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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함" 아니 "배에서 뛰어내리세요" 라는 단 한 마디만 있었으면 됩니다
게시물ID : sisa_8274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nurmark
추천 : 17
조회수 : 8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1/01 19: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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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출신인 제가 해상침투훈련 가서 훈련 지원 온 해군 LST 타러 가서 해군에게 배운 유일한 것은...
해군 담당자가 "이함"을 외치면, 현재 기온, 수온은 물론이고 지위고하나 장비같은 금전적인 부분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로 배 밖으로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배안에 있으면 99.99% 죽지만, 배 밖으로 나와서 물 위에 떠 있기만 하면... 적어도 살아날 확률이 1%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제대하고 나서 개봉한 "타이타닉"을 봐도... 배 안에 있으면 죽기 밖에 더하는게 없지만... 그 찬물에라도 뛰어 내리니까 한 사람이라도 산다는 것을 느꼈고...

2001년 1월 15일 거제도 앞 찬 바다에서 침몰하고 있는 유조선에서...
스물여섯 짧은 생을 스러져가면서 까지 제 후배 "바다소년(hitel ID) 심경철" 군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한 것이 바로 영하 10도의 찬 겨울의 바닷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구명환을 던져 준 것이기에...

저는 세월호가 저런 상황에서도 "이함" 명령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지 않은 모은 인간들을 저주합니다.
이함하라는 방송 하나만 있었어도... 저 꽃 다운 아이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걸 안 한겁니다.
인간이길 포기한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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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그 바다소년 심경철군이 "의사자"로 지정받을 수 있었던 생존자들의 증언 가운데 하나인 "김학실"님의 수기 중 한 부분입니다.

그해 겨울에는 10년만의 한파가 찾아왔다. 그 무렵 내 소망은 여성 선장이었다. 여성들을 선원으로 태우는 일을 금기시해 온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해운사들에 실습 항해를 익히고 싶다는 지원서를 내던 2000년 여름 무렵에는 이런 금기가 깨지고 있었다. 필오션사가 내 지원을 받아줬다.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았다. 내가 타게 된 배는 유조선인 P-하모니였다. 나는 이제 겨우 스물한 살, 젊디젊은 나이였다. 같은 배에는 다른 여학생(김영은)도 실습 기관사로 타게 되었다. 우리는 8월부터 반 년간 울산과 인천을 오가며 석유를 싣고 부리는 일을 배웠다.

1월 13일은 이창무 선장님이 우리 배를 맡게 된 첫날이었다. 1월 15일이 되자 영하 10도까지 내려갔다. 브리지 유리창에 성에가 끼어 켜를 이루고 있었다. 너무 얼어 손가락으로 그림도 그릴 수 없었다. 배는 순항중이었다. 거제도 해상이 다가왔다. 나는 성에를 다 벗겨내자 해도와 레이더를 번갈아 읽으면서 선장님께 좌표를 불러드렸다. 그러면서 10시가 되고 있었다. 한숨 돌리고 커피를 마셔도 좋을 시간. 그런데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고막이 얼얼했고 유조선이 크게 흔들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다시금 콰쾅! 2차 폭발이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우리 배에 폭발이 일어나다니.

오른쪽 윙 브리지로 나갔더니 선원들이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선장님은 차분하다 못해 냉정할 정도였다. 빠르게 인원 점검을 마치고 나자 주의부터 주었다. “모두들 옷 찾아 입어. 옷 제대로 안 입으면 얼어 죽어.” 급한 게 구명정 내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벌써 바람을 타고 불길이 구명정으로 몰아닥치고 있었다. 다음은 플라스틱 ‘구명 뗏목’이 있었다. 선원들이 금세 안전장치를 풀고 배 뒤의 난간 너머로 던졌다. 구명 뗏목은 활짝 펴졌다. 그런데 파도가 솟구치자, 불길이 물살을 타고 구명 뗏목을 때렸다. 뗏목은 수면에서 쪼개지며 녹아내리더니 형체를 잃어갔다. 모두들 탄식할 힘조차 잃어버렸다. 오로지 선장님만이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모두 물에 뜰 수 있는 건 전부 찾아 띄워!”

