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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강령술
게시물ID : panic_160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몬샤벳
추천 : 1
조회수 : 13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6/04 00:20:54
한가운데 세워진 세트를 중심으로 스탠바이에 들어간 스튜디오는 분주히 움직이는 스텝들로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 통역을 사이에 두고 몽골에서 온 작은 체구의 노인과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말없이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머리엔 헤드셋을 쓰고 양손엔 원고 뭉치와 스케쥴 보드를 든 채 초라한 몰골로 앉아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가 그에겐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노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들어와 밝아진 세트에서는 전직 댄스 그룹 출신인 남자 진행자 놈이 아직도 제대로 대본을 외우지 못해 더듬거리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 전에 진행을 맡았던 아나운서 출신의 영민한 여자 MC가 다시 생각났다. 소위 말하는 카메라발을 잘 받지 못하는 수더분한 인상이었지만 진행 실력이나 순간 순간 보이는 상식과 재치는 우리 프로에 더없이 잘 어울렸던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우리 프로에서 강제 하차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 촬영장에 남아 있는 것은 남자 진행자 옆에서 보기 민망한 노출 의상을 입고 열심히 화장을 고치기에 여념이 없는 댄스 가수란 직함의 여자애들 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이 어린 애들의 지식 수준이나 방송 능력을 그녀의 수준을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었다. 작가들은 방송 전에 한번이라도 더 입을 맞춰 보려고 애들 사이를 뛰어 다니며 말을 붙이고 있었지만 그 애들이 신경 쓰는 건 자신들이 얼마나 화면에 예쁘게 나올지 뿐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풍경에 몸서리가 쳐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나는 다시 노인에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시작 할 거니까 준비할게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통역을 맡은 덩치 큰 여자가 마치 발음이 새는 것 같은 그네들 특유의 언어로 말을 전하자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여자의 입에서는 곧바로 그의 말이 한국어로 통역이 되어 유창하게 쏟아졌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이 스튜디오에서 그나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이 통역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의식은 주관자의 정신력과 성스런 고대의 언어로만 진행되는 것이므로 특별한 도구는 필요가 없다고 하네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그 노인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우리 프로는 원래 생활 주변의 과학 원리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과학 상식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접근한다는 의도로 기획 되었었다. 참신한 기획과 아이템들로 첫 방송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동 시간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 쇼 프로 시청률 경쟁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프로로 성장했다. 그리고 우리 프로는 곧 높은 시청률과 과학을 소재로 한 공익성 덕분에 일약 방송사의 간판 프로로 부상했다. 그러던 프로그램이 이상하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시청률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던 작년 이맘때 부터였다. 1년 고비를 넘기면서부터 소재가 고갈되기 시작했고 시청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뻔한 소재를 억지로 부풀려서 방송을 꾸미려 하다 보니 시청률은 수직 하강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새를 놓치지 않고 경쟁사에서 같은 시간대에 화려한 캐스팅으로 새로이 배치한 버라이어티 쇼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우리 프로의 시청률은 완연히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몇 달 전부터는 한자리 시청률을 기록하기 시작하며 길게 붙었던 광고들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윗선에서 방송 폐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시도를 해보았다. 주위 의견을 받아들여 진행자를 교체했고 전문가 패널들도 대폭 줄이며 연예인들을 출연시키기 시작했다. 내용에 있어서도 그 동안 가장 인기 있었던 소재들을 재탕 삼탕 우려먹었고 결국에는 예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묻어놓았던 '위험한' 기획들까지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집안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폭발물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일상 생활 속에 이렇게 위험한 물건들이 많으니 절대로 따라 하지 말라는 취지를 내세우긴 했지만 결국 목적은 파격적이고 위험스런 내용으로 어떻게든 시청률을 올려보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모방 사고의 위험이 있었기에 방송을 할 때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은 살짝 빼버리고 방영을 했다. 하지만 인터넷의 위력을 등에 업은 철없는 어린 녀석들은 금세 그 미싱 링크들을 찾아내 손쉽게 폭발물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결국 한 초등 학생이 우리 방송을 보고 수제 폭탄을 만들어선 학교 사물함에 넣어 두었다가 여름철 열기에 못 이겨 그것이 수업 도중 폭발하는 사고가 터지면서 우리 프로그램은 세간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 일로 PD자리까지 위험하게 생긴 나는 결국 위에서 하라는 대로 수동적으로 프로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제 다음 개편 때면 없어질 것이 확실한 프로의 마지막을 그들의 지시에 따라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기획으로 장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세계의 기인', 세계 각국의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능력을 선보인다는 여름 특집 코너로 지금까지 자석 인간, 기공 수련자, 투시력 소유자 등등의 이름을 붙인 광대와 사기꾼들을 초대해 마치 진짜인 양 꾸며서 방송에 내보내왔다. 이 유치하고 사기성 짙은 기획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여름 시즌을 맞아 그런대로 반응을 얻었고 심령 치료사란 인도인이 초대되었던 지난주에는 일곱 달 만에 처음으로 다시 두 자리 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오늘 이 몽골에서 온 조그만 노인이 보여줄 것은 바로 강령술이었다.
