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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2 01: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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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의 외사는 내다 버리는게 아니라 집의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봐야겠지요(사랑채라 해석되지만 뒷방이나 골방이라 이해해야할테지요)
돌아가시고 집을 무너뜨린다는 구절을 보아 당대에 어떠한 풍습이 있는듯 싶은데 그에 대한 연구도 있지않을까 싶은데
지식이 짧아서 모르겠습니다
진(晉) 언릉(焉陵) 사람. 함녕(咸寧) 연간에 역질이 크게 번져 두 형이 죽고 차형(次兄) 비(毗)가 위독하게 되자, 부모와 아이들을 모두 외사(外舍)에 거처하게 하고 혼자서 간호하여 구제하였다. 《진서(晉書)》 권88
저녁밥을 먹은 뒤 정창욱이 임채우의 외사(外舍)에서 그와 함께 자며 다시 이야기를 나눴더니, 그 사람이 또 ‘비단 6월에만 난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 망측한 말을 발설하였으며
영조 101권, 39년(1763 계미 / 청 건륭(乾隆) 28년) 1월 30일(무자) 3번째기사
국옥(鞫獄)의 사체는 얼마나 엄중해야 하는 것입니까마는 어젯밤에 사명(使命)을 받고 나간 도사(都事)들은 죄인을 체포할 적에 단지 외사(外舍)만 수색하고 끝까지 수색하지 않아 죄인을 즉시 체포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정조 4권, 1년(1777 정유 / 청 건륭(乾隆) 42년) 8월 11일(갑진) 2번째기사
그리고 초상을 치르고서 '향도(香徒)들을 많이 모아서 술을 준비하고 풍악을 베풀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니' 이 부분은 유교의 예법에 맞지않는
당대의 장례식을 말하는 것이지(향도가 불교쪽에서 나온지라...) 이것을 고려장의 예시로는 많이 힘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