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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 모녀살인사건
게시물ID : panic_191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13
조회수 : 893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9/02 14:37:18
세상에는 늘상 명확히 규명해 내기 어려운 사건들이 있다. 개중에는 단지 아직 우리의 관찰이 충분히 세심하지 못해서 진실을 놓쳐버린 사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켠으로는 아무리 우리의 상식과 과학으로 파헤치고 추론해보아도 도저히 그 아래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낼 수 없는 사건들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가 아직 과학적으로 구명해내지 못한 어떤 알 수 없는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이야기는 지난 80년대 중반에 있었던 한 살인사건의 뒷이야기이다. 일간지의 조그만 한 귀퉁이를 장식했던 이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패륜적인 살인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혹자는 우리 사회의 효 정신이 무너져 가고 있다고 세상을 개탄했고, 혹자는 가족의 붕괴라는 관점에서 심각하게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뒤에는 앞서 말한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사건의 재판 결과에 대해서 미리 밝혀두자면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19세 최지현(가명) 양은 존속살인의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충주의 한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중 자살했다. 자살의 방법과 원인에 대해서는 교도소 측의 간략한 설명이 있었지만 무척이나 미심쩍은 점이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서술하도록 하겠다.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결코 쉽게 간과해서는 안될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누구도 죄수의 자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까닭에 감독자에 대한 간단한 문책과 함께 이 자살은 이미 시간 속으로 묻혀버렸지만, 나에게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지현은 아버지 최명호(가명)의 가슴과 북부를 식칼로 세 차례 찔러 살해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최지현은 아버지의 시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회색 셔츠와 청바지는 온통 피로 젖어있었다. 최명호의 사인은 출혈과다였고, 현장에 있던 최지현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에서는 그녀의 지문이 다량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범행이 이루어진 모든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법의학팀의 감정결과와 그녀가 진술한 범행사실은 정확히 일치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이웃 주민도 세 명이나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사건에 의구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겉으로 보아서는 이 사건에 진범이 최지현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의구심을 가질 까닭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명확성이야말로 세상 모든 이가 이 사건의 진실을 발견하는데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게 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처음 경찰에 체포되었을 당시 그녀를 체포했던 박모 경장의 기억은 이러했다. 그녀는 전혀 도주하려는 의사를 보이지 않았으며 구석에 조용히 앉아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이 그녀를 체포하려했을 때 그녀가 처음한 말은 이러했다. "난.... 난 죽이지 않았어요. 내가 죽이지 않았어요." 박경장이 물었다. "그럼 누구니? 누가 죽였니? 범인을 봤어?" "아뇨. 제가 찔렀어요. 제가 칼을 가지고 와서 제가 찔렀어요. 그런데.... 그런데 제가 죽인 건 아니예요. 제가 죽이지는 않았어요." "무슨 말이야? 네가 아버지를 찔렀어?" "네. 제가 찔렀어요. 그렇지만 전 찌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제 손이.... 제 몸이 찔렀어요. 저는 찌르지 않았어요." 도데체 무슨 말일까? 자신이 찔렀지만 자신이 찌른 건 아니라는 말. 당시 박경장은 그녀가 살인 후 죄책감과 혼란 때문에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그녀를 체포했다고 한다. 체포 과정에서도 그녀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경찰로서는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았던 것이 충동적으로 살인은 저지른 본성이 선량한 범인들의 상당수가 현장에서 체포되는 경우 그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는 다른 것이었음을 경찰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조사 과정에서 그녀는 살인의 전 과정을 진술했다. 그녀는 그 날 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버스를 타고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 박진이(가명)와 아버지 최명호는 이혼한지 1년이 약간 넘은 시점이었다. 둘은 성격차이로 인한 합의이혼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진술에 따르면 최명호의 심각한 여성편력이 문제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사흘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서 결국 이혼까지 가게되었고, 외동딸 최지현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주 둘 사이를 오갔다. 