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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아리마(ARIMA)의 방문
게시물ID : panic_149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1
조회수 : 20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5/03 09:49:51
- 역 학 미국통계에 의하면 전체인구에 대한 자살률은 100,000 : 10 -12이고, 이것은 전체인구에 대해서는 사인 요인 10위에 해당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40명 꼴로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 또한 통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남성의 자살률은 여성의 2배이며 자살을 시도했을 경우 그 성공률 또한 여성에 비해 3배가 높다. - 사람에 따라서는 자살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마는 이들이 있다. 정말 죽고 싶지만 흔히 말하는 '죽을 용기'가 없어서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이들의 수치가 의외로 상당하다. 그들이 그렇게 이어가는 삶이란 말할 것도 없이 우울하고 칙칙하기 그지없다. 생명을 포기하려 했던 비겁함이, 그 비겁함마저도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극도의 수치심으로 바뀌며 끔찍한 자기 실망과 학대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자살 실패 후의 원치 않는 삶이야말로 죽고싶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 된다. 그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자는 이해할 수 없으며, 경험한 자들이라면 매일 매일을 그저 시체처럼 살아가며 죽을 수도 없는 생을 이어갈 뿐이다. 아리마(ARIMA)는 그런 이들을 방문한다. 아리마는 죽고 싶으나 죽을 용기가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자살 집행자이다. 원하는 대로 죽여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단, 죽이는 방법은 아리마의 소관이다. 그는 죽으려는 자의 의도와 방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방법대로 상대를 죽인다. 아리마는 먼저 긴 손톱으로 상대의 얼굴을 파헤친 다음 그렇게 파헤쳐 진 얼굴과 뇌를 씹어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떠도는 소문일 뿐 정말 그렇게 죽이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설처럼 떠도는 것은 아리마에 의해 죽은 시체는 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리마는 절대 실수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인간의 나약하고 어설픈 용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아리마의 의지는 집요하고, 확실하다. 죽음을 원하지만 용기가 없어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아리마는 자신의 방식으로 완벽한 죽음을 선사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마가 언제쯤에 방문을 하는지, 또 생김새는 어떠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리마가 방문한 이는 어김없이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단, 당신이 만일 아리마와 조우하게 된다면 당신은 그가 아리마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리마가 당신을 방문하게 되면 당신은 그를 알아 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당신을 위해 아리마는 친절하게 자신을 소개할 것이다. "아, 리, 마!" 라고...... 젠장할...... 오늘 부로 남아 있던 전국 24개의 극장에서도 간판이 내려졌다. 남아 있는 곳은 이제 두 곳 뿐. 그것들도 내일까지일 것이다. 주말이면 나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전국적으로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정확히 개봉 일주일만에 완전 종영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든 관객 수는 전국적으로 6천 여명...... '뉴선시네마'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야심 만만하게 시작했던 나의 영화사는 5개월만에 깨끗한 파산을 맞이한 것이다. 첫 연출작으로 전국 관객 100만 명을 동원시키며 영화판에서 꽤나 총망 받는 신예 감독으로 부상했었던 나는 여러 메이져급 제작사에서 내미는 손길들을 거만스러운 미소로 거절하고 기어이 친구 녀석과 공동으로 신생 영화사를 차리고 말았다. 더 이상 제작자들의 눈치나 보면서 일하기엔 초등학생 자식까지 둔 내 나이가 너무 많았었고, 그보다도 내 대단한 능력이 그들에게만 떼돈을 벌어다 주는 것만 같아 싫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챙기는 꼴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제작과 투자, 감독을 모두 맡는다면 모든 이익은 극장주와 내가 반반으로 나누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작처럼 관객이 100만 명만 들어도 나에게 떨어지는 수익은 35억이나 된다. 게다가 나는 차기작으로 전작을 훨씬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해 낼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300만 정도는 가뿐히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에게 떨어지는 순이익은 실로 엄청난 것이 되고 만다. 나는 이 같은 멋들어진 이론을 친구녀석에게 피력했고, 과일장사만 15년을 해온 친구녀석은 나의 감언이설에 그만 혹해서 나와 손을 잡고 '뉴선시네마'라는 영화사를 차리기에 이르렀다. 친구는 자신의 전 재산 10억을 나에게 맡겼고, 난 나대로 은행들을 돌며 10억을 융자해 내었다. 내 차기작이자, 뉴선시네마 첫 번째 작품은 한국영화 최초로 좀비들과 인간의 처절한 싸움을 그린 공포영화였다. 난 분명 만들기만 만들면 이 영화가 메가 히트를 기록할 것임에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촬영을 속행했다. 