몽골의 어느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와 점을 본다는 이 무당은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TV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노인이다. 그런 사람을 고작 몇 프로의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한국 땅까지 불러와 창피를 주어야 할 것을 생각하자 나는 가슴이 갑갑해 왔다. 애초에 세상에 귀신이란 것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결국 강령술이란 모두 교묘한 사기나 쇼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기에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야 속아 넘어갈지 모르지만 교활하기 짝이 없는 도시 사람들이 설렁설렁 속아 줄 리는 없었다. 어쩌면 이 노파는 자신에게 진짜로 영혼을 불러내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그가 자신의 강령술을 진짜로 철석같이 믿는다손 치더라도 그건 착각이거나 환상이지 실재로 귀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은 그런 그의 심정을 헤아려줄 만큼 착하지는 못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곧 있을 생방송에서 이 노파가 강령술에 실패할 때엔 어떻게 되겠는가. 90평생 동안 이 작은 노파를 지탱해 오던 내세에 대한 믿음이 이 타국의 이방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헤쳐지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그는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노파가 통역을 향해 뭔가 말을 건넸다.
"선생님께서는 영혼을 믿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하시는군요?"
통역이 전해준 말에 나는 미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저요? 뭐.. 사실 이렇게 모셔놓고 이런 말하기엔 뭐하지만 전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게 사실이군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런 걸 곧이곧대로 믿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신을 찾아와 강령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냐고 물어보시는데요?"
그의 질문에 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변을 꺼냈다.
"간단하죠, 공포 때문입니다. 유령이니 영혼이니 저승 따위 이야기는 전부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이라도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일 테니까요..."
그럴듯한 얘기였고 거짓 없이 나의 생각을 설명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작 노파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는 왜 자신을 어렵사리 이곳에 불러와 강령술을 부탁하느냐고 물었다.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아니면 복을 빌거나 액땜을 하기 위해서? 물론 아니었다. 그를 이곳에 불러온 유일한 이유는 바로 시청률 때문이었다. 그게 진짜든 사기든 상관없이 시청자들에게 보다 자극적이고 신기한 구경거리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노파는 통역이 어렵사리 전해주는 나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한동안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짧게 한마디를 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을 거라는군요..."
"하하... 그런가요, 이제 곧 방송이 시작될 겁니다. 저쪽에 서있는 사람이 손짓하면 바로 무대로 안내해 주세요..."
방송 시간이 다 된 것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카메라 뒤로 달려가며 통역에게 말했다. 덕분에 더 이상 불쌍한 노파에게 애써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차피 방송이 시작되면 어떻게든 결말이 날 것이다.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몽골의 시골 구석에 사는 노파였다. 설령 내가 예상 한대로 방송이 흘러간다 하더라도 그가 나에게 어쩔 것인가. 고작해야 역정이나 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를 상대로 소송을 걸 일도 없고 TV가 나오지도 않는 시골 마을에서 자신의 강령술이 거짓이란 소문이 날 일도 없었다.
곧 생방이 시작되었고 녹화와는 다른 생방 특유의 긴장감이 무대를 맴돌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은 녹화로 가게 마련이고 이전까지 우리 프로역시 그렇게 해왔으나, 이번 기인 특집은 신빙성을 높인다는 미명 아래 생방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보조 스텝 한 명이 헐레벌떡 나에게로 뛰어와서는 헉헉거리며 말했다.
"얘기 들으셨어요? 저쪽 방송국 버라이어티 쇼 무대에 누전 사고가 나서 불이 났대요... 거기 난리 났어요, 생방 직전에 사고가 나서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아마도 지난주 방송분 재방으로 나갈 모양이에요"
순간 나의 얼굴엔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번졌다. 비록 이제 미운 정 고운 정 다 떨어져 나간 프로지만 경쟁 프로가 그 지경이 되었다면 시청률은 엄청나게 오를 테고 그나마 그걸로 유종의 미란걸 거둘 수도 있을게 아닌가. 나는 옆에 달린 모니터 화면을 지켜보며 소리쳤다.
“곧 광고 끝납니다. 모두 스탠바이!!!”
