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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2018-02-28 09:47:16 11
집착형AI [새창]
2018/02/28 08:57:05
누가 곧 만화로 만들만한 내용이네....
170 2018-02-27 22:24:55 12
눈이 많이 내린 놀이터 [새창]
2018/02/27 08:54:34
어떻게 들어간거죠...? 쌓이는 동안 계속 타고 있었....?????
169 2018-02-27 20:25:14 1
동서양 통틀어 공통된 진리.JPG [새창]
2018/02/27 15:23:44
한자와 나오키 꿀잼 드라마입니다!
168 2018-02-27 20:07:16 25
역사상 가장 이상했던 미의 기준 [새창]
2018/02/27 13:31:15
일본의 검은치아는 오하구로 (お齒黑) 라고 하여 헤이안시대 즈음 부터 메이지유신까지 유행했던 풍습입니다.
초기에는 풀, 과일 등을 이용하였다고 하나, 곧 철(!)을 식초에 담그고 이것저것을 섞어서 만든 카네(鉄漿)라는 염색약을 사용했다는군요.
167 2018-02-27 19:58:02 1
[새창]
어릴때 토요미스터리극장이였나? 에서 방송했던거 같네요
166 2018-02-27 19:57:03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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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수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딸들을 성폭행 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했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전혀 없이 오로지 각자의 딸의 증언만으로 잡혀들어갔죠.
원인은 본문과 같이 심리치료사들이 원인이였습니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이 상담을 하는거죠.

내담자: 요새 ~~해서 스트레스도 많고 힘들고 ~~~
상담가: 그렇군요. 혹시 당신은 어릴때 성폭행 당한적 있나요?
내담자: 그럴리가요. 저희 부모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세요.
상담가: 오 아니요, 저는 귀하와 같은 분들을 많이 접해봤어요. 물론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 기억을 찾아야만 합니다.
내담자: 제 부모님이 저를 성폭행했다고 생각하시는 근거가 뭐죠?
상담가: 어릴 때 겪었던 충격적인 기억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억압되어 있는 겁니다. 그 억압된 기억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예요. 사실 어릴 때 당한 성폭행의 힘든 기억이 당신에게 각인되어 지금처럼 힘들게 만드는거예요. 어쩌고저쩌고

저런 상담이 웃긴게 내담자가 강하게 부정할 수록 기억을 강하게 억압하는 거라고 타이르며 상담을 이어가니, 거기서 박차고 나간 사람이 아닌 이상 많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넘어가고, 부모를 고소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본문의 로프터스 교수가 흥미를 느끼고 실험한 끝에 이런 경위를 밝혀낸 것이죠.
로프터스 교수도 성폭행 피해자를 꽃뱀취급하는 쓰레기로 매도당하면서 갖은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사람들에게 로프터스 교수의 주장이 먹혀들고 반박기사들이 나오면서 위와 같은 상담가들도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관심있으신 분들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에 대해 검색해보면 더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65 2018-02-27 18:39:37 0
[새창]
어둑시니 어둑시니 어둑시니~~~~
164 2018-02-26 17:27:36 1
일반인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거느렸던 발해.jpg [새창]
2018/02/18 20:07:45
5. 우에다 마사이키는 아마 2016년에 작고하신 上田正昭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의 오기인듯 합니다. 우에다 교수 주장대로, 저 역시 칠지도는 백제가 왜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제가 이전 댓글에서 제대로 쓰지않아 오해하신 것 같은데, 명확하게 다시 말하면 (칠지도를 전달한 시기로 추정되는) 백제와 왜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근초고왕 시대에는 왜가 백제의 제후국으로서 관계를 맺었다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제가 보기엔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백제-왜가 왕국-제후국의 관계를 유지했는지,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가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삼국시대로 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의 기록인 삼국사기의 질(質)의 기록보다는 그 시대에 기록된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신뢰성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백제와 왜가 매우 긴밀한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되어도 왜가 제후국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역사는 고고학적 유물이 되었든, 역사서의 기록이 되었든 근거를 바탕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우에다 교수가 말한 대로 '역사는 사실을 정확히 기술해야 하고 이념에 바탕을 둬선 안된다.' 고 저는 생각하고, 그에 따르면 백제-왜가 관계를 맺은 4세기 경 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7 세기까지 모두 동일하게 왕국-제후국의 관계라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163 2018-02-26 17:27:28 1
일반인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거느렸던 발해.jpg [새창]
2018/02/18 20:07:45
4. 니나메세이라고 하신 것은 아마 '新嘗祭 (にいなめさい, 니이나메사이, 신상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신상제는 일종의 수확제입니다. 덴노가 수확한 오곡을 신에게 바치고, 덴노 스스로 먹으면서 수확을 감사하는 과정으로, 궁중제사(宮中祭祀) 중 하나입니다. 기본적으로 신도에서의 제사라 함은 신에게 지내는 제의를 뜻하는 것이고 신상제 역시 그런 범위의 내용입니다. 신도에서는 사람 역시 신이 될 수 있겠지만 카스가이타이사 (春日大社) 역시 카스가노가미 (春日神)라고 하여 후지와라의 우지가미 (氏神)를 모시는데 수확제를 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제가 배움이 부족하여 카스가이타이사에서 신상제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신상제를 한다는 것이 곧 일본덴노=후지와라=백제왕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너무 없는 억지인 것 같습니다.
162 2018-02-26 17:27:02 1
일반인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거느렸던 발해.jpg [새창]
2018/02/18 20:07:45
3. 후지와라 가문의 시조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中臣鎌足)로서, 사후에 덴지 덴노 (天智天皇)로부터 후지와라 (藤原)라는 성(姓, カバネ, 카바네)를 받았으며 그 이전에는 나카토미 (中臣)라는 씨(氏, ウジ, 우지)를 사용하였습니다. (카바네와 우지의 차이는 복잡하니 생략합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다르나 거의 유사하게 사용됩니다.)
부여풍이 후지와라 가문의 시조라고 주장하시는 것이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부여풍과 동일 인물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나카토미氏가 부여풍의 후손이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두 주장 모두 근거가 너무 약합니다.