그러나 20억이라는 자본을 바탕으로 한다지만 요즘의 영화판에서 그만한 돈은 푼돈이나 다름없었고, 제작비는 결국 초과되어 다시금 돈을 빌려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미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릴 수 는 없는 노릇이라 친구와 난 다시금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10억을 더 구했고, 가까스로 영화는 완성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홍보비였다. 순제작비로만 30억을 다 써버린 후라, 제대로 된 홍보를 할 수가 없었다. 친구나 나나 더 이상 돈이 나올 수 있는 구멍도 없었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개봉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너무도 처참한 참패였다. 서울 19개관, 지방 40개관이라는 꽤나 좋은 조건으로 전국 동시에 개봉된 나의 차기작은 그러나 개봉 첫 주말 서울 관객 1800명, 전국 관객 4000여명을 동원하는데 그치는 끔찍한 흥행성적을 내며 박스오피스 10위 권내에 들지도 못했다. 3일만에 반 수에 가까운 극장에서 간판을 내렸고, 5일만에 두 곳을 남기고 모두 간판을 내렸었다. 홍보의 힘이 없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의 평도 줄줄이 악평뿐이었으며, 영화를 본 소수의 관객반응조차도 냉담일색이었다. 한마디로 난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완전히 실패할 영화를 미친놈처럼 30억씩이나 투자해서 만들어 낸 것이었다. 나의 영화들이 모두 간판을 내리자 다음 날 뉴선시네마도 간판을 내려야 했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인생 막장의 처절함이 우리 삶을 지배해 버린 것이었다. 3일만에 우리집의 모든 것은 차압을 당하고, 이 주일 안에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나와 친구는 어쩔 수 없이 감옥행이 되어야만 했다. 내가 자살을 시도한 것이 바로 그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산다는 것은 오히려 죽은 것만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나보다 한 발 먼저 이것을 깨달은 친구 녀석은 한 발 먼저 저승길에 올랐다. 친구는 영화가 완전 참패를 했다는 말을 나에게 똑똑히 전해 듣고 뉴선 시네마가 간판을 내리던 날 밤에 목을 매었었다. 그의 선택을 처음에 나는 잠깐 비난했었다. 죽을 수밖에 없었냐고, 그렇게 모든 것을 나에게 다 떠넘기고 죽어야만 했냐고...... 하지만 결국 나는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유인 즉, 도저히 현실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파산을 맞고 빚쟁이들이 한 시간이 멀다하고 집으로 들이닥쳐 죽일 듯 윽박을 질러대자 난 간단히 짐을 싸들고 피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없으면 내가 받아야 할 갖가지 더러운 모욕과 수모들이 고스란히 아내와 어린 아들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난 밖으로 돌아다니며 어떡해서든 돈을 마련해야만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집에 있으면 당장에 광분한 빚쟁이들이나 자살한 친구의 가족들이 휘두르는 칼에 찔려 죽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난 변두리 여관으로 몸을 피한 후 백방으로 돈을 구할 길을 찾아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빚쟁이들에게 발각될 위기들만 맞이했었다. 마침내 난 자살을 결심했고, 그것이 가족들과, 내가 신세를 진 모든 이들과,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너무도 비겁하고 옹졸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해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먼저 친구처럼 목을 매어 죽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친구녀석의 용기에 탄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막상 매듭 진 나일론 줄 앞에 목을 매고 의자 위에 서자 도무지 그 다음 동작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죽고 싶다면 그저 발로 의자만 살짝 차 버리면 되는 것을 바로 그 간단한 동작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의자 위에 올라서고 목에 나일론 줄을 매었지만 항상 거기까지였다. 줄은 튼튼한지 몇 번을 더 살피고, 바닥과 천장과의 높이만 열 두 번도 더 재어보고, 하릴없이 의자의 모양새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쓸데없이 준비과정만 거창하고 지루했을 뿐이었다. 항상 그렇게 몇 시간을 망설이다가 결국엔 줄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는 괴성같은 욕지거리만 내 뱉으며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 날은 소주로 밤을 세워야만 했다. 그래서 아예 소주을 대량으로 마시고 음독 자살을 시도해 볼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병째 잘 마셔대던 소주조차도 막상 죽기 위해 마시려고 하니 한 병도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손목에 칼을 긋는 것도 생각에서만 그치고 말았다. 칼을 긋고 손목을 물에 담가야만 하는데, 일단 피를 보는 것조차 두려웠기에 칼날은 손목 살결의 작은 세포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으니까. 옥상에서 떨어져 죽으려고도 했으나 그것은 정말 가장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자살방법이었다. 7층 옥상에서의 휘청하는 아찔함이 일순간 전신을 마비시키자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와 오히려 살아야 겠다는 강한 의욕만 더 생길 뿐이었다. 물론 그런 의욕이야 돌아서 옥상을 내려올 때쯤이면 이미 흐물흐물 녹아 버리고 마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악순환의 반복인가? 죽으려고 안달을 하면서도 죽음의 시도 앞에서 번번이 꼬리를 내리며 그러고도 돌아서면 다시 죽지 못한 것에 후회하고, 괴로워하다니 말이다. 그리고는 다시 죽음의 기회를 엿보게 되니...... 이러한 악순환은 나를 점점 폐인으로 만들었다. 