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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혼자서 이사가기
게시물ID : panic_891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2222
추천 : 24
조회수 : 1772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6/07/12 15: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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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오빠 말이 그렇잖아. 어느 정도 말 비슷해야 말로 알아듣지. 무작정 우기면서 이해해달라는게 말이 된다 생각해? 아니. 생각을 하긴 했어? 가족들 생각은 하고 하는 말이야?”

철수는 아내의 눈에 차오른 눈물을 보며 변명을 삼켜 버렸다. 생각을 내가 하긴 했던가. 생각을 하긴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 때 부터 늘 이어온 우리 집안 남자들의 좌우명. “가슴 떨리는 일을 하라.” 그 좌우명을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굳이 생각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철수의 계획은 우주 여객 터미널의 천만 여행객중 철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일이었다. 워프 게이트를 타면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등 여객선을 타고 30만 광년 돌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지구에서 만든 책은 우주 진드기의 숙주가 되므로 반입이 금지됩니다. 전자책으로 바꿔서 가져가십시오.” 검역관의 말을 들었을 때 철수는 고민없이 재래식 여행을 결심했다. 오천 권의 책. 책이 사람을 만든다. 그 책이 철수도 만들었다. 저 책을 폐기하고 이사를 간다면, 그곳에 이사해 살아가는 사람이 철수가 될 수는 없다. 철수 비슷하지만 더이상 철수는 아니다. 인생을 버린 낯선 사람이다. 장서를 어루만지며 결심을 굳혔다. 책은 반드시 종이책이어야 한다. 

“미미야. 오빠는 도저히 안되겠어. 애들 데리고 워프존으로 가. 나는 라오스에 가서 우등 여객을 타고 따라 갈께. 금방이야. 군대갔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니? 3년이면 도착할거야.” 가슴 떨리는 말이었다. 원망에 찬 미미의 눈길이 체념의 눈길로 바꼈다.


연체 외계인들과 처음 접촉했을 때, 그들의 지능이 높을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복잡한 사고체계를 이어가는 뇌는 견고한 뼈로 보호되어 있어야 한다. 흐느적거리는 연체 외계인들의 교활한 뇌가 탐욕으로 가득차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열개의 손으로 우주선을 조작하며 목표한 우주선에 달라붙어 해적질을 했다.

연체 외계인은 소행성이 가득 들어차 고속버스가 속도를 줄여 가는 길목을 잠복하고 있었다. 모험심으로 가득한 그들은 창조적인 운전 솜씨로  사각지대로 살금 다가간 후 빨판으로 달라 붙었다. 

여객선의 짐들은 소박했다. 워프존으로 옮길 수 없는 특이한 짐들이었다. 결국은 우주 쓰레기가 될 것이고,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은 드물었다. 여행객은 가치가 있었다. 인질로서 고가에 거래할 수 있었고, 팔고 남은 여행객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연체 우주인들의 해적질은 악명을 떨쳤고, 고속버스들은 점점 더 반달같은 우회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행이 삼 년차에 들어섰을 때, 장서를 세 번째 돌려 읽었다. 어떤 책은 열 번 읽었고, 어떤 책은 손도 대지 않았지만 평균을 낸다면 그러고도 남는다. 읽지 않은 책은 이사한 행성에서도 읽지 않을 것이다. 장서라는 것은 읽지 않을 때 가치가 드높다. 30만 광년을 재래식으로 배송한 책이 읽히지도 않고 책장에 꽂혀 있다면 얼마나 장관일까. 철수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랬다. 

철수는 읽을만한 책들은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읽으며 씹어댄 와사비향 포테이토칩 튜브가 다 떨어졌을 즈음에는 진력이 나 한 줄도 더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들에게 새로운 가훈을 물려줄 것이란 생각도 했다. “삼 년이 지나도록 가슴 떨리는 일은 없다. 그러나 원하는 일은 심장이 멈출 때 까지 해야한다.” 개똥철학 같았지만, 지난 3년은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가족들도 결국은 이해할 것이다. 5천 권의 장서중 가족말 듣고 꿈을 포기하라고 한 책이 있었던가.

좌석을 쭈욱 펴고 몸을 뻗자 뒷자리의 외계인이 하리오하리오 소리를 꽥꽥 질렀다. 젤리처럼 생긴 얼굴에 입도 없어 어디로 소리를 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삼 년간 묻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일년에 한번은 괜찮지 않나요.” 철수는 짜증스레 뒤돌아 보며 말했다. 가끔 앞좌석을 발로 쿵쿵 차던 이 녀석과도 이제 곧 작별이다. 외계인의 얼굴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반투명한 낯빛이 버스 뒷창이 비칠만큼 투명해졌다. 철수는 외계인의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해적이다,”
해적은 버스 앞문을 열고 밀려 들어왔다. 운전석을 장악한 그들은 투표 개표기처럼 사무적인 빠른 솜씨로 승객들을 분류했다. 돈 많을 거 같은 놈. 맛있을 거 같은 놈. 돈 많을 거 같은 외계인은 해적선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도저도 아닌 놈들은 광선총으로 갈겨 버렸다. 먹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철수는 당연히 맛있을 거 같은 놈으로 분류되었다. 

“인간들의 살은 담백하고 뼈는 꼬득꼬득하단 말이야.” 연체 외계인의 두목이 말했다. 철수 정도면 연체 외계인들의 일류 레스토랑 코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철수는 신발에 달라 붙어 끈적거리는 젤리 외계인의 사체를 떼어내며 질질 끌려갔다. 

“손에 든 건 다 버리고 옷은 벗도록 해.” 해적들이 삭막하게 말했다. 해적 두목은 입맛을 다시며 철수를 바라봤다.” 손에 든게 뭐지? 처음 보는데?”

다음 순간 연체 우주인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몰려 나갔다. 초음파의 고성으로 먹먹해진 고막이 되살아나자 그 말을 되씹었다. 삼 년 만에 들은 그리운 단어. “우주 진드기.” 철수는 저도 모르고 연체 외계인 두목의 발을 밟고 있었다. 밟히지 않은 9개의 발이 바르르 떨리다가 이내 축 처졌다.


철수는 가족이 마중을 안나오진 않았을까 생각하며 고속버스 터미널에 들어섰다. 충분히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은 버스가 도착하기 2주 전쯤 떠올렸다. 때마침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다 무언가 깨달았던 것이다. 쿵광거리는 심장이  가슴 뛰는 일은 무엇인가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중학생은 되었음직한 애들을 데리고 있는 저 사람이 아내일까. 그녀의 눈빛은 화를 내다 지쳐 증오가 원망으로 바뀌고, 원망이 자포자기로 바뀐 다음, 자포자기가 그래도 애들 아빤데로 바뀐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마중 따윈 생각치도 않았을 것이다.

철수의 입이 간신히 떨어졌다.

“미미야. 오빠가… 문어 삶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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