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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천사와의 계약
게시물ID : panic_149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4
조회수 : 318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5/03 10:06:34
문득 철구는 지금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방안의 풍경, 널부러진 소주병의 위치, 오른손에 쥔 떨리는 면도날..이 모든 광경이 어디선가 이미 한번 보았던 것 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꿈속에서 보고 깨어나서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어디선가 이미 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의 필름을 한컷 잘라내서 핀셋으로 집어 뇌속에 삽입시킨듯한 이 느낌은 바로 기시감이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철구는 살아오면서 이런 신비로운 경험을 여러번 했다. 어쩌면 그런 경험은 철구 자신의 운명이 이렇게 끝장날 것이라고 정해진 것을 살짝 살짝 훔쳐본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아직 개봉되지 않은 영화의 예고편을 보듯이. 철구는 온쪽 손목에 면도칼을 가져다 대었다. 더운 김을 쐬어서 야들야들해진 손목엔 차마 한번에 긋지 못하고 주저한 여러 개의 얕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지금은 갈데까지 간 철구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강철구의 인생은 요컨데, 실패한 인생이었다. 나이 40이 되도록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작년에 사업이 실패한 후론 아내도 큰딸과 함께 도망갔다. 그나마 남은 둘째도 철구가 3달전 공사판 난간에서 떨어져 반신불수가 된 이후로 돈을 벌어오지 못하자 그를 아버지는 커녕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다. 요새는 어느 놈팽이들하고 어울리는지 3일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철구는 이번 학기 등록금을 대주지 못한 자책감에 딸을 마음껏 야단칠 면목도 없었다. 철구는 물끄러미 자신의 사타구니를 쳐다보았다. 딸이 돌보지 않은 3일동안 앉은 자리에서 싸고 뭉긴 배설물들이 그대로 떡져서 악취를 풍기며 팬티속에 뭉쳐져 있었다. 아아 이것은 똥간속의 굼벵이지 차마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씨이팔것. 철구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쓰윽 닦았다. 그리고 자살할 용기를 내기 위해 반 병 정도 남은 소주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뎅그렁..나동그라지는 빈 병을 바라보며 철구는 생각했다. 이제 잠시 후면 이 지긋 지긋하게 불운만 반복되어온 생도 끝날 것이다. 누군가 내 생을 다시 옛날로 돌려준다면 결코 이따위로 살지는 않을텐데.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으리라. 철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면도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헤이, 방금 그 말 진심이야?" 철구가 문득 정신을 차리자 왠 아르마니 정장을 차려입은 늘씬한 꽃미남이 앞에 서있었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피부가 여자처럼 희고 갈색갈기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굴은 차라리 대리석조각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철구가 올려다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동맥이 끊어진 줄 알았던 철구의 손목은 말짱했다. 방안 풍경은 전과 그대로였지만, 뭔가 무대연막이라도 피어오르는 듯 비현실적이고 신비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보다 내 말에 먼저 대답해. 생을 되돌려 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말, 진심이냐고?" 많아 봐야 20대 중반 밖에 안되어 보이는 남자는 40이 넘은 철구에게 막 반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테너처럼 울림이 좋은 목소리에는 함부로 거역하지 못할 위압감이 담겨있었다. "그렇소. 분명 진심이오.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로군. 당신은 누구요?" 남자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 이를테면, 악마라고나 할까? 아니, 이왕이면 듣기 좋게 천사라고 해두지. 인간들의 소원들 들어준다는 점에서 천사고 들어준 소원의 결과가 항상 좋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선 악마니까." 철구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가 생각났다. "한마디로 사기꾼이로군?" 강철구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사기꾼이었다. 온갖 부드러운 말로 소원을 들어줄 듯 하다가 결국 뒤통수를 치고 지 잇속을 챙기는 부류들. 그치들 덕분에 철구는 아내와 자식을 잃고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오~ 노~ 사기꾼이라니 이 무슨 섭한 말씀을. 대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인간들 자신의 무리한 욕심 때문이라고. 멍청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잘못된 선택을 해놓고 꼭 운명이나 내 탓을 하곤 하지. 멍청해! 정말 멍청한 것들이야!" "그럼 생을 되돌려준다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가로 당신이 얻는 것은 뭐요?"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아. 그 댓가로‘영혼'을 받는다고는 해도 실은 너의 영혼이 활동 함으로서 생기는 일종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나에게 좀 나누어 달라는 거지. 우리같이 육체가 없는 존재들은 그게 유일한 식량이거든. 당신이 생활하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마. 어때, 이만하면 무리한 조건은 아니지?” “그..그렇긴 하지만 그러면 나한테 너무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아닌지..” “자..자..너무 깊게 생각할 것 없어, 일단 계약서에 지장부터 찍고 나서 생각하자구. 가만있자..내가 인주를 어디다 두었더라. 어이쿠, 여기 면도날이 있구먼, 이거면 되겠어” 철구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른 상태로 면도칼로 엄지손가락에 피를 내서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둥근 지문자국을 남긴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남자는 야수 같은 눈빛으로 달려들더니 갈구리같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계약서를 낚아채서 품안에 쑤셔넣었다.