며칠 사이에 나는 완전한 괴물의 몰골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감옥행이 결정되어질 기한이 이틀 앞으로 바짝 다가올 무렵, 결국 난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도저히 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타인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분명 지금도 내 집 앞에는 나를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기다리고 있는 살기 등등한 인간들이 수두룩 할 것이었다. 특히 죽은 친구의 동생이라는 놈은 아예 날 죽일 기세로 버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놈의 눈은 완전히 실성한 사람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항상 품속에 수박을 썰 때 사용하는 커다란 과도를 가지고 다니는 놈이었다. 그 과도로 수박이 아닌 나의 머리를 썰어 버리는 게 놈의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놈이 목적을 이루게 해 주자. 난 어차피 죽기를 원하는 몸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으니 누군가가 대신 죽여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인 것이다.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끝낸 나는 마침내 이른 새벽 시간을 틈타 열흘동안 괴로움과 자학의 시간 속에서 보내야만 했던 초라한 여관방을 나서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의외로 집 주위는 조용했다. 시간은 이제 막 오전 6시를 넘어서고 있었던 지라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집 주위에 아무도 없을 줄은 몰랐다. 분명히 악독한 빚쟁이들이 밤을 세워가며 집 주위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라고 줄곧 생각해 왔었기 때문이다. 일단 잘 된 일이었다. 집으로 오자마자 절명하는 것 보단 그래도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들 녀석의 얼굴이나 보고 다시 한번 마음의 각오를 다진 다음에 죽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된다면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아침밥이라도 마지막으로 한 번 먹어 보고 싶었다. 난 집 주위의 화단가에 몸을 숨기고는 다시 한 번 집안을 살펴보았다. 조용한 것이 안에도 빚쟁이들은 없는 듯 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돌리자 문은 쉽게 열렸다. '이런 정신나간 사람같으니,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문을 잘 잠그고 자야 할 것 아냐!' 그 와중에서도 난 아내의 부주의한 문단속을 속으로 탓했다. 거실로 들어서자 뭔가 섬뜩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아 왔다. 내 집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무서운 기운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 벽엔 비정상적으로 큰 눈과 길다란 코를 뽐내는 피노키오 시계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거실은 비교적 깨끗이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다만 천장에 장식되어 있었던 고가(高價)의 샹데리어만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뜯어낸 것처럼 샹데리어가 걸려 있었던 부분의 면이 파손되고 금이 가 있어 천장은 허전하고 볼품이 없었다. '미친 새끼들...... 샹데리어는 왜 뜯어가고 지랄이야! 그게 얼마나 한다고......' 난 그것을 광분한 빚쟁이의 짓으로 생각했다. 거실 안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 딛으면서도 내 심장은 계속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사방에서 문이 열리며 칼을 든 빚쟁이들이 뛰쳐나와 내 사지를 절단 낼 것만 같은 두려움이 끊임없이 식은땀을 자아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난 두려움 속에서도 짧은 순간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그것은 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죽으려고 이 곳을 찾아 놓고도 또다시 죽는 것이 두려워 안절부절못하다니...... 너라는 놈은 도대체......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서서 집을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두렵고 괴로웠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도 뛰쳐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난 곧장 안방 문을 열었다. "여보, 나야...... 정호야...... 아빠야......"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는 안방은 컴컴했다. 나는 나직히 아내와 아들을 부르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나 침대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따스한 체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 아내와 아들이 도망을 갔단 말인가! 아니면 놈들이...... 난 비로소 조심성을 잃고 쿵쾅거리며 안방을 나갔다. 그리곤 소리내어 아내와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빚쟁이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기색이었다. "여보! 정호야! 어디있니?" 정호의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이어서 서재와 이층 객실의 문이 열렸다가 힘없이 닫혀졌다. 아내와 아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난 마지막으로 이 층 욕실 문을 열어 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그곳에도 차가운 냉기와 뚝, 뚝, 물소리만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졌다. 내가 집을 비운 열흘 동안 과연 집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인가? 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젠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쯤에서 난 또다시 죽음을 거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욕실문을 닫으려는 순간, 등뒤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다. 