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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동해안의 백제유민
게시물ID : history_304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익승리
추천 : 0
조회수 : 82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3/02 08:51:29

백제는 환황해, 열도, 동남아를 아우르는 해양 무역세력이었지만, 백제의 무역활동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사료는 의자왕의 바둑판,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과 바둑돌인 홍감아발루기자, 바둑통인 은평탈합자는 상아 자단 등 남방의 재료가 사용되고 열대 동식물이 그려져 있어 백제의 무역활동범위가 동남아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한다. 안영이는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한국바둑 2000년의 비밀』(한국기원, 2005)에서 바둑판의 화점이 17개이고 홍아와 감아가 각각 150개라는 점을(순장바둑에선 180개가 아니라 150개만 있으면 충분하다) 근거로 백제에서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한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 2012.04.19. 입력 기사)

성왕이 왜왕에게 부남(扶南)의 보물과 노예 2인을 하사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흠명 4년 秋九月, 百濟聖明王遣前部奈率眞牟貴文·護德己州己婁與物部施德麻奇牟等, 來獻扶南財物與奴二口.

등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강단·일제·중제유사사학은 백제의 무역활동은 고사하고, 아예 중국 동해안 영토부터 부정한다. 강단·일제유사사학은 백제가 함안(소위 안라)의 마을국가와 다투었다는 코미디 소설을 창작하기까지 한다. 백제가 망한 후 중국 동해안에 그대로 남아 그들의 생업을 영위하였던 백제유민들의 행적을 고찰한다면 백제 무역활동의 실상과 백제 영토의 광대함이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다.

백제유민은 신라, 고려, 조선 전기까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날조되어 잊혀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김성호가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996)에서 중국에 진출한 비류백제로 보고 이미 그 실체를 파악하였다. 김성호는 비류백제가 1세기부터 중국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무역을 하였다고 보나, 필자는 온조백제가 마한을 병합한 이후 1세기부터 韓 지역을 중심으로 환황해무역을 하였다고 본다. 비류백제는 예부여이므로, 우리는 그의 연구에서 비류백제를 온조백제로 고치기만 하면 된다.

일본승려 엔닌의 838년부터 847년까지의 여행 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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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는 엔닌의 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022.6.18. 현재)

입당구법순례행기는 9세기 일본 교토 엔랴쿠사(延曆寺)의 승려 엔닌(圓仁)의 일기로, 그가 일본 큐슈(九州) 하카타를 출발하여 9년간(838~847) 당나라에 머문 동안의 행적을 기록한 사료이다.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국과 관련된 기록은 2권과 4권에 실려 있다. 재당 신라인의 활동상과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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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백제유민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원문에는 신라인으로 표기되었는데 그 실상은 ‘백제유민’이고 국적은 당나라인이다.당나라 시, 중국 동해안의 백제유민은 唐人, 신라인, 재당신라인, 唐商 등 여러 다른 용어로 표시되지만, 해상무역활동에 관련되는 경우, 모두 백제유민을 달리 표기한데 지나지 않는다.

무역활동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강단·일제유사사학은 엔닌일기에 나오는 신라방·신라소의 신라인들이 8세기 중엽 신라에서 당나라로 이주한 사람들이라 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신라방 설명 (2022.6.18. 현재),

이주의 실체도 불명확하며, 화폐조차 없었던 촌락경제 상태의 신라인들이 단기간에 중국 동해안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한다거나 중국과 일본간 원양항해노선을 개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김성호,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1』, 맑은소리, 1996. 23-35쪽.

그들의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당나라는 번진(藩鎭)의 반란을 진압한 후, 819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국 동해안 백제의 유민들에게 과세할 목적으로 신라방·신라소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를 대사(大使)라 하였다. 김성호, 위 책, 63-69쪽.

장보고는 이정기 토벌의 공로로 819년 등주 적산포 신라소의 초대 대사로 임명된다. 김성호, 위 책, 66쪽.

당은 쇄국하고 있던 신라의 시장을 노리고, 신라를 압박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여 신라의 시장을 개방시키면서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3대 대사로 연임되지 못한 장보고가 신라시장의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치청절도사를 설득하여 청해진 설치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장보고가 당의 관료이므로, 장보고의 교관선(交關船)도 사무역선이 아니고 치청절도사의 지분이 있는 무역선이다. 김성호, 위 책, 70-71쪽.

엔닌은 장보고의 교관선을 이끌던 최운십이랑을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 최병마사(崔兵馬使)’라 하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 권 제2 開成四年 六月 廿八日 夜頭張寶高遣大唐賣物使崔兵馬司來寺問慰.

