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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시야의 가장자리
게시물ID : panic_139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6
조회수 : 235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4/13 11:10:12
"수술부위에 약간 문제가 생겼군요" 안과의사는 안과현미경으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현미경에서 레이져광선 같은 것이 쏘여져 나와서 눈이 따끔따끔했다. 눈에 핏발이 서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 맷힌 후에야 의사는 광선을 껐다. 비로소 눈에 긴장이 풀리며 검사실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이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검사실이 180도 각도로 빙 둘러싸이듯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치 카메라를 돌려가며 찍은 후 일렬로 이어놓은 백두산 천지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달 전 방학 때 했던 라식수술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문제라뇨..구체적으로 어떤..?" "큰 문제는 아닙니다, 우선 수술자체는 성공적입니다. 시력회복도 평균수준 이상이구요. 라식수술이란게 본래 비정상적으로 두꺼워진 수정체를 깍아내어서 오목렌즈의 효과를 내도록 교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분의 경우에는 유전적인 특질 때문인지 수정체 자체가 이중으로 되어있더군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뭐라 말씀드리기 어려운데..어쨋든 결국 이중의 수정체가 이중으로 오목렌즈구실을 하며 굴절되어서 보통사람보다 시야가 약 2배정도 넓어진 것입니다. 보통사람의 경우 한쪽 안구당 45도, 양쪽 합쳐서 90도 정도가 가시범위입니다. 이 이상은 사각지대죠. 그런데 환자분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에..시야가 180도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어안렌즈와 같다고도 할 수 있죠" "재수술을 받으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수술 이후로 귀 뿐만 아니라 허깨비 같은 것이 항상 눈 주위를 맴돌아서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단 깎아 낸 수정체를 다시 붙이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오히려 환자분의 경우는 더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이 보지 못하는 범위까지 관찰할 수 있으니 불시에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도 훨씬 줄어들겠죠?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것도 빠를 테구요. 아, 또 한가지, 길에 떨어진 동전을 주을 확률도 높아지겠군요. 제 개인적은 소견으로는 이 상태로 살아가시는 것이 더 나을 듯 싶습니다." 의사의 말대로 그냥 적응해서 살다보니 눈가에 허상들이 걸러직 거리는 사소한 불편함들은 익숙해졌다. 항상 안경을 쓰고살다 보면 안경테가 신경쓰이지 않듯이 오히려 그런 단점보다는 의사가 말한대로 장점이 더 많았다. "야..방금 전에 내 옆에 지나간 년 봤냐? 다리 작살이더라" 나는 친구 원형이랑 대학로 거리를 걸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길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를 슬쩍 스쳐지나가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오래도록 뽀얀 허벅지살을 감상할 수 있었다. "뭐? 안보이는데? 어딧어?" 시야가 좁은 친구녀석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내 뒤쪽으로 30도각도로 조오기..걸어가잖아..하늘색 스커트..머리 빨갛게 염색한 여자말야..안보여?" "야야 벌써 갔나부다." 이런 것 뿐만 아니라 모의고사 때는 고개를 기웃거리지 않고도 옆자리에 앉은 모범생녀석의 답안을 베껴쓸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올해 수능에서 우등생 옆에 자리만 잘 잡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에 입시에 실패한 직후 라식수술만 해주면 공부에만 전념해서 꼭 좋은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엄마를 졸랐던 것이 이런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 줄 줄은 미쳐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내 시야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확실하게 느껴진 것은 의사를 찾아간 뒤로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부모님들은 결혼 20주년을 맞아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도여행을 떠나셨고, 집에는 나만 혼자 남아있게 되었다. 엄마는 토요일날 떠나서 제주도로 가셨다가 일요일날 새벽에 오신다고 했다. 나는 오실 때 기념품으로 제주돌하루방을 하나만 사다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남자지만 나는 특이하게도 어릴 때 부터 인형수집이 취미였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엄마는 꼭 사다줄테니 도둑 안 들게 집이나 잘 보라고 하시고는 10만원을 선뜻 주시고 집을 떠나셨다. 앞으로 2박 3일 동안 이 넓은 집에 혼자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자유로와서 좋았고 다른 한편으론 왠지 불안하기도 했다. 