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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 3. 경남에서 충북으로 이주한 내력
게시물ID : panic_924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rodiy
추천 : 29
조회수 : 341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2/14 09: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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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이어가기에 앞서 변변찮고 두서없는 미천한 수기를 읽어 주신분들께 감사합니다.

 이야기 시작합니다. 

나는 나의 가족사에 얽힌 이 엉키고 엉킨 실타래를 꼭 풀어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험난스런 인생과 아주많은 기억력 그리고 글쓸수 있는 조금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재주를 추가하여서....

  
아버지의 작은누나 즉 고모 우리 그리고 친사촌 형제자매들은 작은고모라고 부른다. 6.25당시 국군 현역이던 지금의 고모부는 전쟁중에 적의 파편에 다쳐서 후방 경남 진해 지역에 근무중이었고 전쟁중에 타향에서 원주민인 고모를 만났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진명령을 받은 고모부는 부대상관에게 비록 전쟁중이지만 반드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요청하여 난리중에 결혼하였고 김구선생 밑에서 독립운동 하시던 고모부의 부친 생가는 서울이었는데 난리통에 불탔다. 

전쟁이 끝나고 십년이 흐른후에 고모부의 부친이 별세한후 밤나무 과수원이 있는 이삼만평 규모의 동산을 상속 받았다. 그곳을 답사했을때 임자없는 땅인것처럼 동리의 여러 사람들이 농사짓고 있었다. 

그곳의 관리는 시급했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일정년이상 농사지으면 농민땅이 되는법이 있었다. 아버지는 5형제인데 충북의 그 땅에 고모는 우선 남동생을 불러 올렸고 농사가 적성에 맞지않아 숙부들은 차례로 거쳐가고 객지에 힘든일 하시던중 맨나중 아버지가 어머니와 오게 되었다. 

그 밤나무 동산에는 깊으고 저리 절절한 역사가 스며있다. 나는 그 동산의 외딴집에서 네번째로 태어났지만  장남이다. 형누나는 세상에 눈뜨지 못한채 살아남지 못했다. 나또한 태어날때  죽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 써보도록 할것같다.

고모부 집안에 유산이 많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많은 재산중에 사연이 제일로 깊은곳이 그 밤나무 동산이다.  그산과 칠팔십 미터 나란히 있는 남쪽동산은 수백의 무덤이있는 공동묘지이다. 

이들 두동산터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역사적으로 어떠했는지 다음 다음쯤의 이야기에 써보도록 하겠다. 

고모부의 조부는 매우 가난했다. 조부의 연로한 홀아비 부친을 모시느라 장가도 들지 못했다. 하루하루를 품팔아 연명하던중 조부의 부친이 운명하게되고 마땅히 장례치를 형편도 못되어 윤씨네 밤나무동산에 깊은밤 몰래 도둑장을 쓰고 큰바위를 표시석으로 한후 그일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 야반도주하여 무작정 상경하였다. 

충북 음성을 지나 장호원 고개를 넘어가는 새벽녁에 조부는 고개마루에서 하얀 자루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열어본후 매우 놀랐다. 수천의 무거운 돈자루였다. 그것을들고 바로 귀향한다면 부친의 장례도 잘치르고 부자가 될만한 돈자루였지만 필시 이런 큰돈을 잃었다면 반드시 주인이 되돌아 찾아올것이라 믿고 그자리에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귀를 이끄는 몇명의 무리가 땀에 질려 그곳에 되돌아 나타났고 그중의 연장자가 물었다. 이정도 돈이면 감추거나 가지고 얼른 이자리를 벗어나는것이 보통의 일인데 어찌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렸는지에 설명듣고 감동하였다. 

그들은 서울 중앙 관아에 세금을 운반하는 관리들이었는데 돈자루를 잃은후 아연실색하며 찾으러 온것이었다. 조부는 그자리에서 진실함을 인정받아 그들과 함께 상경하여 머슴 비슷한 식객으로 채용되어 그집안에 직원이 된것이다. 

행운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집한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당시 과거 공부중이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시공부라 할수있다. 주경야독 식으로 그책을 나눠 공부도 할수있었다. 그렇게 몇년을 지난후 학문을 어느정도 깨우쳐 과거 시험에 응시도 하게되였다.

그리고 문과에 급제하여 세금운반 집안의 머슴살이에서 일약대반전 대략 빗대어 고시패스 하였다. 풍천부사 파평군수 황해도지사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그 지위와 명예를 펼쳤다. 지금도 파주 LCD공장부지 안에는 조부의 재산권이 행사될수있는 토지가 적지않다. 하지만 그 후손 상속자가 너무 많아 엔분의 일하면 크지도 않아서 고종사촌형은 잊고 산다고 하였다.  

그렇게 일정의 부를 축적하여 충북으로 금의환향한후 예전 도둑장 치뤘던 윤씨네의 밤나무동산을 매입하여 떳떳하게 표식바위 밑에 무덤의 봉분도 세웠다. 

나는 다섯살적 그 바위와 큰 산소에서 뛰면서 여러번 놀았던 기억이있다. 어른들이 밭일중이 참을 먹게되면 그 바위에서 함께 먹고는 했다. 그쪽으로 밤나무가 참 많았는데 그 마을 이름이 둔율이었고 마치 밤나무가 군대가 열을 맞추어선듯 하다하여 '둔율'이라했다.

삼국시대에는 그 동산이 신라의 당나라로 가는 교두보였고 백제와 고구려 삼국이 접경하여 밤에는 곙계를 강화하여야  했으므로 군인들이 많이 주둔하여 마을 이름을 밤에 주둔하는곳이라 '둔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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