가마타리가 부여풍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은 나카무라 마리코(中村 真理子)라는 만화가의 만화에 나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부여풍은 백제 부흥운동에 실패 후 고구려로 망명갔으며, 이후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후 부여풍은 중국 남부 영남(嶺南)지방으로 유배갔다고 하여 일본으로 돌아와 활약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리고 나카토미氏는 고대 일본에서부터 계속 존재하던 氏이기에 백제계라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물론 이 역시 근거가 부족합니다.) 부여풍의 후손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일본에서 백제왕족의 후손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扶餘善光)을 선조로 하는 백제왕(百済王, 구다라노코니키시)姓 입니다. 하지만 구다라노코니키시姓는 부여선광이 지토 덴노 (持統天皇) 로부터 받은 이래로, 칸무 덴노 (桓武天皇) 의 어머니가 백제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 (高野新笠)의 영향으로 백제계가 외척이 되기 전까지는 일반 호족 수준의 대접밖에 받지 못했던 것을 보면 백제계 = 덴노계라고 주장하시는건 너무 나간 것입니다.

덴노왕계에 백제계가 공식적으로 연관된 것은 어머니가 백제계인 칸무덴노부터라고 보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 이전 덴노 왕계는 백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혈연관계가 있는지를 증명하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왕족이 설사 일본 정계의 왕족급 취급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백제-왜 관계가 왕-제후 관계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가 망하고 보덕왕 안승이 신라에 와서 진골 취급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고구려가 신라의 제후국이였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백제왕족이 왜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 정치적으로나 여러 제반 조건 상 백제왕족을 잘 대할만한 상황이였다는 것이고 그 상황이 백제 유민을 흡수하기 위한 것인지, 백제왕족과 덴노계가 혈연적인 관계가 있어서였는지, 백제의 문화를 최대한 받기 위해서였는지 등은 쉽게 단언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161 2018-02-26 17:26:48 1
일반인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거느렸던 발해.jpg [새창]
2018/02/18 20:07:45
2. 담로는 군현과 같은 백제의 행정체계이지, 제후국도 아니고, 제후국에 설치한 기관 같은 것도 아닙니다. 양서(梁書)를 보면 號所治城曰固麻,謂邑曰簷魯,如中國之言郡縣也。라고 하여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에서 말하는 군현과 같은 말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는 글은 있지만, 담로를 왜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즉, 백제 내에서 왕족을 보내 왕실에서 직접 통치한 행정구역 내지는 봉건적 영지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비슷한 것으로서 미야케 (みやけ, 屯倉, 둔창)이라는 것이 일본에 있습니다만, 이 역시 왕실에서 직접통치하는 영지, 또는 그 창고를 뜻하는데, 오히려 이런 미야케의 경우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 백제, 신라 등에 설치하였다고 기록이 있습니다.
담로와 동일한 논리로 따라가면 역으로 백제가 왜의 제후국이 됩니다 (임나일본부설). 게다가 담로와는 달리 미야케는 (신뢰성은 없지만) 기록은 확실하게 있으므로 담로를 설치한 제후국 관리는 임나일본부설 보다도 빈약한 근거일 뿐이며, 담로설을 주장하시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의 논리만 강화할 뿐입니다.
160 2018-02-26 17:26:39 1
일반인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거느렸던 발해.jpg [새창]
2018/02/18 20:07:45
백나무//....어디부터 이야기를 이끌어가야할지 모르겠네요. 약간 글이 중구난방이 되어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먼저 남제서 백제전에는 모대 (백제 동성왕)가 험윤 (북위)이 공격하여 처부쉈으며 이에 관직을 제수해 달라는 표문을 올린 내용 뿐이고, 제후국을 다스린 기록은 없습니다.
혹시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 광양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등을 임명한 것을 두고 중국 지방을 제후로 거느리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라면, 왜5왕 중 마지막 무(武, 왜 21대 유랴쿠 덴노 (雄略天皇, 웅략천황)로 추정)가 송나라에 제수한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중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 받았으므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마한을 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게다가 동성왕 당시 백제는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이 죽은지 10년이 될까말까한 시점이였는데 이 때 갑자기 중국을 점령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남제서 백제전은 동성왕의 뻥튀기 내지는 백제 용병이 남제에 일부 동원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며 (이도학 교수 학설) 백제가 제후국을 다스린 근거로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159 2018-02-23 19:04:58 54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있는 한자 혼용 문제 [새창]
2018/02/23 12:18:13
역사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역사서 볼때마다 내가 한자를 좀 더 알았다면 하고 머리 쥐어 뜯으면서 네이버사전 뒤지면서 한문해독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일상생활에 굳이 한자병기는 필요 없다고 봅니다. 한자를 병기함으로써 생기는 번거로움이 뜻 전달의 편리함보다 더 크거든요