모기업에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일을 하는 아빠의 사업이 성공한 덕택에 우리집은 제법 잘 사는 축에 속해서 강남에서도 80평이 넘는 실평수에 지하실이 딸린 정원까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사업이 망해서 빚쟁이들에게 쫒겨다니던 때도 있었지만 그 후 아빠는 재기에 성공해서 지금은 오히려 그 전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단독주택이라 아파트에 비해 혼자 있기에는 너무 넓고 적막했다. 나는 밤중에 혼자 있는 적적함을 날려버리고자 안방의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물론 엄마가 주고 간 돈으로 중국집에서 얼마든지 시켜먹을 수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그 돈은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여름옷을 살 때 쓸 생각이었다. 나는 시야확장덕분에 라면을 먹으면서도 곁눈질로 안방의 반쯤 열어놓은 문을 통해 텔레비전 연예프로를 감상할 수 있었다. 요즘 한창 인기있는 4인조 여성댄스그룹이 가슴이 다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고 나와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누가 밤을 무섭다고 했는가? 내가 잠든 동안에도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케이블 TV는 밤새도록 방송을 내 보낼 것이고 공장에서는 누군가가 기계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잠든 동안에도 다른 누군가는 깨어있다는 것, 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인가. 6살 때의 일로 기억되는데 당시 나는 밤에 정원에서 혼자 축구공을 차고 놀고 있었다. 당시는 우리집 형편이 어려워 집마저 차압당할 위기에 있었던 때였다. 집달리-그때는 그런 용어조차 몰랐지만-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서 집안을 어지럽히곤 했다. 어린 나로서도 이 집만은 남에게 넘어가는 것이 싫었다. 나는 밤마다 혼자 축구를 할 수 있는 넓은 정원이 마음에 들었다. 저녁을 먹기 직전 나는 평소처럼 정원의 벽돌 벽에다가 공을 차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차 하는 사이에 빗맞은 공이 계단 및의 지하실로 튀어 들어갔다. 한때 보일러실이었지만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정원은 거실에서 새어나오는 조명이 있어서 밝았지만 지하실은 전등도 없는 완전한 어둠 그 자체였다. 입구의 모양을 따라 네모나게 노란색 불빛이 오려낸 듯이 침투한 빛의 영역 저 너머는 먹물로 칠해 놓은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움 뿐이었다. 계단을 튀어 내려간 공은 빛의 영역을 넘어 어두움의 영역 속으로 굴러갔다. 통토르르르 하는 소리가 잦아든 위치는 지하실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두어 발자국만 들어가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어린 나는 겁을 먹고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거실베란다를 쳐다보았다. 텔레비전 연속극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엄마 아빠가 간헐적으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 유리문 틈으로 고기를 굽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어쩌면 이 집에서 쫓겨나기 전에 먹어보는 마지막 고기일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밝고 행복한 가족의 평범한 저녁시간이었다. 내가 소리만 지르면 단숨에 달려올 든든한 엄마 아빠가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굳이 이런 하찮은 일로 2층까지 올라갔다오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단지 두발자국만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축구공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사실 저 어두운 지하실도 낮에 보면 먼지가 뽀얗게 쌓인 항아리들이나 들어차 있던 평범한 곳 아니던가? 단 두어걸음이면 되는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서 어두움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빛의 세계가 사라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2평 남짓한 지하실 공간이 무한처럼 넓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불쾌한 입김이 같은 것이 후욱 나의 안면으로 들어닥치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비오기 직전처럼 후텁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안에 무언가 체온과 습기를 내뿜는 것이 있어서 작은 먼지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바닥을 쓸어보았지만 내 팔이 그리는 원 안에 둥그런 물체는 만져지지 않았다. 한 걸음만 더.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떨리는 발걸음을 다시 내밀었다. 아직 등뒤에 네모난 빛의 영역이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멀리서 가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 나는 빛의 영역과 터무니없이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금방이라도 등 뒤의 지하실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닫힐 것만 같았고 그러면 나는 밤새도록 칠흑같은 어둠속에 혼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잠잘 때마다 안고자는 인형친구들을 생각했다. 어릴 때 겁이 많아서 혼자 잠을 자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인형을 많이 사주었다. 