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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는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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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우익승리
추천 : 0
조회수 : 70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3/03 11:34:10

김부식은 이사부가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사부 열전을 썼다.

고성이 502년 신라에 점령되었다는 고성김씨 족보의 기록은

성씨뉴스닷컴 (http://www.sungssi.com) (2022.4.29. 현재) “소가야국(小伽倻國)은 건국후 46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소가야국(小伽倻國)제 9대 이형왕(而衡王) 29년 신라(新羅) 지증왕 3년(서기 502년) 신라에 패하여 읍성(邑城)을 내주었다.”

이사부가 지증왕(500-514) 때 가야를 취하였다는 열전의 기록과 『삼국사』 「이사부열전」 智度路王時, 爲㳂邉官. 襲居道權謀, 以馬戲誤加耶 或云加羅國, 取之 [지도로왕 때 연해 변경 지역의 지방관(干)이 되었다. 거도(居道)의 임기응변의 꾀를 답습하여 마희(馬戱)로써 가야국(加耶國) [가야(加耶)는] 혹은 가라(加羅)라고 한다.을 미혹시켜 그것을 빼앗았다.]

부합된다

이사부는 505년 실직주의 군주가 된다. 『삼국사』 「신라본기」 지증왕 6년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始於此.

『삼국유사』는 이찬(伊飡) 박이사부(朴伊宗)에게 울릉도를 토벌하라고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기이」 지철로왕, 王命伊喰朴伊宗将兵討之.

『삼국사』 「이사부열전」 은 이사부가 512년 울릉도를 병합할 때 계략으로 이겼다고 한다.

『삼국사』 「이사부열전」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謀并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討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舡, 扺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降. [지도로왕] 13년 임진(壬辰, 512)에 이르러 [이사부는]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의 병합을 계획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위엄으로 복종시켜 항복받기는 어렵고 계략으로써 복속시키는 것은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랐다. 거짓으로 고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서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이사부가 505년 이전 연변관(㳂邉官)을 역임하였고, 505년 고구려와의 국경으로 추측되는 실직주 군주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어느 정도의 경륜이 있어야 가능하며, 512년에 하슬라주 군주로서 17등급 위계의 2등급인 이찬에 있었다는 『삼국사』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舩, 柢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것은 이미 그 당시에 적은 나이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이사부는 지증왕 때 활동하고 법흥왕 시기인 514년에서 540년까지 이사부의 활동이 전무하다가 진흥왕 시기에 다시 등장한다.

진흥왕(540-576) 시 등장하는 이사부는 지소태후가 섭정하는 시기에 병부령이 되었고,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2년 拜異斯夫爲兵部令, 掌內外兵馬事.

국사 편찬을 건의하는 등 지소태후를 보좌하는 중앙관료의 성격이 강하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이사부는 지소태후의 애인으로 6세 화랑 노리부(世宗)의 아버지이다. 『화랑세기』 6세 세종, 六世世宗者 苔宗公子也 母曰只召太后也

신라는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지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도살성과 금현성을 공격하라 하였다고 하는데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11년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湌異斯夫出兵撃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당시는 지소태후가 섭정하던 시기로 이사부는 병부령으로 형식상 지휘권자이고 실제 전투를 지휘한 장군은 따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 김이사부의 위계가 512년 울릉도 정벌 시 박이사부의 위계와 같은 이찬이다.

551년 진흥왕이 친정하면서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연호 사용을 친정의 시작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칠부 등이 주도하게 되고, 김이사부의 역할은 거의 없다. 562년 가야 토벌은 큰 어려움이 없는 전쟁이었고 별 중요하지 않은 일에 보내진 것이다.

이사부가 502년에 20대였다고 하더라도 562년 경에는 80대가 되는데, 80대의 이사부에게 대가야 반란 진압을 맡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505년에 연변관(㳂邉官)을 역임한 실직주 군주였고 512년에 하슬라주 군주로서 17등급 위계의 2등급인 이찬이므로 이사부가 502년에 20대라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505년에 20대였다 하더라도 540년대엔 60대가 되어 지소태후의 애인이 될 생물학적 나이가 되기도 어렵다. 540년대에 40대라 하면 562년 가야 반란 진압시 60대가 되어 그나마 진압군 사령관이 될 수도 있는 나이가 된다. 이 경우엔 505년에 이사부는 코흘리개 나이도 되지 않는다.

이사부가 일인이라면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인 법흥왕 시기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내야 하지만, 법흥왕 시기인 514년에서 540년까지 이사부의 활동이 전무하다.

『삼국사』는 이사부(苔宗)를 김씨로 내물왕의 4대손이라 하는데, 『삼국사』 「이사부열전」 異斯夫 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삼국유사』는 이찬(伊飡) 박이사부(朴伊宗)에게 울릉도를 토벌하라고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기이」 지철로왕, 王命伊喰朴伊宗将兵討之.

즉 성이 다르고 이름표기도 다르다.

박이사부는 변방의 관직으로 추정되는 연변관(㳂邉官)을 역임했고, 변방의 관료로서 새 영토를 개척하는 등 현장관료의 성격이 강하고, 김이사부는 지소태후가 섭정하는 시기에 병부령이 되어 국사 편찬을 건의하는 등 지소태후를 보좌하는 중앙관료의 성격이 강하다. 즉 둘은 수행했던 업무의 성격도 완전히 다르고 등용된 이유도 다르다.

따라서 이사부를 2인으로 보아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성도 다르고 수행한 업무도 다르며, 나이를 고려하면 한 사람이 될 수 없는 두 이사부를 한 사람이라 우기는 것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학자가 아니며 일제 소설을 계승하는 카르텔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3337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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