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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0 11: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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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법은 영어 표기법이 아니다
로마자 표기법은 내외국인 모두에게 통일적인 표준을 제시하는 규범이고, 따라서 외국인이 얼마나 원어 발음에 가깝게 읽을 수 있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영어를 쓰는 사람이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예를 들어 강남을 'Gangnam'이라고 쓰면 영어를 쓰는 사람은 내지는 '갱냄'이라고 읽을테니 이는 잘못된 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언어와 문자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실수이다.
2000년대 초반 김대중 정부하에서 새로운 로마자 표기법이 나오자 월간조선(당시 편집장 조갑제)이 이를 깠다. 거북선의 표기인 'Geobukseon'이 (영어 사용자에게) '지오벅션'으로 읽힌대나. 이를 가지고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또 "이는 국제화 시대에 뒤쳐지는 시대착오적 표기"라고 주장. 위에서 말했지만 이것은 영어와 로마자를 혼동하였기 때문에 나온 잘못된 주장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에스파냐어 알파벳 'j'는 영어 알파벳 'j'와는 달리 우리말의 'ㅎ'와 비슷한 소리[3]를 낸다. 따라서 에스파냐 사람의 이름인 Juan은 '후안'에 가깝게 발음한다. 영어를 쓰고 에스파냐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 이름을 '유앤'이나 '주앤'이라고 읽겠지만, 이것은 이 사람이 잘못 읽은 것이지 에스파냐어 표기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어 화자가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잘못 읽는다고 해서 로마자 표기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스파냐어는 로마자가 주 문자이니 괜찮고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고 따지는데, 한국어를 한글로만 적으라는 법이 있던가? 그리고 한국어를 한글이 아니라 로마자로 표기했다고 해서 한국어가 아니라면 어떤 언어인가?) 실제로 중국어 병음은 아예 c, q, x 등을 영어와는 전혀 딴판으로 쓰고 있고, 중국은 이미 이러한 표기를 정착시켰다. 병음 qing은 '칭'에 가깝게 발음되는데, 병음에 대한 지식 없이 qing이라는 표기를 처음 보는 사람은 qing을 보고 '킹'에 가깝게 발음하겠지만, 이는 그 사람이 잘못 발음한 것이지 qing이라는 표기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예에서 보이듯이 어떤 표기법도 선행 학습을 거치지 않고서 바로 정확한 발음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표기법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발음을 유도할 수는 있겠지만 완벽한 발음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영어의 표기법을 따라서 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영어는 문자와 실제 발음 사이의 괴리가 매우 큰 언어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은 곤란하다.
심지어 영어권 화자가 만든 매큔-라이샤워 표기법(한국어)과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일본어)조차도 완벽히 영어의 표기법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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