엄마는 인형을 선물해 줄 때마다 그 인형은 힘이 세어서 녀석하고 같이 있으면 밤에 귀신이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말해주었었다. 나의 인형들아..혹시 내가 위험해지면 네가 나를 도와주렴..나는 어금니뿌리가 시리도록 오줌이 마려운 것을 참으면서 바닥을 휘 휘 더듬어서 공을 찾았다. 탁, 나의 손에 무언가가 부딧혔다. 더듬어보니 둥그런 것이 만져졌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더듬다보니 한쪽이 움푹 파여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에 미지근한 액체가 찐덕 찐덕 고여있었다. 손을 좀 더 더듬어보니 움푹한 눈두덩이와 코가 만져졌다. 그것은 머리털이 다 뽑힌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는 듯한 느낌에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벌 떨리는 나의 손바닥에서 얼굴의 근육이 수축하며 빙그레 웃는 것이 느껴졌다. 까끌까끌한 수염의 감촉이 소름끼치게 전해져왔다. "안녕, 꼬마" 어느새 어두움에 익숙해진 나의 눈에 희미하게 비친 것은 이빨사이사이가 피로 범벅이 된채 씨익 웃고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사타구니가 뜨듯해 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 후의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지하실에서 나왔는지 비명소리를 듣고 부모님이 오셨는지 조차 전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항상 지하실에 쳐박혀 있던 낡은 축구공이었다. 나는 그 날이 이후 낮에도 혼자 지하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물론 사람의 머리통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 근처에 갈 때마다 그날 밤의 일이 몸서리쳐지게 떠올랐다. 축구공은 바람이 빠져서 한쪽이 움푹 꺼져 있었다. 아마 저부분을 만져보고 나는 사람의 머리통을 연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특유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버렸을 것이다. 주인을 잃은 축구공은 항상 그 자리에 쳐박혀 있다가 어느날 고물장수가 주워갔는지 사라져버렸다. 엄마는 내가 기가 허해서 헛것을 보았다고 쓰디쓴 한약을 3달 넘게 달여 먹이셨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차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그 후 우리집은 차차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집에서 쫓겨나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까지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어린 시절의 나의 공포체험담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어렸을 때 이야기고 지금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준성인이었다. 오히려 혼자 있으면 부모님 눈치를 보지 않고 음악도 크게 틀 수 있고, 문을 잠그지 않고 포르노사이트를 감상할 수도 있어서 더 좋았다. 정 심심하면 두시간이건 세시간이건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 되었다. 나는 덕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냄비바닥에 가라앉은 라면 찌거기를 건져먹었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를 내며 텔레비젼이 꺼졌다. 여자연예인의 수다로 시끄럽던 집안은 삽시간에 숨막히는 정적으로 뒤덮혔다. 떵그렁..라면 냄비에 내려놓는 숟가락 소리가 터무니없이 크게 들렸다. 왜 또 텔레비전이 저 지랄이람.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안방으로 걸어갔다. 그 때. 무엇인가가 나의 시야부근에서 머물다가 휙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 사람과 비슷해 보였지만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지..방금 그것은.. 분명히 방 안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검게 죽은 텔레비전 화면만 멍하니 들여다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약간 곡선 진 화면에는 안방입구에 서있는 내 모습이 머리랑 다리는 작고 배만 불뚝해 보이게 우스꽝스럽게 왜곡되어 보였다. 나는 스스로의 당황했던 모습이 멋쩍어서 씨익 웃어버렸다. 다음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추어서는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 내 뒤에 누군가 조용히 서있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비쳤던 것이다. 나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무엇'인가가 내 시야의 가장자리에 맴돌다가 휙- 하고 사라졌다.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자리에 있다가 내가 고개만 돌리면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았다. 좌우를 재빨리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그 '무엇'은 시야 가장자리에만 머물 뿐 쉽사리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릴 때의 악몽이 스멀 스멀 되살아나 꿀물처럼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찐덕찐덕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직도 '그것'은 눈동자속을 부유하는 먼지처럼 내 시야의 외곽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내가 오른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면 '그것'은 더욱 오른쪽으로 피했고 왼쪽으로 돌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수술의 부작용 때문일까. 