재난 수준의 방송 사고를 겪은 경쟁 프로그램과는 달리 우리 방송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진행자 녀석은 오늘따라 용하게도 대본을 외웠는지 더듬거림 없이 멘트를 날렸고 게스트들도 별 무리 없이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진행 순서에 따라 우리가 큐 사인을 보내자 무대로 몽골인 노파가 불려 나왔다. 멍청한 진행자 녀석의 썰렁한 농담이 한동안 이어졌다. 통역 아가씨는 그런 그의 말을 어디까지 전달해야 할지 곤란해 하는 것이 무대 밖에서도 확연히 보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드디어 노파가 강령술을 시도하는 순서가 오자 무대의 조명은 푸르스름하게 바뀌었다. 그러자 노파는 통역을 맡은 여자의 안내에 따라 무대 한가운데에 가부좌 한 채 앉더니 자신이 가지고 온 작은 책자를 펴 들었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그런 노파의 전신을 핀 포인트로 비추었다. 노파는 한동안 강한 조명을 의식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선 조그만 책에 적힌 글자들을 독특한 음운을 넣어가며 읽기 시작했다.
마치 허밍을 하는듯한 그 기이한 목소리는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우리 조명의 힘을 빌어 그럴싸한 화면이 나가기 시작했다. 미리 노파에게 물어본 바로는 5-10분 정도가 걸린다는 강령술은 그렇게 천천히 진행되었고 계속해서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지는 허밍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미리 리허설을 해보려 했으나 한번 강령술을 하면 4,5일은 쉬어야 한다는 노파의 말에 포기했던 게 슬슬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미리 자료 화면이라도 준비해서 같이 내보낼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내 눈 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 무대 위에는 노파 외에 아무도 없었다. 진행자와 게스트들 역시 무대 바깥으로 배치를 바꾸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무대 한가운데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 그것은 아주 작고 형체가 일그러져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언뜻 보기엔 단순한 스모그나 일그러진 그림자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현실의 것이 아닌 듯 보이는 형체는 노파의 주문이 이어지자 점점 그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놀라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애써 억누르며 카메라 쪽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방청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방청객들의 비명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모니터 스크린을 확인하니 다행스럽게 카메라에도 내가 본 형상이 뚜렷하게 잡혀있었다. 사전에 우리 쪽에서는 무대에 어떠한 장치도 하지 않았다.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몰라도 분명 그것은 노파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순간 고개를 숙인 채 노파 옆에 서있던 아이의 형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그 모습을 본 나는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여전히 형체가 고정되지 않고 일렁이듯 보이긴 하지만 이젠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진 그 형체는 분명 전에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비록 사진을 통해서였지만 상황이 상황 이었던 지라 나는 그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사물함 안에서 우리 방송을 본 아이가 만든 폭탄이 터졌을 때는 수업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한 아이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사물함이 폭발 하면서 튀어나간 파편에 목의 동맥을 잘려 결국 죽고 말았다. 이름이 뭐였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부모들 앞에 놓인 작은 영정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아이의 얼굴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무대 위 몽골인 노파 옆에서 일렁이는 모습으로 서있는 것은 분명 그 아이였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무대 가운데 앉아있는 노파를 보았다. 이 조그만 몽골인 노파는 진짜 무당이었고 정말로 강령술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건.. 정말 대박이야..."
나는 공포와 기쁨이 섞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 순간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무대에 서있던 아이의 영혼이 갑자기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발견한 아이의 영혼은 갑자기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더니 양손을 치켜들고 나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자신을 죽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나에게로 다가온 아이의 혼령은 허공에 뜬 채로 내 목을 휘어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력한 물리력은 내 목을 확실하게 누르며 숨을 쉴 수 없게 했고 나는 곧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아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없이 시커멓게 뚫린 눈구멍은 반투명해서 건너편 세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 속에서 나는 아이의 감정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과 그런 일이 있게 만든 나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아이의 눈을 통해 전해졌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누구 하나 선뜻 나를 도우려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카메라는 귀신에게 붙들린 나의 모습을 잡으며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귀신의 손을 클로즈업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무대 옆 대형 스크린을 통해 유령에게 목이 졸려 눈을 부릅 뜬 채 발버둥 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의 숨이 넘어가려는 찰라 무대에 앉아있던 노파가 가부좌를 풀더니 나에게 다가와 크게 호통을 치며 아이 영혼의 어깨를 내리쳤고 그러자 마치 연기처럼 아이의 형상이 사라지면서 목을 조르던 힘도 서서히 사라졌다. 노파가 나를 향해 뭔가 말을 하자 무대에서 놀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통역사가 달려오더니 말을 했다.
"그 영혼이 당신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라는군요... 대개는 그렇게 원한을 가지고 죽은 영혼이 쉽게 소환 된다고 해요... 자신이 성불을 시켰으니 안심하라는데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목을 어루만지며 나는 통역사를 불렀다. 그녀가 다가오자 나는 노파에게 나의 질문을 통역해 주길 부탁하려 입을 열었다. 어찌나 세게 목을 졸렸는지 내 목소리는 좁아진 목구멍을 통해 끽끽 거리며 간신히 새어 나왔다.
