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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7 15: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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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틈'에 대해서도 저도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한가지가 떠올랐는데, 유독 "아무도 아닌"에서 무수히 사용된 말줄임표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한 의미가 맞다면, 저는 이 말줄임표 속에 petrichor님께서 말씀하신 '틈'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아닌"의 첫 말줄임표는 다시 '하행' 할 것이냐는 노인의 물음("상행")에 대답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상행"하는 '나'에게 "하행"은 큰 간격이 느껴집니다. 또한 그 다음의 말줄임표는 "상류의 맹금류"에서의 말줄임표 입니다. "여기는......안 되지 않을까요?" '여기는'을 말하고 틈을 겨우 건너 도달한 '안 되지 않을까요?'라는 말에는 소통의 불가능이 보입니다. 그 '틈'은 어떨 땐 너무나도 가깝지만 어떨 땐 너무나도 멀어서 혹시라도 넘지 못하고 그 사이로 떨어져 버릴까 두렵기도 하지요. 하지만 예전부터 우리는 이미 알고있지요. 사람간의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우리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타인의 뜻을 나의 의지로 오독하여 받아들이는, 오해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쩌면, 우리 앞에 보이는 틈이, 어쩌면 절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너갈 곳이 존재하지 않는 절벽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고'는 모두가 알다시피 접속사이죠. 접속사는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다리는 특별해서 저쪽이 이쪽과 같아야만 이어주는, 그런 동일성이 필요하죠. 하지만 "명실"에서의 첫 문장의 '그리고'는 이쪽이 있지만 저쪽이 없는 모양새입니다. 단절되어 있죠. 그것은 무슨 단절을 뜻하는 걸까요. 명실의 기억일 수도 있고, 명실과 실리의 관계일 수도 있고,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찬장 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문득 떠올렸다는 모습. 예전에 아꼈던 찻잔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찻잔. 그것을 보며 "아무 것도 아닌"찻잔을 보고 "아무도 아닌" 자신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떠올려 노트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상관없는 찻잔을 보며 상관없는 노트를 떠올려, 더욱더 "명실"의 단절을 부각시키려 했을까요? 그게 어떻게 되었든 그 모습에서 우리는 처연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들 같습니다.
사실 저는 명실과 실리가 한 존재이지 않을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훨씬 더 풍부해 질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