지금 '그것'이 보이는 위치는 정상일 때의 나에게는 완전한 '사각지대'로서 전혀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각도였다. '그것'은 혹시 내가 어릴 때부터 항상 그 위치에서 따라다니다가 시야가 넓어진 지금에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신경과민일 뿐이다. 사실 요즘 모의 고사 점수가 떨어진 나는 하루에 17시간씩 공부에 매달리고 있었다. 4시간 30분의 취침을 빼면 밥먹는 시간마저도 책을 펼쳐들고 있었으니 신경과민이 된다고 한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시계는 막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평소 생활패턴대로라면 12시부터 1시까지는 수학공부를 해야했다. 그러나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가끔씩은 지나치게 긴장된 심신을 충분한 수면으로 풀어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 침대의 머리맡은 내가 어릴 적부터 수집한 수백가지 종류의 인형으로 가득했다. 직접 수집한 것, 외국에서 우편 주문한 것, 선물 받은 것, 인형뽑기 기계에서 뽑은 것 등 등. 시중에서 파는 왠만한 인형들은 모두 내 방에 넘쳐나고 있었다. 이 녀석들에게 파묻혀 있으면 이 녀석들이 모두 내편이 돼서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불대신에 인형들을 가득 덮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나는 요의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뜬 순간 빨간 두 개의 눈동자를 가진 '무엇'인가가 내 가슴팍에 엎드린 채 코앞에서 내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엉겹결에 그것을 손으로 쳐서 날려버렸다. 허연 그것은 무기력하게 공중으로 날려가더니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은 내가 모은 토끼인형중의 하나였다. 인형들을 이불 대신 덥고 잔 것을 순간적으로 깜빡했던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거실로 나가서 화장실로 나갔다. 안방에서 화장실로 이르는 중간에 커다란 거울이 걸려있었는데 그 앞으로 지나는 순간 왠지 서늘한 느낌이 엄습했다. 휙-하고 검게 스쳐지나가는 내 자신의 그림자가 아까의 공포를 되살려주었다. 어서 빨리 오줌을 누고 내 인형친구들 곁으로 돌아가는게 상책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화장실로 가서 벽을 더듬어 불을 켜고 변기 뚜껑을 열어젖혔다. 쪼르르르르르... 오줌줄기가 변기에 떨어지는 선명한 소리에 나는 비로소 정상세계로 돌아온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다음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나의 확장된 시야에 '본의 아니게' 포착된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그것'을!!! 거울과 대칭이 되는 '그것'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역시 '그것'은 나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사람의 형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겁에 질린 나는 오줌방울을 제대로 털지도 못하고 비틀 비틀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벽을 더듬어 거울 앞을 지나갔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막 거울을 지나쳐갔을 때.. "안녕, 꼬마" 내 등뒤의 거울 속에서 '그것'이 말을 걸었다 나는 가위에 눌린 듯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반쯤 돌리니 거울 속에 비친 '그것'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거실 자체가 어두워서 정확히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6살 때 이후로 놈의 '목소리'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다. 가래가 끓는듯한 목소리!야생동물같은 음험한 느낌을 간직한 약간 허스키한 음성이었다. "꼬마, 고개를 돌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들어. 나는..아니 '우리'는 너희 인간들과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다는 말은 아니야. 우리는 항상 너희들의 시야 바깥에만 존재하지. 너희 인간들이 이곳을 쳐다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들은 방금 전 그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우리는 존재할 수 없거든. 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으로 고개를 돌린다면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을 거야." "..언제부터 너는 내 주위에 있었던 거지?" 나는 말라붙은 듯한 성대를 쥐어짜며 간신히 말을 뱉었다. "우리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었어. 아니, 오히려 너희 인간들이 우리들과 함께 있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인간들이 볼 수 있는 시야의 범위는 약 90도, 전체의 4분의 1정도 밖에 안되니까. 나머지 4분의 3의 공간은 우리들의 차지란 말이야. 그러나 낮에는 우리들이 활동하기가 곤란해,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시선들 때문에 그 어떤 시선도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주로 사람들이 잠들어서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밤에 활동을 하지. 우리들도 너희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를 하곤 있지만 간혹 너처럼 시야 주변이나 거울을 통해서 우연히 우리를 보게되는 사람들이 있지. 