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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21: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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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연초]
#기획실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 앉은 스탭들.
스탭1:타겟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스탭2:SF애니메이션이라면 13세 미만이 정설이죠.
스탭3:이번엔 뒤집어 봅시다. 타겟의 연령도 올리고 캐릭터에도 파격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겁니다.
스탭2:모험이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스탭1:주제는?
스탭3:당연히 휴머니즘이죠.
스탭4:(혼자서 중얼거린다)...진부함을 죄악시하는 분위기군.
[96년 봄]
#1.접선장소(역삼동의 R커피숍)
분주한 커피숍 구적 자리에 마주앉은 L과K 두 사람.
L:(스트로우로 콜라 잔을 저으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K:좋은 소식은 뭐죠?
L:대단한 스폰서가 투자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K:나쁜 소식은?
L:그 스폰서가 장난감 회사라는 겁니다. (손오공을 말함)
K:(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집어든다)... 지금까지의 작업을 뒤집어 엎으라는 이야기군.
L:거대 로봇이 등장해야 합니다. 하나도 안되고 셋입니다.
K:...(말없이 머리를 쥐어뜯는다.)
#2.기획실
예외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스탭들.
스탭1:로보트가 매회 등장해서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스탭2:로보트 만화가 따로 있나? 매회 다른 로보트를 등장시켜서 부숴버리면 그만이지.
스탭3:다른 방법도 있을 겁니다.
스탭4:(독백)...진부함으로 회귀하는 분위기군.
[96년 여름]
#1.Y프로덕션 건물 복도
종이컵을 든 채 얼어붙은 두사람
직원1:방금 우리 앞을 지나간게 뭐지?
직원2:(몸서리 치며) 글쎄, 유령이 아니었을까?
빠른 속도로 90도 PAN. 비척이며 걸어가는 K의 뒷모습.
천천히 C.U하면 K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K:...한계야. 애니메이션은 정말 어려워.
#2.기획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의 실루엣들. 피로탓인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들이 튀어나온다.
소리:바꿉시다!
소리:난 못바꿔. 당신이 바꿔!
소리:내가 왜 바꿔!
소리:지..진정들 하시죠!
[96년 가을]
#강남의 맥주집
취한 듯 눈동자가 다소 풀려있는 K와L
L:슬슬 지치기 시작합니다.
K:면역의 세균이 부족해서 그래요.
L:우린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K:시체로 강을 메워 다리를 만드는 작업이죠. 언젠가 그 다리를 딛고 달려갈 한국 애니의 본진을 위해.
[97년 봄]
# Y프로덕션
E-전화벨 소리
K:(수화기를 집어들며)어떻게 됐어요?
L:(소리)됐어요. 결국 그가 음악을 맡기로 했어요. (신해철을 말함)
K:의외군. 이유가 뭐래요?
L:주인공 성격이 더러운게 마음에 들었다는군요.
K:......
[97년 가을]
#강남의 소주집
상당한 양의 소주병이 세워진 테이블. 어지어리 흩어진 안주.
Z.O하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앉아있는 세사람 (K.L.A).침통한 분위기.
K:5시 10분이라구?
A:5시 10분이라.
L:5시 10분...
잠시 텀. 움직임 없이 앉아있는 세사람. 갑자기 발작적으로 술을 따라 마시는 K.
K:젠장. 5시 10분이란 말이지.
A:(K의 술병을 빼앗아 자기 잔에 부으며) 유치원 아이들은 볼 수 있겠군.
L:4차 가죠.
A:대한민국 만셉니다. 방송국 만세구요.
K:결국 20억짜리 유아용 만화 잔치였군.
L:어쨌거나 모든 스탭이 열심히 했어요. 그거면 된거 아닌가요?
K:(비틀거리며 일어난다) 갑시다.
A:(역시 비틀거리며) 어디로?
K:강을 메우러.
L:시체가 되자는 말씀이군.
힘없이 술집을 나서는 세 사람.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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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지만. 라젠카 하니 생각나서 찾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