이혼 후에도 박진이는 최지현을 통해서 밑반찬이나 김치 따위를 최명호에게 가져다 주는 등 그들 셋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언제 다시 합칠 것이다라는 소문마저 동네에서는 무성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들 중 누구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죽일 만큼의 원한 관계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경찰이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서 가장 곤란은 겪은 부분이 바로 이 범행동기의 부분이었다. 최지현이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살해할 정도의 원한 관계를 가졌느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워낙에 현행범으로서 바로 검거된 데에다가 이후 새로이 밝혀진 사실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범행동기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 경찰과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당시 최명호와 박진이는 주위 사람들이 기대하던 바대로 재결합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었다. 최명호 자신이 그 부인과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했고, 박진이 역시도 경제적인 부담 등으로 인해 최명호와의 재결합이 절실했던 것이다. 박진이는 위자료로 받은 얼마간의 돈이 있었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그 돈의 대부분은 써버렸고, 생활을 위해서는 목걸이 구슬을 꿴다던가 하는 몇몇 가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본인과 딸을 위한 최소한의 생활비에도 턱없이 못미치는 벌이였다. 주위 사람들이 본 바대로 최지현 편으로 최명호에게 반찬이나 김치 등을 전해 준 것도 최명호가 그들에게 경제적 원조를 해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그렇게 서로간에 다시 믿음을 확인하고 재결합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던 중 최명호의 그 못된 버릇이 재발한 것이었다. 최명호가 돌연 태도를 돌변하여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확히 그 신원의 확인은 어려웠지만 당시 최명호가 며칠씩 집을 비우고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다른 고장의 여자라고 여겨진다. 여하튼 그러한 최명호의 배신이 이 사건에서 최지현이 최명호를 살해하게 된 직접적 동기라고 조사에는 나타난다. 그러나 이 역시 너무나도 살해 동기라고 하기에는 미심쩍다. 최명호의 편력이 하루이틀의 일도 아닌 까닭이다. 최지현은 최명호와 한 집에 살던 시절에도 최명호가 집을 비우면서까지 여색을 밝히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는데, 부모님이 이혼하고 게다가 자신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마당에 이제와서 아버지의 외도 아닌 외도를 이유로 그토록 잔혹한 살인을 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살해동기의 여부보다는 이 살해동기가 드러나게 된 계기에 더욱 주목했다. 각종 조서에서는 그저 주변 탐문수사와 익명의 제보로 이러한 원한관계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나타났지만, 실상은 하나의 중요한,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사건이 있은 다음날 아침 경찰서로 박진이가 사건의 진범이라고 자수를 해온 것이다. 자신이 지난 밤 칼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은 찔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의 이러한 진술을 그저 모성애의 발로라고 치부하여 일축해버렸다. 최지현이 현장에서 검거된 데에다가 그 당시 범행의 수법, 정황까지 모두 기억을 하고 있는 마당에 박진이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을 하여본댔자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게다가 박진이는 그날밤 자신의 집에서 자고 있었고, 주인집 사람들도 박진이가 집밖을 나가는 것을 보거나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진이 역시도 자신이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박진이의 주장은 이러했다. 그날 박진이는 전화로 최명호와 매우 심각한 말다툼을 벌였고, 초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꿈에서 깨는 듯한 기분이 들어보니 자신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더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강한 살의가 인 박진이는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식칼을 구입했다. 식칼을 가지고서 남편의 집으로 간 박진이는 충동적으로 최명호를 찔렀다. 그리고 너무나 심한 죄책감에 주저앉아 울다가 일어났는데 자신이 방에 누워있더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미심쩍은 마음에 최명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것은 최지현이었던 것이다. 나는 박진이의 자수가 어째서 경찰 수사 기록에는 그토록 완벽하게 누락될 수 있었는지에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사건과 관계된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수사 기록에서 박진이의 자수에 관한 부분은 마치 의도적이기라도 하듯 쏙 빠져있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경찰의 설명으로는 박진이의 진술이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여서 도데체가 수사에 관련한 기록으로 볼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꿈에서 자신이 죽였다니. 그러나 나는 이 설명에 수긍할 수 없었다. 박진이가 분명 사건 다음날 새벽에 자진해서 경찰서로 찾아와 자신이 진범임을 내세웠고, 박진이의 진술까지 들었다면 참고 사항 정도라도 해서 기록을 남겨놓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박진이는 재판 과정에서도 줄기차게 이 주장을 계속 했다고 한다. 경찰이 이 자료를 누락시킨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나는 이모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최지현의 살인에 초동 수사를 담당했었고, 지금은 경찰을 그만두고 서울 변두리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사내였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 당시 박진이의 진술은 놀라울 정도로 사건 정황과 일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박진이는 경찰서로 찾아오기까지 최진희와 만날 수도 없었고, 최진희와 통화한 내용이라고는 그 날 새벽의 전화내용이 전부였다. 