그들은 우리들을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부르지." "헛소리! 그럼 너희들은 누가 관찰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그것은 허깨비야!" "천만에, 모르겠나? 우리들이 뒤를 돌아보면 너희들 역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뭐..라고?" "우리들과 너희들은 등이 서로 마주붙은 채 태어난 쌍둥이처럼 평생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각자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살아가. 우리는 서로 절묘한 타이밍으로 엇갈린 채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거야. 네가 돌아보면 내가 사라지고 내가 돌아보면 네가 사라지고. 가끔 책상위의 물건들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미묘하게 조금씩 위치가 틀려진 것을 깨달은 적이 있나? 우리들의 짓이지. 늦은 밤 혼자 공부하고 있는데 뒷통수가 근질근질 하다고? 바로 우리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어느날 네의 시야가 보통사람보다 이상하게 넓어지게 되면서 우리의 활동영역이 반으로 줄어들어 버렸어. 덕분에 본의아니게 너한테 살짝 우리의 모습을 들키게 되었다구" "그렇다면 너희들은 왜 우리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거지?" "왜냐구?..흐흐 우리들은 한때 너희들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귀신'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군. 죽은 사람은 산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간다..수많은 라디오 전파가 주파수에 따라서 같은 공간에도 얼마든지 공존하는 것처럼." 텅! 어둠속에서 둥근 물체가 날아와 나의 뒷통수에 부딪혔다. 통통통통... 그것은 어릴적 잃어버렸던 낡은 축구공이었다. 축구공은 데구르르 굴러서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축구공은 사라지고 없었다. 거울 속에도 이미 아무도 없었으나 나는 여전히 내 등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신경이 곤두서서 아무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어느 구석에나 녀석이 있는 것 같아서 집에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서 사람이 많은 곳만 골라 걸어다녔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녀석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좁힐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원형이와 자주 거닐던 대학로로 향했다. 거리 한구석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그리고 가서 사람들 틈바구니로 머리를 삐죽 내밀었다. 원형으로 둘러싼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는 기자인 듯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맨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닥의 보도블록은 빨간 물감같은 것이 얼룩져 있었다. " 이 곳이 바로 일주일전 신모양이 투신자살을 했던 곳입니다. 당시 신용카드값 2000만원을 갚지 못해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던 신양은 결국 돈을 구하지 못하고 이곳 건물에서 몸을 던져 부모와 이웃에게 커다란 충격을.." 나는 다른 기자들이 받아적고 있는 수첩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수첩 사이에 찡겨져있는 현장사진 속의 인물은 하늘 색 스커트에 쭉 뻗은 긴 다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얗게 탈색했던 그녀의 머리는 완전히 으깨어져서 피로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건물위를 바라보았다..아주 천천히..시야의 가장자리에서..7층 건물 꼭대기에.. 하늘색 스커트 차림의 그녀가 무표정하게 기자들의 무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갛게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내가 완전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녀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공포에 질린 나는 기독교용품점에 들어가서 엄마가 주고 가신 10만원을 털어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십자가를 사들였다. 그 중에서 무게가 10킬로는 족히 나갈 듯한 커다란 철제 십자가가 든든해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것을 책상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날 저녁, 나는 미친 듯이 공부에 열중했다. 벽에는 내가 산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덕지 덕지 걸려있었다. 집에 있는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버렸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거울 까지..이제 녀석의 소름끼치는 얼굴을보지 않아도 되었다. 녀석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고자 나는 수학문제풀이에 몰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부모님이 돌아오실 것이다. 그때까지만 꾹 참고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시계바늘이 12시를 가르켰을 때, 예의 그 음산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내 목덜미 뒤에서 들려왔다. "안녕, 꼬마 흐흐흐.." 