쿵쿵쿵...... 머리칼이 쭈뼛 섰고 새삼 솟아나는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의 눈은 욕실 문턱에 흩뿌려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몇 방울의 핏자국이었고, 그곳에 묻혀진지 꽤 오래 된 듯 그것은 이미 말라 있었다. 마른침을 천천히 삼키며 등뒤를 조심스레 돌아다보려는 순간,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렸다. 쿵쿠덕...... 소리가 나는 곳은 간이창고 였다. 아직까지 미처 살피지 못한 곳.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망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이렇게 슬며시 도망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아내와 자식도 사라져 버린 마당에 나 혼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더 이상 구차한 목숨 따윈 연명조차 하기 싫었다. 난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훔쳐내며 천천히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부스럭, 부스럭, 쿵쿵...... 안에서도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듯 했다. 난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몸을 어찌하지 못한 채, 창고의 문고리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문고리가 움직였다. 직감적으로 엄청난 공포와 조우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철커덕, 철커덕...... 마침내 문은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공포! 그녀는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난 그녀가 누군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리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어 나의 직감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 리, 마!" 그녀는 아리마였다. 아리마가 마침내 나를 방문한 것이었다. 난 지금껏 아리마에 대한 숱한 소문을 들어 왔으면서도 결코 믿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아리마는 분명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 왔었다. 하지만 아리마는 여자였다. 그리고 지금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리마의 눈에는 동자가 없었다. 흰자뿐이었다. 창백한 얼굴은 해골귀신을 연상시키고 있었고 하얀 머리카락은 늙은 노인네처럼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입과 눈에선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마귀할멈같이 길쭉한 손가락 끝에는 갈퀴같은 손톱이 붙어 있었다. 이것이 아리마의 모습이었다. 누구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는 아리마의 모습. '아뿔싸, 내 자살의 실패들은 결국 이렇게 종지부를 찍게 되는 구나! 결국 난 아리마를 기다리기 위해서 그렇게 죽음을 거부해 왔었단 말인가!' 그러나 아리마에게 죽기는 싫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끔찍한 공포가 나에게 본능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마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자살이 실패로 끝난 이는 반드시 죽이고 마는 아리마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히히히히~' 날카롭고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바람을 가르며 아리마의 양손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날카로운 손톱들이 뺨을 파고들 기세였다. 난 가까스로 머리를 뒤로 젖히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아리마의 날카로운 손톱 하나가 이미 나의 눈언저리를 찢어 놓은 후였다. 눈가에서 눈물같은 핏방울이 뚝뚝 흘러 내렸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난 계단을 굴러 내렸다. 잠깐 숨을 돌리며 뒤를 돌아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히히히히~" 아리마는 허공을 나르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환희에 찬 웃음과 함께 피를 흩날리며 양팔을 쭉 벌린 채, 2층에서 아래로 날아오는 아리마의 모습은 그대로 전율 그 자체였다. "으아악!" 난 정신없이 주방으로 달렸다. 뒤에서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날아오는 아리마의 기척이 아주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난 식탁의자를 집어들자마자 뒤로 힘껏 날렸다. 그것은 날아오던 아리마의 얼굴에 적중했고, 그녀가 잠깐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난 칼을 찾았다. 그러나 칼은 쉽게 보이지가 않았다. 다시금 아리마가 날카로운 손톱을 내 뻗으며 나에게 다가올 때, 내 손엔 극적으로 식칼이 쥐어졌고, 그것은 여지없이 아리마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쩔꺽! 대량의 피가 나의 얼굴과 주방의 벽과 바닥에 흩뿌려 졌다. 아리마의 모가지는 그녀의 몸통을 벗어나 거실바닥 위를 대굴대굴 굴렀다. 몸통은 그래도 끝까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머리가 달아난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듯 하더니 결국은 바닥위로 쓰러져 버렸다. 다시 한 번 검붉은 피를 쏟아 내면서. 그리고 잠시 정적이 집 전체를 지배했다. 난 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가 번지는 바닥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히히히히~" 다시금 끔찍한 아리마의 웃음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난 다시 기겁을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웃음소리는 거실에서 나고 있었다. 