다음은 둘의 전화통화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지현이니?" "응, 엄마. 무서워. 너무 무서워." 최지현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매우 떨리고 있었다. "지현아. 뭐가? 뭐가 무서워." "아빠가.... 아빠가 죽었어. 아빠가." "아빠가 죽었어? 칼에 찔려서? 칼에 찔려서 죽었어?" "응. 내가 찔렀는데.... 내가 그런게 아냐. 엄마. 내가 그런게 아냐." "알아. 지현아. 엄마가 찔렀어. 엄마가 아빠를 죽였어." "엄마. 무서워." "지현야. 거기 있어. 엄마가 갈게. 거기 있어." 그리고 통화는 끝났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통화가 끝나자마자 현장에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따라서 범죄 정황에 대해서 박진이가 정확히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이모씨의 진술에 따르면 그 당시 박진이가 경찰에 진술한 내용이 후에 최지현이 진술한 내용, 그리고 경찰의 추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수사 지휘부는 매우 난감해했었다고 한다. 이미 진범이 확실한 상황에서 의외의 진술에 의해 수사가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고심 끝에 지휘부는 박진이의 진술을 완전히 무시하기로 한 것이었다. 박진이의 진술 조서 원본을 파기함으로써 박진이의 주장이 딸 대신에 죄를 뒤집어쓰고 싶어하는 어느 어머니의 가당치 않은 주장으로 몰아버린 것이었다. 그 후 경찰의 수사 기록이 검찰로 넘어가고 재판에 회부되면서 박진이의 변호를 맡았던 최모 변호사를 나는 찾아내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글쎄요. 어떻게 보면 황당한 사건이었죠. 당시 박진이 씨의 주장이 저로써도 수긍이 가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고..... 무엇보다도 정식재판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꿈에서 살인을 했다니요." "그렇다면 당시 변론은 이떤 식으로 하셨나요?" "일단 방법은 하나였죠. 일시적인 정신 착란을 이유로 어떻게든 형기를 줄여보는 건데. 그것도 쉽지가 않았어요. 피고인 최지현이 워낙에 당시 정황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고..... 범행 수법도 너무 잔인했어요. 게다가 중요한 증인의 한 사람인 박진이 씨를 증인석에 세울 수가 없었어요. 워낙에 처음부터 자신의 범행이라고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엔 검찰의 구형대로 그대로 20년 형이 나왔죠." "그렇다면 항소를 하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글쎄요. 저는 항소하시라고 권고를 했는데, 박진이 씨가 거부를 하더라구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슨 박사라는 사람이 관련되었다는 것 밖에는요." "무슨 박사라뇨?"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심리학을 전공한 괴짜 박사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와 딸의 혼이 일시적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뭐 그런 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혼이 뒤바뀐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사건의 배후에 가려진 그 박사라는 사람이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혼이 뒤바뀐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한다. 나는 한시도 이 사건은 취재하는 것은 미룰 수 없었다. 대학원에 휴학 신청까지 하고 이 괴짜 박사라는 사람을 찾아 나섰지만 그를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한국 심리학회를 찾았지만 그는 오래 전 제명되었다는 말만을 들을 수 있었다. 차지수(가명) 박사는 한때 도쿄대학 심리학 박사를 받으며 우리나라의 차세대 심리학자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20대 후반에 쓴 논문들이 아직까지도 매년 대단한 인용횟수를 기록하며 한국 심리학회에서는 고전처럼 인용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창 연구를 계속할 나이인 서른 초입에 이상한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즉 고대 주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주류 학자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점점 교류도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아프리카로 자료 수집을 떠났고, 그 후로 그가 귀국을 했는지 어쩐지도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심리학회에서 제공받은 학자들의 명부를 중심으로 그의 소재를 아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골방에 틀어박혀 괴상한 연구에만 몰두하는 이라 하여도 분명 한두 명쯤은 연락이 된 사람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만일 그의 연구가 그토록 한 석학의 관심을 끌만한 연구였다면, 분명 그의 후배들 중 몇몇은 그의 연구의 성과에 남모르는 추종을 보낼 법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가 졸업한 S대학의 대학원 심리학 석사 과정에 있는 한 청년을 통해서 그의 소재를 캐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입으로 들을 그의 상태는 과히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그분요? 이젠 폐인이죠. 전혀 가망이 없어요." "그 분이 혹시 최지현씨 사건에 대해서 말을 한 걸 들은 적이 있나요?" "최지현씨 사건요? 네. 아마 그 사건에 연루되고부터 얼마 지나서부터 사람이 더 이상해졌죠? 연구도 아예 집어치우고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원." 나는 그가 가르쳐 준대로 서울 외곽의 한 빈민촌으로 박사를 찾아갔다. 언덕빼기를 한참이나 올라가야 그의 거처가 나타났다. 그는 옛날 어느 공장의 창고였던 곳을 개조한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살고 있었다. 한눈에 봐서도 도저히 사람이 살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곳이었다. 페인트가 다 벗겨진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인 건너편 벽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었다. 