나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목덜미로 놈의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나의 시야의 가장자리로 한쪽이 움푹 패인 놈의 번들번들한 대머리가 보였다. "너..아직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지? 자 꼬마야 상상해 봐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지.." "모..몰라..그 따위것 상관없어! 난 공부해야 한다구 썩 물러갔!" 나는 벽에 걸린 십자가들을 마구 떼어서 등 뒤로 집어던졌다. 이대로 혼자 있다간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호오 그런 것들을 마구 던지면 위험하지..뒤에 누가 있으면 어쩌려구 그래? 흐흐흐흐" 정말 녀석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렸을 적 어둠속에서나 어젯밤 어둠속에서 본 것은 다만 어렴풋한 형체였을 뿐이었다.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상상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나의 무의식속에 잠들어 있던 온갖 추악한 악마의 모습, 피범벅의 끔찍한 시체의 모습들이 뒤죽박죽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자..상상해라 상상해..나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혀가 길게 늘어지고 송곳니가 뾰족한 악마의 모습일까? 머리통이 박살나고 뇌가 튀어나온 시체의 모습일까? 크크크..나는 얼마든지 네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지. 왜냐면 우리의 모습은 인간들이 상상속으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투사된 것 뿐이니까 ..흐흐흐흐" "날 좀 그만 놔줘! 왜 나한테만 이렇게 못살게 구는거야?" 나는 감은 눈꺼풀 너머로 바로 앞에서 녀석이 어른거리는 것을 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 나의 상상 속에서 괴물의 모습은 점차 구체적이고 보다 끔찍한 것으로 변해갔다. 눈을 뜨면 그 괴물이 실제로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자...기억해봐 네가 날 처음 만났던 그날..네가 6살박이 꼬마였던 그때를..그때 너희집은 사업이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였지.."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이제 그만 꺼져!" "아..진정하고 잘 들어봐..누가 악마인지..그 때 나는 네 아빠에게 10억원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고 있었단다. 당시 10억은 나한테도 큰돈이었어. 네 아빠에게 받아내지 못하면 나도 똑같이 길바닥으로 나앉을 처지였단 말이야..나는 매일 네 아빠를 찾아가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결국 네가 나를 만났던 그 날, 네 아빠는 돈을 주겠다며 집으로 나를 불렀어. 그리고 돈가방을 숨겨두었다고 지하실로 나를 유인했지..하지만 지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돈이아니라 네 엄마의 쇠몽둥이였다..나는 네 엄마가 기습적으로 내려친 쇠몽둥이에 한쪽 두개골이 박살난 채 반나절을 지하실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네 부모들은 고기를 구워먹으며 잔치를 하더군.. 그 역겨운 고기냄새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나는 분해서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지..그때 갑자기 밖에서 공이 튀어들어오더니 곧 네가 따라 들어왔던거야..공은 내 몸으로 굴러들어왔어..나는 네게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거친 숨만 내뱉었지...겁에 질린 표정으로 들어와서 공을 찾던 너는 공 대신 내 머리를 만졌어..아..내 함몰된 부분을 어루만지던 그 고사리 같던 손을 아직도 기억해..꼭 그때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내 아들놈이 생각나더군..죽음을 예감한 나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보이며 네게 인사를 했지. '안녕 꼬마야'라고..흐하하 너는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말더군..그리고 윗층에서 달려온 네 부모는 아직 살아있던 나를 쇠몽둥이로 몇 번 더 때려서 완전히 죽인 후 야산에 묻어버렸지. 그 후 10억이란 채무가 없어진 네 아비는 다시 사업을 일으켜세울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죽지 않았다면 너는 아마 지금쯤 지하철에서 껌이나 팔면서 공부해야 했을거야 크크크 그 날 이후 나는 한시도 이 집안에서 떠나지 못하고 네 곁을 맴돌았다. 너희 집안에 대한 복수를 꿈꾸면서!!!" 삐걱..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놈이 뒤에서 나에게 접근했다. 저벅..저벅..저벅.. 내 목덜미에 느껴지는 놈의 체온! 까칠 까칠한 놈의 수염!! "으아아 거짓말이야 거짓말!!! 이 사탄! 악마! 물러가라!!!" 나는 책상 서랍속에 넣어두었던 커다란 철제십자가를 꺼내들고 눈을 감은 채 뒤돌아서서 사정없이 내리쳤다. 퍽! 퍽! 퍽! 퍽! 하고 둔탁하게 으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놈이 쿵! 하고 쓰러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희미한 피냄새가 역겹게 피어올랐다. 그제서야 나는 슬며시 눈을 뜨고 쓰러진 녀석의 정체를 확인하였다. 내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은 두개골이 함몰된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우리 엄마였다. 엄마의 한쪽 손에는 까칠까칠한 감촉의 제주 돌하루방이 들려있었다. 출처 : www.muzachi.com(영준님 개인홈피) 작가 : 안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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