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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 아버지는 사이비 교주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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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최평화
추천 : 0
조회수 : 152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04/08 00: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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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이비 교주 (12)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통닭 집을 나왔다.

“어우, 춥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자 담배 연기 마냥 뽀얀 김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오른쪽 외투 주머니 안으로 슬그머니 은경의 손이 들어와 나의 손을 잡았다.

“뭐야? 술도 못 마시게 하고.”

“하하, 미안해요. 내일 신월동에서 출근하려면 늦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해요.”

조금 전 통닭을 먹으며 오늘은 은경의 신월동 원룸에서 자고 가는 걸로 이야기를 마쳤다.

“쳇—!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맥주 없이 치킨을 먹는 게 말이 되냐고!”

은경은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목소리는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짜 화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맛있게 먹었으면 된 거죠, 뭐.”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은경은 두 눈을 얇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뭔지 말 안해 줄 거야?”

아까 수원역에서 내가 사과할 게 있다고 했는데 그걸 말하는 거다.

방금 통닭을 먹으면서 아마 열 번은 물어 본 것 같다.

“에이—! 그건 신월동에 도착해서 이야기해 준다고 그랬잖아요.”

“도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뜸을 들이는 게 아니라, 사람 많은 곳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래요.”

이것도 통닭 집에서 내가 열 번은 했던 대답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별 거 아니에요. 너무 궁금해 하면 이따가 실망할지도 몰라요.”

나의 말에 은경은 헛웃음을 지어 보였고,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확인하는 사이 은경은 나의 오른팔을 슬쩍 당기며 말했다.

“뭐해? 이제 가자.”

“잠깐만요. 택시 불렀어요.”

“택시는 왜? 걸어가면 되잖아?”

은경의 말대로 우리는 수원역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역으로 가는 거 아니에요.”

“뭐? 그럼 택시 타고 서울까지 가려고?”

은경의 말과 동시에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택시를 발견했다.

“잠깐만요.”

번호판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초록색 예약 표시등이 켜져 있다.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자 은경이 다급하게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머, 미쳤어. 여기 경기도야, 경기도. 서울까지 택시비는 확인하고 부른 거야?”

나는 은경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말했다.

“아뇨.”

은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택시는 통닭 집 앞에 멈춰섰고 우리는 그대로 택시에 올랐다.

택시가 출발하자 은경은 나에게 바싹 붙어 귓속말로 말했다.

“취소하고 수원역으로 가자고 해. 그냥 KTX 타고 가고 가게.”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가 봐요.”



10분 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주대 병원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은경은 도끼 눈을 하고 말했다.

“뭐야? 여기는 왜 다시 온 건데?”

하지만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다.

병원으로 오는 길에 기사님에게 당장 차를 돌리라고 할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은경은 그러지 않았다.

즉, 은경이 내 머릿속 생각을 읽었다는 뜻이다. 워낙 눈치가 좋은 사람이니까.

어쩌면 통닭 집에서 술은 마시지 말자고 했을 때부터 눈치를 챈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눈치를 챘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은경에게 말했다.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안 되긴 뭐가 안돼?”

나는 은경의 손을 잡았고, 병원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너무 추워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나는 병원 로비를 거쳐 곧장 엘리베이터 타는 곳으로 향했다.

은경은 나에게 끌려오는 모양새였지만 강하게 저항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야 은경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자기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그거…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아.”

“알아요. 좋은 생각 아닌 거. 그래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만나 봐요.”

은경은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나 후회 안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렇잖아요. 나를 봐서라도 어머니 한 번만 더 만나 봐요.”

은경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더 만난다고 해도 결과는 같을 거야. 자기도 아까 봐서 알잖아. 엄마랑 언니,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말이 통하질 않는다고.”

못 이기는 척 엘리베이터에 오를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완고하다.

혹시… 내가 잘못 넘겨 짚고 있는 건가…?

그리고 문득 아까 병실을 나올 때 등 뒤에서 들려온 은경의 어머니와 언니의 대화를 기억해 냈다. 7시 반 버스를 타고 갈 거라는 대화 말이다.

“언니라는 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 여기에 없으니까요.”

“뭐?”

“지금 병실에 어머니 혼자 계실 거라구요.”

은경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알아?”

때마침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는 은경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그냥 내 말을 믿어 봐요.”

은경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나의 손에 끌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렇게 나는 은경을 7층 병실로 들여 보냈고, 그녀가 병실에서 나온 건 대략 30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 커다란 두 눈이 반쯤 감겨 있었고, 얼굴 화장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귓가의 머리카락까지 젖은 걸 미루어 병실 화장실에서 세안까지 한 듯하다.

은경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잠시 후 우리는 7층에서 내려왔고 병원 건물에서 나와 택시에 올랐다.

“기사님, 서울 신월동으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하자 은경은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은경과 나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신월동으로 오는 택시에서도, 원룸에 도착해서도 은경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런 은경에게 병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좁은 싱글 침대에서 함께 잘 때면 늘 그렇듯 모로 누워 내가 은경을 백허그 한 자세였고, 나의 오른팔은 은경의 목 아래를 가로질러 침대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었다.

