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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삽니다.
게시물ID : economy_132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백살이다
추천 : 25
조회수 : 1683회
댓글수 : 46개
등록시간 : 2015/07/01 14:33:23
네 그리스에 살고 있습니다.
작년 2월에 여기에 왔으니 일년하고도 한  5개월이 다 되어가네요.

처음 그리스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거기 요즘 힘들다던데 가도 괜찮겠냐'
였습니다.
오퍼받았던 급여의 액수가 한국에서 비슷한 경력으로 얻을 수 있는 급여를 꽤 웃돌았고
유럽연합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계약기간동안 안정성도 있다고 판단하고 주저없이 넘어왔습니다.

처음 그리스에 와서 받은 인상은,
밖에선 나라가 곧 망하네 마네 하는데 정작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놀거 다 놀고 먹을거 다 먹으면서 즐겁게 지낸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주변에서 손꼽을 정도로 느긋하고 게으르게 일하던 제가
이곳에 오니 하루아침에 모든 일을 눈깜짝 새에 하는 능력자가 되어 보스의 인정을 한몸에 받으면서
남유럽 사람들이 대체로 게으르다는 편견까지 덧입혀져, 세상물정 모르는 낙관주의자 정도로 바라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기를 몇 개월, 그리스 생활에 조금 익숙해지고 이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생각하는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몇몇 보도에서 나오듯 그리스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 못지않게 길게 일합니다.
대부분의 상점과 공기관들은 아침 여덟시 혹은 그보다 일찍 문을 열어 오후 세시까지 점심시간이 없이 일합니다.
월, 수, 토요일은 그렇게 문을 닫지만, 화, 목, 금요일은 이르면 다섯시, 늦어도 여섯시엔 다시 문을 열어 아홉시까지 다시 일합니다.
일요일은 커피숍과 중심가의 식당을 제외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습니다만,
빵집을 제외하고는 매일 아홉시는 넘어야 모든 가게가 문을 열기 시작하고,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하는 다른 중북부의 유럽 나라들에 비해선 노동시간이 꽤 깁니다.
물론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 밤 아홉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추가 근로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는 한국인에 비해선 새발의 피겠지만요.

그치만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오늘 보니 크루그먼도 그런 취지의 말을 했더군요)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노동시간이 긴 만큼 그리스인들은 게으르지 않다'라는 명제는 어떤 측면에서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의 노동자들은 긴 근로시간에 비해 노동효율성이 매우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사람들은,
업무의 순서에 있어 내 앞에 있는 손님 혹은 민원인보다 나에게 전화해준 친구와 가족과 통화하는 것이 우선이고
공기관이든 민간회사든 할 것 없이 아는 사람이 있으면 모든 대기자를 제치고 프리패스로 일처리를 할 수 있습니다.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공공질서도 엉망이라 무턱대고 인파를 헤치고 새치기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어떤 그리스인은 줄서있는 저에게 '앞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으면 너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한다'며 조언해준 일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 국회의원의 말대로 이런 그리스인들의 생활태도는 복지 때문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선 제레드 다이아몬드 석학께서 폴리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에서 하셨던 것 처럼 인류학적, 역사적, 진화론적인 관점을 통합한 연구가 필요하겠죠.
쉽게 말해 그냥 이 사람들은 이런겁니다.
간혹 한국처럼 치열하고 꼼꼼한 나라에서 익숙해진 저란 사람은 화도 나도 답답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 권리도 자유도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 하고 강요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비록, 많은 돈을 빌려준 IMF와 유럽연합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현재 그리스의 국민들은 대부분 실업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당장 제가 일하고 있는 대학교만해도 30대에 육박한 학생들이 버글버글합니다.
그리스의 교육비는 대학교는 물론 모든 대학원과정도 전액 무료인지라 (심지어 교재도 제공합니다.)
학교를 나가 일할 곳이 없는 젊은이들이 돈이 들지 않는 학교에 늦게까지 묶여있는 겁니다.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 그리스에선 모든 것이 거의 반값이라, 생활비가 절감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내집 한채 가지고 이 일 저 일 하면서 살던 사람들도 몇년 사이에 치솟은 세금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에 허덕이고 있구요.

이렇게 아들 딸은 실업자에, 손자 손녀는 아직도 학생인 가정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퇴직 연금과 실업연금이 가계수입의 전부라고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IMF의 연금 추가삭감안은 그리스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간혹 '남의 돈 빌려 썼으면 갚던가 못갚으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지 말이 많다'는 소시를 심심치않게 듣는데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외환위기 시절에 채권자인 IMF의 모든 요구를 성실히 이행하고 국민들의 고혈을 쥐어짜 결국 (겉보기에) 극복한 것에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때와는 역시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애초에 구제금융을 받게 된 상황은 그리스인들이 스스로 만든 일이 맞습니다.
오랜기간 지속된 2정당 독재정부는 선거를 통한 독재를 지속하고자 공수표를 남발하며 없는 기관을 만들어가면서 지지자들을 모두 공무원으로 채용하며
수십년에 걸쳐 부패한 정부를 방치해왔고,
그리스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기간산업인 농업과 관광산업에는 투자하지 않은 채
100주년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무계획적으로 유로존에 가입하는 한편 막대한 빚을 끌어와 국가부채를 가속화 시켰습니다.
친구들에게 듣기론, 당시에 유로존에 가입하며 무리하게 화폐개혁을 하는 와중에 물가가 3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십시오. 어제까지만해도 천원하던 김밥이 하루아침에 삼천원이 되는 아비규환을요.

지금 그리스국민들이 뱅크런 사태를 일으킨 주요한 원인은 이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거의 유일한 안정수입원인 연금 감축에 대한 불안감.
2. 유로존 탈퇴에 따른 급격한 물가변동에 대한 불안감.
이러한 국민들의 불안함에 치프라스와 시리자 내각은 국민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명확하게 대답하는 대신
협상상대를 비난하고 자극적인 언어의 사용으로 국민들에게 반외세 감정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전 주변에서 알아주는 빨갱이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 시리자와 치프라스는 무능한 좌파의 포퓰리즘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구제금융 협상과 관련해 그리스인들은 서로 이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 전 까지만해도 치프라스의 그리스 정부와 유럽연합 및 유럽중앙은행이 서로 의견차이를 줄여가며 합의안에 도출할 것으로 보이던 분위기가
IMF의 난데없는 무리한 요구에 파토가 나자 모두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음은 공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치프라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한편, 어떤 사람들은 IMF와 유럽연합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가올 국민투표의 결과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안개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국민투표의 결과가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그리스는 더욱 안좋은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최근의 외신과 그 외신을 베껴쓰는 국내언론의 수박 겉핥기식 분석을 보고있자니 답답한 마음에 굉장히 두서없는 글을 싸지르고야 말았습니다.
혹시 추가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혹시 모르면 주변에 물어봐서) 답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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