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 듯 순식간이었다. 언뜻 보인 그의 손가락은 여섯개나 되었다. 어느새 그의 야수 같던 눈빛은 사라지고 서글서글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돌아와있었다. 보험회사직원같이 상냥한 표정으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그가 말을 꺼냈다. “자자..이제 본격적으로 비즈니스 이야기를 해볼까? 한마디로 인생을 되돌려 달라, 이말이지. 문제없어, 인생포맷이야 말로 내 전문인걸. 그래 어느 시점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30대? 20대? 10대? 아니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신중하게 결정해. 한번 결정하면 그걸로 끝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남자는 품속에서 구식 테이프플레이어를 꺼냈다. 그리고 겉에 ‘강철구’라고 라벨이 붙여진 테이프를 그 속에 찰칵- 삽입했다. 남자는 실크손수건으로 플레이어의 겉에 묻는 먼지를 슥 슥 닦았다. “오랜만에 꺼내는군. 이게 인생을 되돌려주는 장치야. REW버튼을 누르면 과거로 되돌아가고, FF를 누르면 미래로 갈 수 있지. 자, 이제 강철구 당신의 인생을 담은 테이프를 안에 넣었어.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는 시점에서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구.” 철구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기억을 잃은 채 엄마 뱃속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강철구를 강철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형성되고 축적된 경험들 때문이었다. 만일 갖난 아기로 돌아간다면 그 아이가 행복해지든 불행해지든 현재의 강철구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철구는 최대한 지금의 기억을 잃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서 새로운 인생의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최대한 현재에 가깝고 인생의 성패가 갈리는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리했다. 고등학교때로 돌아가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S대 법대로 들어갈까? 아니다, 그때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고, 철구 자신도 공부의 기초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등학교때로 돌아가자니 그 아이는 이미 철구라고 하기엔 공유하는 기억이 너무 적었다. 첫직장을 잡던 때는 어떨까? 그때 철구는 M사와 S사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S사를 택했다. 5년후 S사는 부도를 내며 망했고 철구는 동료들보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직장을 찾아헤매야 했다. 어쩌면 철구의 인생은 그때부터 틀어졌는지도 몰랐다. 반면 당시 작은 기업이었던 M사는 인터넷붐을 타고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한들 이번엔 M사를 선택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S사를 택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우선 연봉도 더 많았고, 집에서도 더 가까웠고, 전공하고도 맞았다. 더구나 지금 이 남자와 계약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은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하니까 장래에 M사가 성장한다는 정보도 알 수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모든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테면 눈앞에서 사과와 배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단순한 문제 조차도 이전에 일어났던 온갖 복잡한 상황들에 지배를 받는다. 철구가 사과를 선택했다면, 그 이전에 사과쪽이 배쪽보다 0.001mm정도 가까워서 잡기에 좋았다던지, 빛깔이 더 좋아서 무의식적으로 선호하게 되었다든지, 과거에 사과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남아있다든지, 등등 온갖 복잡한 물리적, 심리적 선행조건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단순히 지금까지의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결국 그의 인생은 한치도 돌이킬 수 없는 엄격한 인과의 법칙에 따라 카세트테이프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에 불과했다. 철구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결국 삶을 돌리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도저히 선택을 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당신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소. 이제 자살따윈 생각하지 않고 내 운명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겠어. 그럼 당신을 만나서 이런 고민을 할 일도 없겠지.” 철구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어.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이럴 땐 'REPEAT’에 해당하나?” 남자가 싱긋 웃으며 테이프플레이어의 버튼을 찰칵 눌렀다. 순간 철구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소용돌이 치는 철구의 몽롱한 의식 속에 남자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울려왔다. “흐흐흐 계약서에 따라서 당신의 영혼에너지는 잘 받겠어. 영혼의 에너지는 한 사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을 겪을 때야말로 가장 강력하게 방출되거든 흐흐흐흐..” 문득 철구는 지금 이장면이 낯설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방안의 풍경, 널부러진 소주병의 위치, 오른손에 쥔 떨리는 면도날..이 모든 광경이 어디선가 이미 한번 보았던 것 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꿈속에서 보고 깨어나서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뎅그렁..나동그라지는 빈 병을 바라보며 철구는 생각했다. 이제 잠시 후면 이 지긋 지긋하게 불운만 반복되어온 생도 끝날 것이다. 누군가 내 생을 다시 옛날로 돌려준다면 결코 이따위로 살지는 않을텐데.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으리라. 철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면도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안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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