대당매물사는 당의 물건을 파는 당나라의 수출관이란 의미이다. 김성호, 위 책, 70쪽.

신라는 청해진 설치 6년 후인 834년에 외래품의 소비를 규제하는데, 『삼국사』 「잡지-색복」 興德王即位九年, 大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華, 只尚異物之珍竒,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 [흥덕왕(興德王) 즉위 9년, 태화(太和) 8년에 하교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에는 존비가 있으니 명칭과 법칙도 같지 않으며 의복 역시 다르다.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서로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서, 다만 신이하고 진기한 물품을 숭상하고 오히려 비야(鄙野)한 토산품을 경시하니, 예절이 점차 잃어가는 참람함에 이르고 풍속은 언덕이 평평해지듯이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옛 법칙에 따라 분명한 명령을 내리니, 만약 고의로 어기는 사람은 일정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청해진 설치로 시작된 무역이 신라 정부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신라 정부는 장보고를 청해대사라 하는데 『삼국사』 「신라본기」 흥덕왕 3년 夏四月, 清海大使弓福, 姓張氏 一名保臯

이는 장보고가 당나라의 관리이기 때문이며,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도망가도 신라 정부가 그를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청해진이 당의 조차지이기 때문이다. 김성호, 위 책, 153쪽.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신라왕을 자처하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자 당이 김우징을 신라왕으로 인정하는 것도 「册府元龜」,券980, 外臣部通好條, 開成三年(838)秋七月 新羅王金祐徵 遣淄青節都使奴婢 帝矜以遠人 詔令却歸本國",

역시 청해진이 당의 조차지이기 때문이다. 841년 신라가 장보고가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제거하자 「續日本後紀」 新羅人 李少貞 등이 筑紫大津에 도착하여 張寶高의 죽음과 廻易使의 물건을 요청함 (842년 1월10일) 寶高去年十一月中死去

『삼국사』에는 장보고가 846년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엔닌 일기에 의하면, 엔닌이 845년 7월 9일 연수현 신라방에 들렀다가, 신라에서 국난(장보고 피살)을 만나 연수에 머무르고 있던 장보고의 부하 최운십이랑을 만났다고 한다(『입당구법순례행기』 권 제4 會昌五年 七月 9일, 遇國難逃至漣水住). 따라서 장보고의 피살은 845년 이전이어야 한다.(김성호, 위 책, 193쪽)

당과 신라는 5년 동안 왕래하지 않다가, 846년 신라가 변명하는 사신을 보내자, 『구당서』 권18 무종본기 회창 6년(846) 二月壬申朔 丁酉, 新羅使金國連入朝

당은 847년에야 6년 전에 즉위한 문성왕을 승인하는 책봉사를 『입당구법순례행기』, 卷 第四 唐宣宗 大中元年 閏三月十日, 間入新羅告哀兼弔祭冊立㝳副使試太子通事舎入賜緋魚袋金蕳中判官王朴㝳到當州牟平縣南界乳山浦, 上舩過海.

파견하였다. 김성호, 위 책, 196-199쪽.

이는 장보고가 당의 관리였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엔닌과 함께 왔던 일본 조공사는 839년 신라선(백제유민의 원양항해선)을 용선하여 수리하고 신라인(백제유민) 항해사를 고용하여 초주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신라 해역을 적경(賊境)이라 부르며 신라 해안에 근접하지 않을까 매우 걱정한다. 『입당구법순례행기』, 卷 第一 開成四年 四月 二日, 第二舩頭長岑宿祢申云, “其大珠山計當新羅正西. 若到彼進發灾禍難量. 加以彼新羅与張寶亮興乱相戦, 淂西風及乹坤風㝎著賊境. 案舊例, 自明州進發之舩為吹著新羅境, 又従揚子江進發之舩又著新羅. 今此度九箇舩北行既遠. 知近賊况更向大珠山専入賊地. 所以自此渡海, 不用向大珠山去.”

엔닌도 847년 신라인(백제유민) 김진의 배로 귀국하던 도중 전라도 섬에 기착하게 되는데, 김진과 엔닌 모두 신라 정부에 체포되지 않기 위해 『입당구법순례행기』, 권 제4 唐宣宗 大中元年 九月 六日, 武州収將去. 早聞奏訖至今勑未下. 其人今在武州囙禁待送達夲國. 其六人中一人病死矣.” 六日·七日无風信. 八日. 聞惡消息異常驚怕, 无風發不淂. 舩衆捨鏡㝳祭神求風. 僧㝳燒香為當嶋圡地及大人·小人神㝳念誦祈願平㝳淂到夲國. 即在彼䖏為此圡地及大人·少人神㝳轉金剛經百卷. 至五更雖无風而發去. 纔出浦口西風忽至. 便上帆向東行. 似有神理相扶

도망가듯이 섬을 떠난다. 김성호, 위 책, 51-52쪽.