수면의 불길은 기름띠를 타고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얼음 같은 바다에 불지옥까지 있다니. “뛰어!” 사람들이 하나둘 바다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나와 선장님, 영은이는 구명재킷을 입지 않고 있었다. “헤엄을 못 쳐요. 어떻게 해요.” 선장님은 “나도 못해!” 하고 외쳤다. 그때였다. 둥근 튜브가 바다로 던져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심경철 2항해사였다. 나는 아직도 그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그 역시 구명재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튜브를 우리 쪽으로 던져주고는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짧은 시간 양보의 결단을 내리기까지 그의 속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들이 오갔을까.

내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는 운항 실습이 아니라고. 연습 없이 태어나듯 생존에는 실습이 없다고. 나는 몸을 내던졌다. 영은이가 먼저 튜브를 잡았고,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선장님이 튜브로 다가왔다. 그날 바닷물은 섭씨 7도. 15분 이상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 안에 배가 올까. “아아, 뜨거워, 뜨거워 죽겠어.” “저쪽으로 옮겨 가자.” 영은이가 말했다. 팔이 수면으로 들어가면 한기에 적셔지고, 수면에서 나오면 열기에 달궈졌다. 선장님은 날숨이 길었다. 힘이 드시는 거야. 선원들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그는 지쳐가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았다. “자, 조금만 더 참자. 저기 배가 우리를 향해 올 거야.” 사고 소식을 듣고 정지하고 있는 배들이 멀리 눈에 들어왔다.

“자, 실항사, 이제는, 얼마 남았나?” 선장님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5마일 남았습니다.” 우리는 언제 생명이 끝나더라도 의무를 다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선장님이 잠시 후 다시 묻자 나는 3마일 남았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배는 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 튜브가 거기로 아주 조금씩 밀려가고 있을 뿐. “아아.” 선장님이 신음을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이제 안 될 것 같다. 정말 힘이 다한 것 같아.” 영은이의 목소리가 높아진 건 그때였다. “앗, 저기 왔어요. 구명정이에요.” 우리는 생존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구명정을 맞았다. 물에 뛰어들고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배는 손닿는 대로 영은이부터 건져 올렸다. 그리고 5분쯤 지나 다시 와 나를 끌어올렸다. 구명정은 한 바퀴 선회해서 우리 자리로 다시 헤쳐갔다. 그러나 선장님이 떠 있어야 할 그곳에는 튜브만 남아 있었다. 불길한 생각에 머릿속이 새까맣게 되었다. 우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선장님!” 잠시 물에 잠기셨을 거야. 우리는 몇 번이고 근처 바다를 돌면서 선장님을 불렀다. 떠오르실 줄 알았는데. 가라앉는 배와 운명을 함께 하시다니. 조금 전까지 내 곁에서 해준 말씀이 귀울림이 되어 맴돌았다. ‘자, 조금만 더 참자. 저기 배가 우리를 향해 올 거야.’ ‘실항사, 이제 얼마 남았나?’

병원에서 나는 다시 가슴 아픈 전갈을 받아야 했다. 우리에게 튜브를 던져주었던 2항사님이 끝내 숨지고 말았다고. 이제 겨우 스물여섯일 뿐인데. 그래도 나는 울지는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정신을 잃고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주위에는 슬픈 일들이 너무 많았다. 16명의 선원 가운데 9명이 돌아가시고, 7명만이 살아남았다. 눈물이 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 뜨거운 것을 손으로 닦아냈다. 삶에는 실습이 없었다.

병실의 유리에는 아침마다 성에가 무서리 내린 잎사귀처럼 피어났다. 나는 성에 낀 유리창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하늘나라의 아버지는 그분들을 만나고 계시겠지. 감사합니다. 우리 딸을 구해주셔서. 나 대신 인사드리고 계시겠지. 나는 어느 결엔가 성에 위에 이름들을 새기고 있었다. 이창무. 그리고 심경철. 그분들은 아버지와 함께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야. 그분들을 대신해서라도 값지게 잘살아야 해. 나는 병실 벽의 달력을 쳐다보았다. 사고가 난 날. 1월 15일. 그 숫자 아래에는 음력 12월 31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 음력 생일이었다. 스물한 해 전에 내가 태어났던 날.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성에에 새겨진 투명한 이름 너머로 봄의 희미한 기운이 찾아오고 있었다.
출처 내 마음 속 아픈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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