한 후 대무신왕 때는 다시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서기 22년 동부여,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5년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 國滅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扵曷思. 吾亦不肖, 無以㒷復.” 乃與萬餘人来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서기 26년 개마국과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母虜掠, 但以其地爲郡縣.

구다국,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九年, 十二月,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舉國來降. 由是拓地浸廣.

서기 32년 낙랑국을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15년 夏四月,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或云, “欲滅樂浪, 遂請㛰, 娶其女爲子妻, 後使歸夲囯, 壞其兵物.” .

정복하였다.

낙랑국은 평양에 있던 국가이다. 『북부여기』는 “–195년 최숭이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라고 한다. 『북부여기』 三世檀君 高奚斯 壬申元年。正月, 樂浪王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域。先是, 崔崇自樂浪山, 載積珍寶, 而渡海至馬韓都王俊城, 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배를 타고 떠난 것으로 보아, 秦漢교체기와 전한 초의 혼란기에 번조선의 해상무역세력이 근거지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마한은 말조선이고,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이다.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야지역이고 대동강을 통해 해상무역이 가능한 곳이어서 최숭집단에게 적절한 이주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최숭집단은 해양무역세력으로 이미 평양 등 한반도 서해안과 무역을 하여 평양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토착세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압하고 낙랑국을 세웠을 것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혼인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무신왕이 기습을 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호동이 (북)옥저에 놀러갔다는 말은 당시 낙랑국 북쪽의 개마와 구다국이 고구려에 복속한 상태이므로 호동이 다음 정복 대상인 낙랑국을 살피러 간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최리는 정략혼을 통해 나라를 보전하려 하였다. 자명고가 찢어졌음은 대무신왕이 혼인을 빌미로 경계심을 약화시킨 후 기습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설화는 낙랑국이 다른 소국과는 달리 강력하여 최리가 혼인을 통해 고구려와 병립을 추구할 정도의 국력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동천왕 때 조위가 낙랑까지 군사를 보내 동천왕은 낙랑으로 피신하지 못하고 동옥저의 남쪽까지 쫓겼다가 유유의 희생으로 반격할 수 있었는데, 이때 나오는 낙랑이 대무신왕이 점령한 낙랑국 지역이고, 고구려의 삼경 중 하나인 漢城이라는 각자성석이 발견된 지금의 평양이다.

대무신왕은 서기 37년에 요동고새를 넘어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유수가 중국을 평정한 후 서기 44년 낙랑군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하고 살수 이남까지 차지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태조왕 때인 서기 56년 동옥저를 정벌하였고, 『三國史』 「髙句麗本紀」 太祖大王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서기 68년에는 갈사국이 항복하고, 『三國史』 「髙句麗本紀」 太祖大王 十六年, 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

서기 72년에는 조나를, 『三國史』 「髙句麗本紀」 太祖大王 二十年, 春二月, 遣貫那部沛者逹賈伐藻那, 虜其王.

서기 74년에는 주나를 『三國史』 「髙句麗本紀」 太祖大王 二十二年, 冬十月, 王遣桓那部沛者薛儒伐朱那, 虜其王子乙音爲古鄒加.

정벌하였다. 갈사 조나 주나를 제외한 갈사, 조나, 주나는 추정하지 못하였다.

이들 지역의 추정 위치는 그림과 같다. (그림에 요동고새와 낙랑군 지역은 포함되지 않음)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27945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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