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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선과 물과 급수펌프
게시물ID : military_369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해달꼬랑지
추천 : 6
조회수 : 65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1/10 15:48:28
철책선에서는 물이 귀했다. 고지에 위치한 소초에서 제대로 된 수도시설을 기대하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소초에서 10분쯤 걸어 올라간 뒷산에 전동펌프로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물탱크가 있었고 그 물탱크가 아슬아슬하게 소초원들이 딱 쓸만큼의 물을 공급해 주었다. 그다지 풍족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모두 충분히 만족했다. 페바에서는 그나마도 없어서 일주일에 3일, 물차로 물을 날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여 물차 운행이 중지되면 심청이 젖동냥을 다니던 심봉사마냥 행보관님이 직접 움직여야만 했다. 철책선에서 행보관님이 급수펌프에 느낀 애착은 어떤 면에서 심봉사가 뺑덕어멈에게 느낀 정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군대라는 게 늘 그렇듯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비였다. 장마철에 접어들며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페바의 막사는 저지대에 있었기에 미리 배수로 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사가 잠길 뻔 했던 악몽이 있었으나, 철책선의 소초는 고지대에 위치했기에 다들 한편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대로 외부로부터 막사가 물에 잠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 막사에서는 물이 샜다. 지은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신막사였는데도 말이다. 천장의 판넬이 물에 젖어 떨어지자 기회는 찬스다!!라는 기세로 물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양동이를 한 시간에 네 번은 갈아야 할 정도로 침수가 심했기에 우리들은 내부로부터 막사가 잠길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것은, 비가 가장 많이 새는 장소가 행보관실 앞 복도였다는 점이다. 행보관님은 도저히 이 미친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고, 침수하는 수량의 제곱에 비례하여 기분이 나빠져 갔다. 그리고 우리들은 행보관님의 기분이 나빠지는 정도의 제곱에 비례하여 불안해져 갔다. 그러나 이 큰 불행은 얼마 후 더 큰 불행으로 덧씌워졌다. 급수펌프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은 아니고 젖은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벼락에 맞은 급수펌프는 지체없이 산재퇴직을 신청하고 일을 그만두었다. 군기빠진 펌프 같으니라고.........  행보관님의 기분은 피사의 사탑에서 자유낙하하는 쇠구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펌프가 일을 그만두자 당연히 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물이 저렇게 많이 내리는데 쓸 물이 없다니......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아무짝에 쓸모 없는 지폐를 잔뜩 가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취사에 쓸 물은 옆 소초에서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가장 먼저 씻는 게 금지되었다. 소초원들이 밤새 근무를 서고 돌아와 우의를 벗자 오래된 판초우의 특유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쿠리쿠리한 냄새가 내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씻을 물은 없었다. 나는 행보관실 앞의 양동이를 고뇌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후임병을 제 때에 말릴 수 있었으나, 씻지 않는 것과 그 양동이 물로 씻는 것 중 어느쪽이 인간의 존엄성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지금도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식판은 빗물로 닦아야 했다. 취사장 앞에서 소초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처마 밑으로 식판을 내밀고 있는 모습에서는 비장미마저 느껴졌다. 물론 그 비장미는 그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로 인해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담긴 소초원들의 눈에는 남파간첩을 식판 한 장으로 때려 잡을 패기가 담겨 있었다. 아직 월남하지도 않은 간첩이 불쌍해질 정도였다. 남파가 예정되어 있던 간첩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려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약간 안 되어 펌프가 수리되었고 물 난리는 일단락났다.


그러나 갓 병장을 달고 상황병으로 발탁된 나에게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펌프의 안위를 확인하라는 행보관님의 특명이 떨어졌고, 나는 말년휴가 전날까지도 펌프님께 문안인사를 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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