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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후한 [대무신왕과 유수의 일승일패, 모본왕 시부터 후한이 조공]
게시물ID : history_304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익승리
추천 : 0
조회수 : 5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3/01 10:33:12

고구려는 新으로부터 벗어나 서기 18년 이전에 요동고새까지 회복하고, 서기 22년 동부여를 복속시키고 서기 32년 낙랑국을 정벌하여 동북방을 평정하였다. 新이 망한 후 혼란기인 서기 28년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피해는 없었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大守, 將兵來伐 --- 遂引退.

고구려가 요동고새까지 영토로 하였으므로, 이 때의 요동군은 중역수 하류의 남쪽이다.대무신왕은 서기 37년에 요동고새를 넘어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유수가 중국을 평정한 후 서기 44년 낙랑군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하고 살수 이남까지 차지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서기 49년에 모본왕이 (우)북평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라 하여 북평이 아닌 우북평으로 기술하고 있다.

어양과 고개넘어 상곡과 태원을 공격하므로 『三國史』 「髙句麗本紀」 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살수는 어양과 우북평 북쪽에 있는 예맥조선의 패수 즉 영정하이다. 영정하 남쪽의 거마하일 수도 있다. 전한과 예맥조선의 경계가 「기주협우갈석도」에 영정하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후한과 고구려의 경계도 일단은 영정하로 보았다.

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군에서의 1승 1패 후 국경은 과거 예맥조선과 漢의 국경으로 돌아갔다.

강단유사사학은 대무신왕과 유수의 1승 1패의 두 기사를 무시한다.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에 의하면 漢 군현이 꼼짝없이 조선을 억압해야 하는데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가 진번조선과 燕의 경계였던 요동고새보다 더 전진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들의 날조가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 두 기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이 두 기사에 대한 주로 요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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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고구려본기」 관련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2.12. 현재)

1. 대무신왕의 낙랑군 점령 기사에 대한 주석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 본문에서 언급된 낙랑을 낙랑군으로 여겨, 낙랑군의 멸망은 미천왕 14년(313) 10월의 일이므로 해당 기사를 과장이라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로 여기기도 한다(이병도, 1996, 353쪽). 반면 일정한 사실성을 구하기도 하는데, 그때 주목되는 것이 왕조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후한서』 권76 열전66 왕경전(王景傳)에 따르면 경시제가 패배할 무렵(25) 낙랑군에서는 토착 세력가 왕조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니,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준(王遵)을 태수로 임명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왕조를 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렀을 때 왕굉(王宏)과 양읍(楊邑) 등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6년 6월조에도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즉 경시제 집권 말부터 광무제 집권 초기 낙랑에서는 왕조가 위세를 떨치다 곧 제압되었는데, 이 사건을 고구려 측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 해당 기사라는 것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437쪽). 하지만 이 기사는 왕조의 난이 진압된 시점(30)으로부터 한참 지난 뒤의 일로 나올 뿐 아니라, 실제 왕조의 난에 고구려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한계가 있다.

한편 이때의 낙랑을 최리의 낙랑국으로 보아 대무신왕 15년(32) 호동 전승 때의 상황에 부연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37쪽). 아마도 본 기사를 최종적인 낙랑국의 멸망으로 간주한 것 같다. 다만 본서 기년에 의거할 때 최리 낙랑국은 이미 5년 전 고구려에 투항하였다고 하며 사건이 일단락한 데 비해, 지금 기사에서는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하여 낙랑국과는 별개의 세력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14년(37)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해당 기록은 낙랑의 멸망 결과 나라 사람[國人] 5,000명이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하는 등 사건의 전말을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신라 측 전거 자료에서 기인한 기사로 여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임기환, 147쪽). 신라본기 초기 기사 가운데는 주변 세력의 복속이나 포섭을 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낙랑 유민의 수용 전승 역시 그 하나일 텐데, 후대의 사료 정리 과정에서 유리이사금 14년(37)으로 기년이 설정되었고, 이것이 고구려본기에도 실려 지금처럼 남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2. 광무제의 침략 기사에 대한 주석