난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식칼을 움켜쥔 채, 거실로 나갔다. 놀랍게도 아리마의 잘려나간 머리는 아직도 빙글빙글 바닥 위를 맴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찢어진 입은 여전히 나를 보며 싸늘한 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이히히히히~" 순간, 난 아리마의 머리를 미친 듯이 짓밟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맨발로 밟다가 나중에는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를 신고 와서 딱딱한 구둣발로 짓밟아 댔다. 머리가 생고무처럼 흐물흐물 해 질 때까지 밟아 댔지만 그래도 아리마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는 내 귓전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웃음소리는 멎었고, 내 발길질도 끝났다. 아리마의 머리는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채, 거실 바닥에 무늬처럼 넓게 퍼져 있었다. 내가 힘없이 식칼을 떨어뜨리고 정신을 차릴 때 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빚쟁이들이었다. "이 자식 이제야 기어들어 왔구만!" "어디 숨어 자빠졌다 이제야 나타나 어? 괴물같은 몰골을 하고선......" "얼굴 보니 그래도 부인보단 낫네. 넌 오늘......" 봇물처럼 거실로 밀려들던 대 여섯명의 사내들은 비로소 말을 멈추고 집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난 그들을 위해 아무런 설명도 해주기 싫었고, 눈길조차 보내기 싫었다. 그저 아리마를 처단했던 저 식칼로 이제 나를 죽여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들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거실과 주방을 오갔으며, 결국 질린다는 표정으로 하나같이 나에게 시선을 모았다. 나도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그들을 마주 응시했다. "자네. 미쳤나?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을 저들이라도 쉽게 믿어질 수 있을까. "그래요. 내가 죽였어요. 날 죽이러 왔던 아리마를 말이요." 그러자 사내들은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 내렸다. "아리마?" "아리마가 뭐야?" "아리마라면 자살에 실패한 인간들을 죽인다는 그......" 그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주며 웅성거렸다. 난 그런 웅성거림에 종지부를 찍어 주겠다는 듯 소리높여 말했다. "그래요. 자살에 실패한 인간을 대신 죽여준다는 그 아리마 말이오. 믿을 수 없겠지만 내가 금방 그 아리마를 죽였소." 그러나 그래도 사내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봐, 자네 지금 제정신이 아니군. 아리마를 어떻게 죽이나?" "젠장할! 못 믿겠으면 여길 보란 말이오. 여기 거실바닥에 이렇게 납작하게 허물어져 있는 것이 아리마의 머리이고, 그리고 저기...... 저기 주방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아리마의 몸통이란 말이오. 알겠소? 저것이 바로......" 순간 나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방에 널브러져 있는 아리마의 몸통에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이 없자 사내들도 숨을 죽이며 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난 서서히 아리마의 몸통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갈퀴같은 같은 손가락을 치켜올려 보았다. 그 곳엔 눈에 익은 물건 하나가 있었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아내의 반지! 아리마는 바로 나였다. 내가 집을 나간 후 아내는 빚쟁이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고통에 시달렸었고,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녀는 샹데리에에 줄을 걸고 목을 매어 죽으려고도 했었고, 손목을 칼로 긋고 욕조에 담그기도 했었고,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창고 속에서 영원히 잠들기도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나처럼 죽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죽음을 회피해 왔던 그녀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아리마가 나타나주길 바래 왔었고, 열흘만에 집을 찾아온 남편을 아리마라고 착각했고 결국 그의 손에 그토록 바라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모습은 아내에게 아리마였던 것이다. 나는 나대로 열흘만에 나보다 더 괴물같은 몰골로 변해버린 아내를 아리마로 착각했던 것이다. 끊임없는 자살의 시도와 실패와 현실의 끔찍한 압박감으로 인해 나와 아내는 극도로 정신이 쇠약해 져 있었고, 조우의 순간 우리는 동시에 정신착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내가 머물던 창고에선 부패된 초등학생의 사체와 각종 약물들과 '아리마, 아리마......'로 가득 채워진 아내의 일기장이 발견되었었다. - 아리마(ARIMA)는 죽고 싶으나 죽을 용기가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자살 집행자이다. - 정설처럼 떠도는 것은 아리마에 의해 죽은 시체는 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 아리마는 절대 실수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 아리마는 자신의 방식으로 완벽한 죽음을 선사해 주는 것이다. - 당신이 만일 아리마와 조우하게 된다면 당신은 그가 아리마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리마가 당신을 방문하게 되면 당신은 그를 알아 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당신을 위해 아리마는 친절하게 자신을 소개할 것이다. "아, 리, 마!" 라고...... - end -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폭풍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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