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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3 2018-12-22 22:03:5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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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최돈선 /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
비 오는 날 파밭을 지나다 보면 생각난다

무언가 두고 온 그리움이 있다는 것일까
그대는 하이얀 파꽃으로 흔들리다가 떠나는 건
모두 다 비가 되는 것이라고 조용히 조용히
내 안에 와 불러 보지만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망설이며 뒤를 돌아보면서도
나는 입밖에 그 말 한마디 하지를 못했다
가야할 길은 먼데
또 다시 돌아올 길은 기약 없으므로

저토록 자욱이 비안개 피어오르는 들판 끝에서
이제야 내가 왜 젖어서 날지 못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낮닭이 울더라도 새벽이 오기에는
내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므로
네가 부르는 메아리 소리에도
나는 사랑이란 말을 가슴속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13402 2018-12-16 19:45:3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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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

어쩌면 나는 뻔한 이야기밖에 쓰지 못한다 3년 쓴 이불이 내 세상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온함을 가장했으나 거북의 껍질 속에 숨은 것 같다 오랫동안 뻔한 게으름을 파이프 위에 얹어 피운다 잠은 며칠이나 그물에 걸러 들었다 밥이 싫으면 차나 몇 모금 마셨다 수증기가 창문 위를 덮으면 나는 그 위에 이름 석자 그렸다 이 방에 갇힌 나는 라푼젤이 따로 없군요 그래, 마녀는 내 또 다른 이름이었으므로 수갑은 달리 필요가 없었다 눈이 오시면 푹신함을 고대하며 창 밖으로 뛰어내릴 심산이었다 다만 나는 너무나 더운 나라에 갇혀있었고 그 후로 오래오래 땀 대신 눈물을 흘리며 살았다
13401 2018-12-16 07:09:4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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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

둥그런 찻잔에 달콤한 밤이 담겼다
쌀쌀한 마음 달래 보려 한 입 크게 삼킨다
아, 오늘 밤에도 달님은 안 계시네
13400 2018-12-15 02:18: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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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한강 /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이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라졌다
13399 2018-12-12 00:43:0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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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곽재구 /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은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13398 2018-12-11 00:21:0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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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이민하 / 당신이라는 과학

당신을 만나려고 나는 직립을 한다. 당신과 악수하려고 앞다리를 일으켰다. 당신에게 인사하려고 거울 속에서 표정을 익혔다. 당신에게 고백하려고 자음과 모음을 연마했다. 꼬리 대신 각주가 매달려 있다. 당신을 부르려고 밥상 위에 꽃을 피운다. 두 개의 손이 모자라 그림자를 만든다. 당신에게 밟히려고 낡고 지루한 계단을 시시詩詩때때로 리폼한다.

당신이 보지 않으면 나는 아무 곳에도 숨지 않는다. 당신이 듣지 않으면 수음도 하지 않는다. 당신과 시작할 때까지 나는 잠들지 않는다. 당신이 웃는다. 그래서 좋아, 웃다가 기절했으면, 당신과 끝낼 때까지 나는 깨지도 않는다. 당신이 눈을 흘긴다. 그래도 좋아. 눈이 빠지도록 폭발했으면. 당신이 발생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실험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발표되지 않으면 이별의 가설도 쓰지 않는다.

당신은 어둠의 횃대에 올라 새벽을 복제한다. 마음이 스칠 때마다 센서가 물결치는 불야성의 트랙. 나는 줄지어 뒤뚱뒤뚱 행진한다. 날개 대신 후렴이 매달려 있다. 아침마다 빼앗기는 꿈을 다섯 알씩 낳는다. 한 마리씩 목을 비틀고 기름 속으로 뛰어들어가 귀갓길 당신의 취기를 타고 입속으로 사라진다. 반복해서 씹혀주는 추억의 부검. 당신의 혀가 닿지 않으면 나는 죽지도 않는다.
13397 2018-12-08 05:46:3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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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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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숨소리를 가졌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숨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그것처럼 밝게 빛나는 형광색의 연둣빛일 것임에 틀림없다. 따뜻해질까. 나누어가지면 오늘의 한파가 늦게라도 풀릴 것처럼, 나는 애써 두터운 이불을 네게 덮는다. 따끔거리는 발목을 밀어 넣으며, 늦었지만 자야지, 잘 자야지, 하고 소곤거리는 사랑.
따뜻해져라. 너무 늦게라도 늦지 않았다 가슴 떨리게.
13396 2018-12-07 00:47:3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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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2:45:43
정영효 / 회로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더 비슷해지기 위해 우리는 숫자를 뽑아 점괘를 맞췄고 흔한 인사법으로 상냥함을 대신했다 회색의 도시보다는 야경을, 상상보다 상상이 주는 걱정을 나눠가진 채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만 우리는 조금 더 짙어졌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어디가 끝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낮게 엎드려 지나가는 것들을 응시하는 길목으로 조용히 고백하는 것, 그게 너에 대한 내 유일한 다짐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놓치면 가로등은 왜 늘 앞에서 시작되고 있는 걸까 저곳을 돌면 어떤 얼굴로 우리는 마주할 것인가 매번 같은 길로 돌아왔지만 기대는 반복될수록 두려웠고

비로소 집으로 가기 싫다는 용기가 필요했을 때, 우리는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너의 집이 아닌 곳으로 내 집이 없는 곳으로 굳은 표정이 이어지는 도시의 끝자락에서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 있는 두려움과 함께
13395 2018-12-06 16:55:40 0
/ [새창]
2018/11/27 02:45:43
정호승 / 사랑한다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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