한나라의 광무제가 …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 본 기사의 사실성을 긍정하여 광무제가 왕조의 반란으로 이완된 낙랑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37쪽). 하지만 왕조의 난이 진압된 지 14년이나 지난 시점일 뿐 아니라 광무제의 전국 통일(36)로부터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더구나 현재 전하는 중국 측 사서에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경우가 없어 문제가 된다. 이에 해당 기사는 건무 6년(30) 광무제가 왕조의 반란을 토벌하고자 왕준을 보냈던 사건을 개서(改書)한 것으로, 낙랑군 재건과 대무신왕의 죽음을 연계하기 위하여 사망 연도에 맞춰 기년을 조정하였다고 보는 설(井上秀雄, 90쪽)도 있다. 다만 「광개토왕릉비」나 본서의 기술을 볼 때 대무신왕은 고구려 왕실에서 중요한 군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말년에 땅을 잃고 곧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식의 전승을 만들어냈을지 의문이다.

이 기사를 이해함에 눈여겨볼 기록은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건무 20년(44)조에 동이(東夷)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군]에 이르러 내부(來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낙랑군의 영향력이 한반도 중·남부에 미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현재 전하는 『후한서』는 후한의 멸망으로부터 두 세기도 더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사실을 온전히 전해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출병까지는 아니더라도 광무제 집권 후반기에 낙랑군의 통치 체제를 복구·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여겨지며, 동이 한국의 내부는 그 결과로 보인다(임기환, 149쪽). 이러한 후한의 조처가 위 기사와 같이 고구려 국내 전승 기록의 남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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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근거도 없고 타당성도 없고 논리도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신뢰성 있는 사료를 부정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 표현인 ‘전승’을 운운하며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이 두 기사를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된 논리는 중국 사서에 유수의 낙랑 침략을 기록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삼국사』에 나와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이 두 기사에 근거한 상식적인 사고는 漢의 국경을 침략할 수 있을 정도로 고구려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것인데, 이들은 오히려 낙랑군의 영향력이 한반도 중·남부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측 사서에 위 두 기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춘추필법 때문이다. 춘추필법상 대무신왕이 낙랑을 점령한 것을 기록할 수 없다. 그래서 유수의 낙랑 침략 성공도 기록할 수 없다. 고구려에게 낙랑을 뺏긴 일이 없던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한 위장을 암시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후한서』에 서기 44년 뜬금없이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내부하였다는 『後漢書』 「本紀」 光武帝 劉秀 建武二十年 秋,東夷韓國人率眾詣樂浪內附

기사가 나온다. 물론 이들은 서기 37년에 신라로 피난간 낙랑인들이다.

서기 47년에는 고구려가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내속하였다고 『後漢書』 「本紀」 光武帝 劉秀 建武二十三年 冬十月丙申 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

한다. 즉 『후한서』는 고구려에 패한 기록을 감추면서 낙랑을 실효지배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는 서기 47년에 일어난 일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고, 『三國史』 「髙句麗本紀」 閔中王 四年 冬十月, 蠶友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4년(47) 겨울 10월에 잠우락부(蠶友落部)의 대가(大家)인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樂浪)에 가서 한(漢)에 의탁하였다. 『후한서』에는 “대가(大加)인 대승 등 1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낙랑군이 서기 37년 고구려에 점령되자 낙랑 사람 5천명이 신라로 의탁해 왔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 「신라본기」 유리왕 十四年,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또 서기 40년 낙랑 동부도위의 잔당인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들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들을 물리쳐주어 신라사람들이 좋아하였는데, 『삼국사』 「신라본기」 유리왕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 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이 사건은 고구려가 낙랑군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후한서』가 기술하듯이 서기 44년에는 신라로 왔던 피난민들이 다시 낙랑군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삼국사』의 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에서의 1승 1패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낙랑군을 난하 동부로 보는 윤내현은 대무신왕의 낙랑 점령으로 낙랑인들이 신라에 의탁하였다는 『삼국사』의 기사를 근거로 대무신왕이 멸한 낙랑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낙랑국이라 하나 윤내현, 『한국고대사 신론』, 일지사, 1993. 35쪽.