문득 오른팔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은경의 손이었다.

팔꿈치에서 팔목을 따라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고, 어느새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나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은경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마치 잠들었냐고 나에게 묻는 것처럼 말이다.

물음에 대한 답으로 나는 깍지 낀 손가락을 말아 쥐었고, 이내 어둠 속 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고마워….”

“뭐가요?”

“수원역에서 서울로 바로 안 오고… 나 흥분했던 거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게 해준 거.”

“아, 그거요…. 나는 그냥 수원왕갈비 통닭이 먹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은경이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돌아왔다.

“그럼 자기가 나한테 고마워 해야하는 건가?”

“뭐, 그런 셈이죠.”

은경은 다시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해야 한다는 사과는 뭐야?”

“흠…….”

나는 머릿속 단어를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누나가 나한테 물어봤잖아요? 어머니를 만나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요.”

“응.”

“그때 내가 많이 경솔했어요. 그때는 누나가 어머니를 만나서 좋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렇게 쉽게 말했던 거구요.”

“그거였구나… 흠… 그런데 그게 뭐, 사과까지 할 일인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까 누나 어머니 보니까… 뭐랄까… 누나랑 화해하고 싶어하는 게 한눈에 보였거든요.”

나의 말에 은경은 몸을 돌려 누웠다.

그렇게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은경의 두 눈에는 살짝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내가 엄마랑 싸우는 걸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네.”

“우리 엄마가 예의 운운하면서 자기한테 빈손으로 왔다고 꼽을 주는데도?”

이래봬도 영업으로 다져진 멘탈이다. 그 정도는 불쾌한 축에 끼지도 못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건 오히려 거래를 틀 의사가 있다는 긍정적인 제스처로 읽힌다. 앞으로 얼굴 볼 생각이 없다면 굳이 속마음을 드러내서 적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양 눈썹을 치켜올리자, 은경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헐… 보살이네.”

그런데 은경은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표정이다.

내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믿기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은경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나… 정말로 몰랐어요? 어머니가 화해하려고 누나 부른 거?”

은경은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한참이 지나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은경의 굳어진 표정, 이건 진짜 몰랐다는 표정이다.

괜찮아 보이기 위해 애써 모르는 척 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은경은 허공을 응시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랬네… 정말 그랬어… 엄마는 처음부터 나랑 풀고 싶어했구나… 그걸 왜 몰랐지…?”

길게 한숨을 내뱉은 은경은 베개를 등 뒤에 세워 벽에 몸을 기댔고, 양 무릎을 끌어안 듯 가슴 앞으로 당겨 그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몸을 일으켜 은경의 옆에 나란히 앉았고,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두르자 은경은 자신의 머리를 나의 어깨에 가만히 기댔다.

“누나… 괜찮아요?”

나의 물음에 은경의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응… 괜찮아…. 그냥 생각을 좀 하느라고….”

은경은 같은 자세로 전방을 응시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내가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옛날에…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들…….”

은경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나 이제서야 알게 된 건데…… 엄마는 오래 전부터 나랑 화해를 하고 싶어했던 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엄마랑 연 끊고 살기 전부터 말이야….”

나는 은경의 어깨 너머 반대편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은경은 헛웃음과 함께 혼잣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허—! 그때 왜 그걸 몰랐지…? 엄마가 분명히 신호를 보냈는데…… 왜 그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거지…? 응…?”

“너무 자책하지는 말아요.”

은경은 여전히 전방을 주시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책하는 거 아니야. 엄마랑 연 끊고 집 나온 거, 나 후회 안 해….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자기도 알잖아, 나 눈치 좋은 거.”

“알죠.”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지? 심지어는 오늘도 전혀 몰랐잖아.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긴 나도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은경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그렇게 놓치는 것도 있는 거죠, 뭐….”

그제서야 은경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기도… 그런 적이 있어…?”

나는 은경을 향해 씨익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럼요. 우리 박 부장님은 아직도 회식 자리에서 술만 들어가면 나를 자기 앞자리에 앉혀놓고 갈궈요. 신입 때 내가 눈치 없이 23억짜리 계약 말아먹은 적이 있거든요.”

은경은 피식하고 웃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아 침대에 눕히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고 이제 우리 자요. 나 많이 피곤해요.”



다음날.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은경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무릎을 당겨 그 위에 턱을 받친 채로 어젯밤과 똑같은 자세였다.

“어…? 누나… 벌써 일어난 거예요?”

은경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너는 잘 잤어?”

“아주 푹 잔 거 같아요.”

대답과 함께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고, 침대에서 내려와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그런데 은경의 커다란 두 눈 아래 진한 다크 서클이 내려앉아 있다.

“누나, 혹시… 밤새 하나도 못 잔 거예요?”

은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잤어. 방금 일어난 거야.”

나는 퀭한 은경의 눈을 바라보았고, 한쪽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여기 얼굴에 쓰여 있어요. 날밤 꼴딱 샜다고.”

나의 말에 은경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래? 얼굴에 티 많이 나?”

정말로 한숨도 못 잤다는 뜻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경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오늘 화장 안 먹겠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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