그 번거로움이 쌓이고 쌓이면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심지어 중국 근대화 시기에 루쉰은 한자불멸 중국필멸이라고까지 하며 한자를 없애 문맹률을 낮추려고 했습니다. 베트남도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향과 함께 문맹률을 줄이기 위해 한자를 버렸죠

한자를 아는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걸 일상에서 굳이 써야하는가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158 2018-02-23 11:42:24 4
일반인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거느렸던 발해.jpg [새창]
2018/02/18 20:07:45
그리고 전라도 지역의 전방후원분은 개인적으로는 왜의 용병들이 마한을 치는데 동원된 후 백제의 영토가 된 마한땅의 일부를 용병들에게 정착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라고 봅니다만, 역시 증거가 부족합니다.
용병의 정착 증거인지, 왜에서 이주민이 와서 정착한 정착촌인지 알 수가 없죠.

그와는 별도로 왜가 그 당시 백제의 제후였는지도 증거가 부족합니다. 유일한 증거는 칠지도 명문인데, 하사 시기에 대해 논란이 많아서 저 전방후원분 설치 당시에도 '제후국'으로서 존재했는지, 아니면 '동맹' 수준의 대등한 관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삼국사기에는 以太子腆支爲質 (아신왕 6년), 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의자왕 20년) 등 전지왕, 풍왕 (의자왕 둘째) 등 왕자를 質(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왜곡 많은 일본서기에는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그저 내조하였다는 표현 뿐입니다. 결국 서로 상충되는 기록들이 혼재되어있어 명확한 관계를 알기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초기 백제와 왜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근초고왕 시대에는 제후국으로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보나, 왜에게 많이 의존하기 시작하는 아신왕 시기부터는 동맹 수준으로 대등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지 않았나 봅니다. 왜의 땅을 밟았던 백제왕을 지금 생각나는대로만 읇어봐도 아신왕, 전지왕, 무령왕, 풍왕인데 그정도로 왜에서 왜의 문화 속에서 자란 왕들이 왜를 하대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왜를 백제의 제후국이라고 하는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제후국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근거없이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좋지않은 자세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157 2018-02-23 11:09:47 5
일반인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거느렸던 발해.jpg [새창]
2018/02/18 20:07:45
일단 글의 논점부터 논의하자면, 상기 유적이 발해의 '영토'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행정력이 미쳐서 조세권, 징병권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지역이라야 합니다. 미국에 아무리 중국인들이 많이 가서 차이나타운을 많이 세우고 중국 문화에 맞춰서 생활을 한다고 해도 거기를 중국의 영토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국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트로이츠코예 유적의 경우 발해의 행정력이 미친 곳이라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부족하기 때문에, '진출'이라고는 칭할 수 있어도 '점령한 영토'라고는 칭할 수 없다는 논지입니다. 설사 군사가 거기 군대를 주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말갈부족 등과의 연계로 진출한 것인지 점령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죠. 그 말갈 부족을 간접지배하는 방식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발해의 영토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굳이 칭하자면 영향권 정도겠죠. 물론 그나마도 다른 유적 없이 저거 하나 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더 많은 유적 발굴이 필요한 상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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