마치 고대 벽화와 같은 괴기스러운 모양을 한 그것은 딱히 그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박사가 직접 벽의 페인트를 긁어서 그 모양을 새긴 듯 했다. 벽에다가 이런 짓을 할 정도면 이미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폐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박사의 이름을 불렀다. "차지수 박사님. 차지수 박사님 안 계세요?" 이윽고 합판으로 둘러쳐진 방 안쪽에서 닥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박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내 눈 앞에 나타난 박사의 모습은 의외로 깔끔했다. 푸른 색 와이셔츠에 검은 면바지를 단정하게 입고서 나오는 그의 모습은 일견 엘리트의 모습이 엿보이는 듯도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민정이라고 하구요, 지금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요?" 되물어오는 박사의 눈빛은 상당히 매서웠다. 어쩐지 한 풀 꺽이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저기 제가 이번에 최지현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데요. 최지현 사건 기억하시죠?" "네." 대답하는 박사의 표정에 어쩐지 모를 놀라움이 내비쳤다. "오래된 사건인데, 어째서 그 사건을 학생이..." "그냥 어째저째 하다가 이상한 말을 들어서요.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그 사건에 깊숙이 연관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박진이씨라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었죠. 그 애의 어머니." "네.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박사님께 뭔가를 부탁하려고 왔었겠죠." 박사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요. 뭐라도 마시시겠어요?" "아. 네." 박사는 한켠에 마련된 낡은 냉장고의 문을 열고 한참을 뒤적거렸다. "제가 뭐라도 사들고 왔었어야 하는데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아마 제가 여기 있을 거란 사실도 반신반의하면서 찾아오셨을 텐데요." 심리학 박사답게 그의 분석은 정확했다. 그의 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허탕을 쳤던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이 곳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가 여기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었다. "기자 지망생인 모양이죠?" "네. 그런 셈이죠." "젊은 여학생이 이렇게 찾아와서 깜짝 놀랐어요. 어디 보자...어쩌죠? 마실 거라고는 포도주 밖에 없군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가 딱히 위생적이게 보이지 않는 잔에 포도주 두 잔을 들고 나에게 왔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차지수 박사가 서른이 넘어들면서 빠져든 연구는 고대인의 환혼주술에 관한 것이었다. 즉 사람의 혼을 바꾼다는 고대인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혼의 뒤바뀜은 주로 농경제례 때에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일정한 주술을 통해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고대인의 기록은 전하고 있었다. 그러한 주술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러했다. 농경 문화 하에서 새로운 싹이 자라는 봄이나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가을 추수기가 되면 고대인은 낡은 것이 새것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머니와 어린 딸의 혼이 뒤바뀐다는 주술을 행함으로써 그러한 의례를 치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사는 그러한 주술이 아직까지도 아프리카 중부의 아이누와 부족이 행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고, 자료의 수집을 통해 그곳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결코 의례적인 행사나 부족의 믿음을 형상화 한 연극이 아니었다. 아이누와 족의 선발된 어머니와 딸은 그들이 고대로부터 지켜온 신성한 동굴에 들어가서 일주일간을 머물렀다. 그 곳에서 그 둘은 주술사가 만든 신비한 약을 먹고 둘의 혼이 바뀌어서 나온는 것이었다. 그러한 환혼 현상은 추수가 이루어지는 짧은 기간동안 계속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둘은 자신의 영혼을 되찾았다. 박사는 행사가 이루어지는 내내 어머니의 주위를 맴돌며 스물 네시간을 관찰했지만 그것은 결코 연극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몸에 딸의 영혼이 들어왔을 때 그녀는 딸이 이전에 했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것과 딸이 하고 있는 것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환혼이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혼을 나누는 형태로 둘의 교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둘은 멀리 떨어져서도 서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인지 그대로 말할 수 있었다. 박사는 이후 그러한 주술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계속된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연구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모두가 박사가 허황된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박사는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몇 건 보고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례의 당사자들은 다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박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단 한 건의 사례였다. 그러던 중 박진이씨가 박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박진이씨가 박사님을 찾아왔을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그렇지만 박사님을 찾고 난 후 2심을 포기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권고했습니다. 