이는 당시 신라 위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견해이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당시 신라는 韓에 있었으므로 윤내현의 견해는 옳지 않다. 이러한 오해에 기반하여 그는 유수가 漢의 군인 낙랑군을 침략할 수는 없으므로 유수가 침략한 낙랑은 지금의 평양이고, 평양을 침략한 이유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 주장한다. 윤내현, 『한국고대사 신론』, 일지사, 1993. 36쪽.

당시 漢의 해군력이 평양을 점령할 수 있을지도 의문시되며, 설사 평양을 점령했더라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의심된다. 낙랑군이 바닷가에 있으니 유수가 요동고새 남쪽인 낙랑 지역을 해군으로 공격하였다 하여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중국인의 세계에서 하북성 조백하가 땅끝이다. 한반도의 평양을 알 수도 없다. 유수가 평양에 군기지를 두고 유지할 정도였다면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했을 것이다.

서기 49년 『삼국사』 고구려 모본왕의 공격 기록은 『후한서』 「광무제기」와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동시에 나오므로 부인하지 못하자,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이 거짓말할 때 하는 상투적 표현인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 운운하면서, 여기의 고구려는 고구려가 아니라는 억지를 비롯한 여러 재미없는 소설을 창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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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의 『삼국사』 49년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3.1. 현재)

장수를 보내 … 다시 화친을 맺었다 :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에는 “(建武) 二十五年 春正月, 遼東徼外貊人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같은 책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라고 나온다. 문장구조로 보아 본문 기사는 『후한서』 고구려전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동태수의 이름은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78 병부9 변장(邊將)조나 『책부원구(冊府元龜)』 권536 간쟁부 직간(直諫)조 등을 참조하여 ‘채동(蔡彤)’으로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전덕재, 223~224쪽). 이 기사는 공격을 받은 측인 후한의 역사서에 나오는 만큼 실제 사실로 보아야 한다. 다만 공격 지역이 베이징[北京]의 동북~서북방 일대로 고구려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기사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1세기 중반에 요하유역으로 진출할 기반을 구축했다거나(琴京淑, 1989: 2004, 189쪽) 선비나 오환과 연합하여 베이징 일대까지 원정했다고 보기도 하지만(손영종, 96쪽; 李鍾旭, 320쪽; 박노석, 2002; 김미경, 87~88쪽; 윤병모, 38~46쪽; 박세이, 123~133쪽; 김효진, 13~35쪽), 고구려가 공격 주체일 가능성은 낮은 것이다(이병도, 1977: 2012, 276쪽).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에 ‘요동요외맥인(遼東徼外貊人)’이라 명기한 만큼 고구려와 관련된 족속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실체에 대해서는 향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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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조작소설에 어긋나면 중국의 정사도 쓰레기가 된다.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이고 고구려의 중심지가 현재의 압록강 부근이라는 일제·중제 유사사학의 교시는, 모본왕의 상곡 태원 공격 기사 하나만으로도 날아간다.

후한은 오환 선비 흉노에 대처하기 위해 漢에 귀부하고 漢에 적대적인 세력의 수급을 가져오면 상을 주었는데, 이 일을 요동태수 제융이 하였고, 그 재원으로 해마다 청주와 서주로부터 2억 7천만전을 받았다.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其後都護偏何等詣祭肜求自效功, 因令擊北匈奴左伊育訾部, 斬首二千餘級. 其後偏何連歲出兵擊北虜, 還輒持首級詣遼東受賞賜. 三十年, 鮮卑大人於仇賁·滿頭等率種人詣闕朝賀, 慕義內屬. 帝封於仇賁爲王, 滿頭爲侯. 時漁陽赤山烏桓歆志賁等數寇上谷. 永平元年, 祭肜復賂偏何擊歆志賁, 破斬之, 於是鮮卑大人皆來歸附, 並詣遼東受賞賜, 青徐二州給錢歲二億七千萬爲常. 明章二世, 保塞無事.

고구려도 제융으로부터 금원을 받고 서기 49년 점령한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반환하였다. 『삼국사』에 기재된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화친을 맺었다는 말이 그 의미이다. 후한의 조공은 후한이 중기에 접어들며 초기 시행했던 북방예산을 조달하지 못하자 중단되었고, 고구려는 漢의 조공이 중단되자 105년 후한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313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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