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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7 04:5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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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친구들의 질문에 난처할 때가 있다.
"야, 네 이상형은 누구냐?"
남녀를 막론하고 동성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면 흔하게 튀어나올 만한 주제다. 실제로 활화산 같은 성욕에 눈뜬 중학생 시절부터, 이제는 상대의 조건을 따져야만 하는 나이가 된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어왔다. (물론 중학생 때의 이상형 이야기는 단지 응큼한 이야기로 몰고 가기 위해 시동을 거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진 친구들은 시큰둥한 반응에 이내 풀이 죽고 만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상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까. 고민해 본 적이 없으니 이상형도 없다. 녀석들에게 돌려줄 대답은 '글쎄...?' 정도가 고작이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진짜다. 길 가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이성과 마주쳐 심장이 '꿈틀'해본 적도 없다.
세상이 바뀌어 동성 간의 사랑이 예전처럼 터부시되지 않게 되자, 나의 머뭇거림이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전달되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나는 '내 미래를 맡길 수 있는 사람'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내 방향감각을 상실한 내 취향을 변호해야만 했다.
결혼 적령기가 가까워지자 나도 조금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98 퍼센트의 타의 때문에.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강요된 숙제는 그리 즐겁지 않다.
외모? 성격? 체형? 조건? 원치도 않는 해답을 위해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결국 뼈의 생김이나 혈색, 머리칼이 곱슬이냐 아니냐 따위까지 사고가 확장되고 만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선택지를 나열해봐도 내 이상형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애초에 타인이 가진 다양한 매력에 대해 효과적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탓이 제일 크겠지만.)
그러나.
어느 날 세상이 뒤집어졌다.
나는 이제 은은한 레드와인 빛을 띠는 단발의 아름다움에 대해 쉬이 상상할 수 있다.
조금은 사나워 보이도록 손질한 가는 눈썹도, 은근슬쩍 치켜 올라간 눈꼬리 아래에 미아처럼 매달린 어울리지 않는 눈물점도.
새하얀 도화지 위에 홀로 피어난 붉디 붉은 입술의 도톰함과 매끄러움, 이따금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목덜미를 쓰다듬는 약간은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고민을 단 한 방에 털어낼 그런 존재를, 구두 밑창에 들러붙은 개똥을 털기 위해 찾은 공원 화장실 앞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