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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9 18: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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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맥아더가 중국(정확히는 만주)에 핵폭격을 하자고 주장한것도 자기 실책을 만회해 보고자 한거라...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8D%94%EA%B8%80%EB%9F%AC%EC%8A%A4%20%EB%A7%A5%EC%95%84%EB%8D%94#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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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으로 맥아더의 명예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후부터 오판을 남발하며 1950년 겨울의 대참패에 일조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지만 맥아더는 그것을 허풍으로 치부했고, 중국이 설령 참전한다 해도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당장 맥아더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이 말은 맥아더가 바란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중공군이 남진하고 있다는 첩보는 맥아더와 그 휘하 참모들에 의해 보기좋게 무시당했고,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의 10월 15일 웨이크 섬 회담에서도 맥아더는 중국이 개입할 리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덕분에 중공군의 참전 이후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며 길길이 뛰었다. 11월까지도 맥아더는 중공군의 침투는 공군력으로 간단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무려 30만 명의 중공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건너 매복을 완료한 상태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중공군의 개입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완전승리를 자신하던 맥아더는 11월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다."라고 선언, 주위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맥아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제한전이 아닌 중국과의 전면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세계멸망확전을 우려한 트루먼 행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트루먼 행정부는 38선을 회복하는 수준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침이었지만, 맥아더는 만주에 대한 핵공격과 대만에 있는 국민당군의 동원까지 주장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대전략 수립은 행정부의 몫이라며 맥아더에게 함구령을 내린다. 그러나 맥아더는 트루먼의 함구령을 무려 6차례나 무시하며 독자행동을 계속했다. 맥아더가 기자회견에서 대만군의 참전을 역설하자 마침내 트루먼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맥아더는 전쟁 지휘 중 파면당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장군들조차 맥아더 파면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맥아더의 폭주가 워싱턴의 수뇌부에게 얼마나 골치아팠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일부에서는 그의 인기를 두려워한 트루먼의 계략이라고 하지만 당시 맥아더 자신의 나이가 많은데다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정치 기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의미 없는 이야기다. 44년과 48년 공화당 경선에 도전했지만 관광당했다. 심지어 맥아더가 최고의 영웅이 된 44년에도! 맥아더도 큰 관심은 없었던 듯하다. 44년에도 자기 스스로 아무 선거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쪽 사람들은 장군은 너무 바쁘셔서 선거운동할 시간도 없으십니다라는 유세를 했다. 오히려 트루먼의 결정은 민간인의 군 통제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로 평가받고 있다.
맥아더의 전술적 능력은 둘째치고서라도 정치적, 전략적 식견은 형편없었다는 것이 한국전쟁 연구자들의 중론. 맥아더는 자신에게 대전략을 수립할 권한이 있다면 핵무기를 떨어뜨리고 만주를 침공하며 타이완의 중화민국군을 활용해서라도 중국군을 섬멸할 것을 공언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벌어질 세계적인 확전과 사상자 수의 급증은 정치가들의 문제이지 야전사령관인 자신이 할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즉 공은 내가 먹고 책임은 니가 지라는 일.
특히 확전을 공언하며 제3차 세계대전의 세계멸망급 리스크를 무시했다는 점은 어떻게 표현해도 변호할 길이 없었다. 한국전쟁은 동아시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고, 희생을 감수하고 중공군을 밀어붙여 한반도 통일 우왕ㅋ굳ㅋ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전쟁이 확대되었다면 소련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소련의 전략행동은 한국전선만이 아닌 유럽에서도 충돌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당시 소련의 핵무장이 미비한 상태이긴 했지만, 대신 미국 역시 핵무기의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남발하기 쉬운 상태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