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반 6세와 클레멘트 7세는 거의 동시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서로가 자신이 진짜라고 상대방을 파문한 사실이 있었다.
교황 세루기우스 3세는 테오필락트 1세의 작은 딸 마로지아의 남자 첩이었다.
교황 존 10세는 테오필락트의 아내인 데오도라의 남자 첩이었다
교황 존 12세는 18세에 교황이 되어 유치한 행각을 벌이다가 유부녀와 통정 중에 발각되어 그 남편에게 맞아 죽었다
교황 베네딕트 7세와 교황 존 14세는 형무소 복역 중에 암살당했다
교황 그레고리 5세는 독일인으로 처음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존 16세가 교황이 되어 그를 축출해 버렸기 때문에 독일 황제 오토 3세는 대노하여 대군을 이끌고 로마에 진군하여 존 16세를 체포하여 그의 귀, 코, 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죽을 때까지 투옥하였다.
교황 베네딕트 8세와 교황 존 19세는 모두 공공연하게 돈으로 교황직을 매입하였다.
17세에 교황이 된 베네딕트 9세는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는데, 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로마인들에 의해서 교황직에서 축출당하게 되자, 실베스터 3세에게 교황직을 매각하고 그 후 또 그레고리 6세에게도 은 천 파운드를 받고 매각하였다가 자기 자신도 교황으로 복귀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에는 세 명의 교황이 교황청을 치리하여 로마는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참다못한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무력으로 이들 세 교황을 축출하고, 1046년 새 교황 클레멘트 2세를 세웠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황제가 교황을 임명한 예이다.
클레멘트 2세는 교황이 된 지 9개월 만에 독살되었다.
교황 필립은 7월 31일 즉위하고 그날로 물러나서 1일 교황으로 유명하다.
호노리우스2세는 늙어 성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까지 외경스러울만큼 정력이 강했다. 그는 여자가 옆에만 있으면 성직자이기를 단념하고 「미소년」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성기능이 떨어지자 포고령을 내려 정력을 신에게 바치라며 모든 사람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순결을 강요했다.
이노센트1세(교황재임기간 401~407)는 묘령의 미소녀를 탐미한 반면,
식스투스3세(432~440)는 성숙한 수녀들에게 휩싸여 정력을 낭비했다.
요한12세(955~963)는 아예 베드로성당에 유곽을 차려 운영하면서 많은 정부를 거느렸는데 그중 한 여인이 남편에게 발각돼 살해될 때까지 환락에 빠져있었다.
바오로2세(1464~1471)는 심한 고뇌에 시달릴 때 나체의 남자를 보면서 심신을 달랜 동성연애자로서 창남(娼男)과 섹스를 즐기다 상대와 함께 얽힌 채 급사했다.
그레고리16세(1831~1846)는 이발사의 아내를 자신의 침실 옆방에 재우며 관계를 가졌는데 그가 얻은 7자녀 중 막내는 이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 평소 행실이 좋았던 쾰레스틴5세(1294)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신에 대한 순종의 표시로 당나귀를 탔던 교황. 그는 추기경들에게 그들의 많은 첩들을 수도원에 보내고 순결하게 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노센트3세(1198~1216)의 경우 당시 이단으로 지목되던 순결파 순회설교자들이 「철저한 금욕」을 요구하는데 노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 위에 죽을 때까지 앉혀놓는 형벌을 고안, 윤리문제를 설파하는 이들에게 이 형벌을 가했다.
레오10세(1513~1521)는 8세에 수도원장이 되었고, 13세에 추기경이 되었으며, 값비싼 연회와 유흥을 통해 술마시고, 흥청망청 놀았으며, 교황의 궁전에서 12명의 벌거벗은 소녀들에게 저녁시중을 들게했다.
식스투스 4세(1471~1484)는 교회 직분을 경매로 팔아 전쟁 자금을 충당했고, 친척들에게 치부한 돈을 나눠줬으며, 어린 조카 8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며, 성적으로 변태적이고 문란한 잔치을 자주 열었다.
요한 23세(1410~1415)는 주교와 사재로 구성된 37명의 증인에 의해 음행, 간통, 근친상간, 남색, 성직매매, 도둑질, 살인죄로 고소당했고, 약300명의 수녀를 겁탈하였다.
그레고리1세(590~604)는 순결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 자위행위까지 육체에 반해 행하는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몽정했을 경우 7일간 단식하며 회개하게 했고 자위행위를 했을 경우의 단식 형벌은 20일로 규정했다. 또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을 경우에는 물과 빵만으로 2년 동안 목숨을 연명하게 했고 처녀를 욕보인 사람은 3년간 단식해야 했다. 특히 당시 만연했던 성직자의 축첩과 관련해서는 거세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동성연애의 경우 상대적으로 죄값이 가벼웠고 성직자들도 "쿨라기움"이라 불리는 일종의 섹스 세금만 내면 자유로이 성생활을 할 수 있는 뒷문이 열려있기도 했다.
베네딕트8세(1012~1024)는 수녀들과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고 나이 어린 조카딸과도 동침했다.
이노센트8세(1484~1492)는 여러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 8명의 자기 딸과 성관계를 했고, 자녀 중 몇 명은 바티칸에서 결혼식을 했으며, 교회 직분을 늘려 돈을 받고 팔았으며,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투우 경기를 벌였다.
율리우스3세(1550~1555)는 두 아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그 대가로 15세된 아들을 추기경에 임명하기도 했다.
퇴폐적 사생활의 절정은 호색 정치를 실시한 알렉산더6세(1492~1503)는 매일밤 25명의 아리따운 창녀를 로마로 불러들여 정력을 불태우고, 아들의 신부와 딸 어머니 할머니를 모두 첩으로 삼았다. 품행이 나쁜 자기 아들을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앉혔으며, 자기의 두 누이와 근친상간하고, 자기의 딸 루크레티아와 동침하여 자녀를(뭐라고 불러야 되지?) 낳았다.
그를 계승한 페트리는 교황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1400년 전에 성직자의 문란한 사생활을 금지한 규율을 지켰다.
이어 1850년경부터는 교황들이 절제를 몸소 행하는 분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갑작스런 사생활 정화는 고뇌에 찬 결단이라기보다는 가톨릭이 강력했던 힘을 상실한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