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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5 15: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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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오전에 "출근했냐, 속은 어떠냐, 해장은 했냐 등등의" 전화를 받으면서
어느 새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이게 뭐지?' 하는 의문에서 벗어나서
'이게 그것(?)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헷갈리게 하는 상대는 질색이었지만 저 역시 조심스러웠죠.
그렇게 서로 조심을 하던 어느 날 저녁쯤 제게 상의할 일이 있다면서 퇴근 후에 식사를 하자는 거에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사실 대학 때 전공이 달라요. 그런데 상대가 회사에서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게 제 전공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 좀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고 싶다는 거에요. 제게 조언을 듣고 싶다고.
저는 속으로 조금 갈등을 했어요. 소위 그 기업은 우리의 갑사인데 담당자에게 도움을 주면 좀 더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있으니 제 업무도 수월해지겠지만 저는 쑥맥이 아니거든요.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제 조언이 있으면 좀 더 수월하긴 하겠지만 굳이 그 일로 몇 번이나 얼굴 볼 만큼
비중이 큰 것은 아니죠. 상대는 제안을 하는 거에요. 눈에 보이는 핑계를 대고 있으니 본인이 좋으면
승락하라고. 그럼 좀 더 다가가겠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상대가 싫지는 않았지만 일적으로 좀 더 수월한 관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다가오는 것은 적당히 선을 긋던지 하자라며 제 연애관록을 믿었죠.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어요.
정말...주 업무가 그 프로젝트 아닐까 싶게 의심이 갈만큼 정말 사소한 것으로도 문자나 전화통화를 해오기 시작했죠.
핑계를 허투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철두철미하게 이용하더군요.
둘만 보는 것을 제가 살짝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전임자를 껴서 몇 번이나 저녁자리를 만들더군요.
전임자를 잘 먹이고 집에 빨리 들어가봐야하는 유부녀의 특성을 잘 이용해서 전임자를 택시태워 보내고
꼭 저와의 2차자리를 만들었어요. 맥주집이든 커피전문점이든 말이죠.
혹시라도 제 입에서 늦게 들어가니까 그 자리가 부담스럽다 라는 소리라도 나올까 항상 그 경계선의 시간에
저를 깍듯하게 데려다주고 가더군요. 마치 제가 그 자리를 불편하다고 불평하면 저만 까다로운 사람이 되는 듯한
흠잡을 데 없는 매너였어요.
좀 뜬금없는 소리겠지만 저는 가을을 좀 타는 여자에요.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고 고독함을 즐기기도 하지만
가을날 해질녘을 보면 뭔가 모르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곤 했거든요.
업무 중에 제 실수는 아니었지만 제가 책임져야했던 일이 생겼어요. 물론 직속상사와 대표님께
한소리를 들었죠. 직장생활 N년차이니만큼 그런 일은 적당히 넘기는 일이 능숙한데
그 날따라 가을이어서 더 그랬는지 못견디겠더라구요.
고객사 미팅을 나가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분께 전화를 걸었어요.
놀랄 줄은 예상을 했었지만 좋아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죠.
너무 기쁘다는 거에요. 먼저 제가 연락을 다 해주다니. 기쁨이 담겨 있는 그 자상한 말 한마디에
제 마음 속에 잠겨 있던 빗장이 살그머니 풀리더라구요. 그리고 언제 그랬냐싶게 불쾌하게 요동치던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거에요. 그리고 웃으면서 통화를 끊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