청해진이 존속하고 있던 시기였음에도 이들이 신라 정부를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재당신라인의 국적이 신라가 아니라 당(즉 백제유민이었음)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상 기술한 바와 같이 장보고는 신라의 지방세력이 아니라 당의 지방세력이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은 장보고가 신라인이며 장보고가 신라인의 해상활동능력을 조직화하였다고 주장하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장보고 설명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2022.6.18. 현재),

8세기 이래로 왕성했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해 이들을 묶어 조직화했는데, 이로써 그의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하나의 큰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히 관여하게 되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보고는 당의 힘을 이용하여 중국 동해안 백제유민들의 해상무역 활동을 신라까지 확대하고, 신라의 방해로 위협받고 있었던 중국과 일본간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였던 사람이다. 강단유사사학이 장보고를 신라인으로 왜곡하는 것은 백제유민의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동해안백제의 실상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엔닌은 일본과 중국간의 항해는 물론 여행의 대부분(14단계 여정에서 11단계)을 백제유민에 의존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백제유민에 의지하려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목적을 위해 행동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김성호, 위 책, 28쪽.

그만큼 중국 동해안에서 백제유민의 해상활동이 광범위하였다. 백제가 망했어도 백제의 항해 집단은 중국 동해안에서 그들의 해상활동을 계속하였다. 중국 동해안에 백제 이외의 해상활동 세력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라가 망했어도 그들의 생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의 활동 범위에서 요동반도백제와 한반도백제가 제외되고, 열도백제는 유지되었다. 백제유민들은 중국 동해안 여러 지역에 산재한 신라방·신라소를 근거로 해상활동을 영위하였는데, 초주, 적산포, 주산군도가 중심지였다. 김성호, 위 책, 32-46쪽.

명주는 적산포보다 백제유민 무역상이 더 많았는데도, 김성호, 위 책, 45쪽.

신라방이나 신라소가 없었는데, 이는 명주 앞바다의 주산군도가 당나라 영토가 아니라, 백제유민의 독립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김성호, 위 책, 80-87쪽.

9세기 중엽부터 14세기까지 주산군도를 거쳐 아랍 상인들이 양주로 왔다. 김성호, 위 책, 97쪽.

이븐 쿠르다지바의 『諸道路와 諸王國志』(885년)에 입당 루트가 Lookin-Khanfou-Khandjou-Kantu 즉 용평-광주-천주-항주로 지재되어 있고, “Kantu 앞에 높은 산이 있는데 여기가 신라국”이라 기술되어 있다. 김성호, 위 책, 96-101쪽.

앗 다마시키의 『대륙과 대양의 경이에 관한 시대적 정선』(14세기)에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동방의 맨끝에 동쪽을 에워싼 바다가 있는데 그 빛깔이 너무 검푸러서 지프트해(瀝青海)라고 부른다. --- 이 바다 속에 6개의 섬이 있는데 이곳을 신라군도라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김성호, 위 책, 101쪽.

주산군도는 항주로 들어가는 길목이고, 여섯 개 정도의 큰 섬으로 되어 있으므로 아랍 상인들이 생각한 신라는 백제유민이 차지하고 있었던 주산군도이다. 김성호, 위 책, 99-103쪽.

백제유민은 열도와 무역을 하였고, 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소위 「육국사」와 「일본기략」에 기록된 신라인과 당인의 귀화는 백제유민의 귀화를 의미하고 신라선은 당연히 백제유민의 항해선을 말한다. 김성호, 위 책, 119-133쪽.

일본은 869년 신라 해적(중일간 무역을 위해 구주에 있던 백제유민)이 견면선을 약탈하였다고 하면서 윤청과 선견 등 30인을 각처로 분산시킨 후, 무역을 금지하고 백제유민의 열도 이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김성호, 위 책, 134-139쪽.

그러자 백제유민(신라 해적으로 표기됨)들은 45척의 배를 동원하여 최재석, 『일본 고대사의 진실』, 일지사, 1998. 339쪽.

893년 5월 구주 북부 마쓰우라군과 구주 서남부 히고호다를, 894년 4월에는 대마도를 점령하였지만, 결국 894년 9월 패퇴하여 열도에서 철수하였고, 그 후 일본은 11·12세기까지 중국에 사신조차 파견할 수 없게 되었다. 김성호, 위 책, 139-147쪽.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321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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