"저분에게 여쭤봐 주세요.. 아까 이 의식이 음성만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지 말입니다.."
"그렇다는데요.. 영혼을 부르기 위한 주문을 정확하게 낭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양을 쌓은 사람이라면 차분한 마음으로 정확히 읽어 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영혼을 부를 수 있다고 해요..."
나는 조금 전 아이의 영혼을 봤을 때 보다 더욱 큰 공포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무대는 전국에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명확한 노파의 음성을 싣고서 말이다. 그때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셋을 통해 스튜디오 위쪽의 통제실 쪽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이봐 이 PD 기뻐하라고!! 방금 우리 프로 전국 시청률이 30%를 넘었어!!"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경쟁사 방송이 아예 방영을 하지 못한 셈이니 그쪽 시청자들 까지 우리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을 것이다. 말인즉슨 방금 이 몽골인 노파가 시행한 강령술 주문이 전국 30%의 가정으로 실시간 전송 되었단 얘기다. 그 뿐인가? 당장 케이블을 통해 두고두고 이번 방송분이 재방영 될 터였다. 설령 재방송을 내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요즘은 방송이 끝나고 채 다음날이 되기도 전에 인터넷을 통해 선명한 화질과 ‘음질’로 인코딩된 동영상들이 떠돌아다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다운 받을 수 있다. 내일 이맘때면 전국 수십만, 아니 수백만 가정에서 강령술 주문이 재생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문으로 얼마나 많은 원령들이 소환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수백만의 귀신들이 거리를 활개 할지도 모른다. 조금 전 나의 목을 조르던 아이와 같은 악령들이 말이다. 이건 단순히 나 하나의 목이 걸린 문제가 아니었다. 방금 나는 어쩌면 전국 규모의 테러를 저지르고 만 것일지도 몰랐다.
강령술의 여파로 방청객들마저 술렁이는 가운데 조금은 어수선하게 방송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방송국이 마비될 정도로 많은 문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나는 병원에 다녀와 봐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스튜디오를 빠져 나왔다. 어차피 공중파를 타고 나가버린 방송이니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그저 강령술 방송의 결과에 대한 나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나는 한동안 시동을 걸지 않고 키를 구멍에 꽂아둔 채로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홀로 앉아 있자니 조금씩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의 기우일 지도 몰랐다. 분명 노파는 강령술을 한번 하고 나면 4-5일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강령술은 단순히 주문을 낭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술자 자신의 에너지 소비가 따른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래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뭔가 일어났다면 벌써 연락이 왔겠지…"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혼잣말을 하며 키를 돌려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빠져 나와 도로로 진입했다. 도로는 한산했다. 이 시간에 밖을 나와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잠시 진짜로 병원을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 약간의 통증 외에는 목에 별다른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고 엄청난 일을 겪은 탓인지 피로가 몰려오기도 해서 나는 집으로 차를 돌렸다. 그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흠칫 놀라며 번호를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액정 화면에는 집 번호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 방금 방송 봤어, 괜찮은 거야?"
전화를 건 것은 아내였다. 내가 목을 졸리는 모습이 방송을 타고 나갔으니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을 터였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말했다.
"괜찮아. 봤으면 알잖아. 순식간에 끝난 일인데 뭐.. 지금 운전해서 집으로 가고 있으니까. 나갈 준비해 오랜만에 밖에서 외식이나 하자."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 오빠 못 믿…. 흐억!!!"
통화를 하며 뒤를 확인하려 무심코 백미러를 쳐다본 나는 순간 기겁을 하며 숨을 집어 삼켰다. 거울에 비친 뒷자리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 그녀는 분명 처음 우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MC였다.
"여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귀에 차고 있는 핸즈 프리를 통해 아내의 음성이 들려 왔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텅 빈 그녀의 눈을 통해 기억의 조각들이 밀려왔다. 상부의 압력으로 그녀에게 진행자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던 일, 그날 함께 술을 마시고 둘 다 만취한 채로 근처 모텔로 향했던 일.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나는 아내 몰래 그녀와 만났다. 그전부터 지적이고 단아한 그녀의 모습에 은근히 매력을 느껴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여자의 임신과 이미 결혼한 남자의 배신, 여자는 실연의 충격과 임신 중독으로 우울증에 걸렸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 채 그녀의 죽음은 잊혀져 갔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죽음과 임신 3개월을 막 넘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서서히 뒤에서 나의 어깨를 타고 넘어와 목을 감싸 쥐었다. 핸들을 쥐고 있던 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나의 차도 휘청거리며 도로를 지그재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말 좀 해봐, 여보!! 여보!!"
그런 상황을 모르는 아내는 답답해하며 전화기에 대고 연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뒷좌석의 그녀가 강력한 힘으로 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기 전 나는 간신히 마지막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미안해…"


출처

메드클럽 클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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