일단 실험을 성공시켜야 했으니까요. 환혼이 정말 가능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만 딸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딸을 감옥에 갇힌 상태인데." "면회를 가서 최지현 양에게 약물을 소량 섭취시키고 그리고 다시 박진이씨가 환혼을 시도하고 하는 식으로 되풀이 했지요." "그렇지만 성공하지 못하셨군요." "네. 당시에는. 그리고 그녀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자살이라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박진이씨를 직접 만나서 물어보시죠." 박사는 갑자기 차가운 태도를 보이며 더 이상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한 것이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말씀 감사했습니다." "네." 들어가면서 보았던 그 거대한 벽화를 등 뒤로하고 선 박사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괴기스럽게 보였다. 마치 그 그림과 박사가 하나의 형상으로 합쳐져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느낌이었다. "저 벽의 그림은 박사님이 그리셨나요?"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나는 마지막으로 박사에게 물었다. "아, 저 그림이요? 참 재미있는 그림 아닙니까?" "네.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안녕히 가세요." 냉정하게 문을 닫는 박사의 모습을 뒤로하면서 나는 그곳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박진이씨를 찾기에 앞서 나는 당시 최지현 양이 수감되었던 교도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 최지현 양은 단순 자살로 처리되었고, 그와 관련해서 몇몇이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녀의 죽음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우선은 그녀의 행적이었다. 그녀는 죽던 날 아침까지만 해도 교도관을 통해 야생화와 관련한 어떤 책을 구해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죽기 전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도 어떠한 종류의 절망이나 자포자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로 죽던 날 당일까지도 명랑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로 적극적인 신호를 보낸다. 자신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주위에 알리는 것이다. 절망감을 토로하고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읽고 싶은 책을 구해달라거나 하는 등의 적극적인 자기 욕구를 표출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또 한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그녀의 자살 방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졸라 자살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자살방법이었다. 숨이 막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목을 조를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기도가 막혀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졸도할 지경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풀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시 호흡이 이어져 죽음에 이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사체 감정 결과는 그녀의 자살이라고 보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손자국이 그녀의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발견한 교도관도 그녀의 팔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간 채 그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나는 어렵게 그 당시 그녀를 처음 발견한 교도관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섬짓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목을 조를 수 있는지.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목을 조르는 그 모습이란." 그는 말을 하면서도 몸에 소름이 돋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외부에서 그녀를 살해하거나 그녀의 자살에 도움을 주진 않은거죠?" "당연하죠. 지금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때 부검결과까지 있습니다. 의심나시면 확인해보세요." "아뇨. 그런게 아닙니다." 나는 잔뜩 화가 난 그를 진정시켰다.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끝까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녀가 자살하는 그 순간에 그녀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면? 만일 박사의 실험이 성공했고 그로 인해 박진이의 혼이 최지현의 몸에 함께 씌여 있었던 것이라면? 그러나 그러한 가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박진이가 최지현을 살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딸의 범행을 자신이 했다고 자백까지 한 어머니가 그토록 잔인하게 딸의 육신을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의문은 박진이 본인을 만나야 풀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나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현재 부산에 살고 있었다. 최명호의 죽음으로 그의 유산이 박진이에게 상속된 까닭에 그녀는 별다른 재정적인 어려움 없이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과일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박진이는 나의 취재를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내가 차지수 박사의 이야기를 꺼내가 의외로 차분하게 취재에 응하기 시작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그 실험이 성공했느냐는 겁니다. 박사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회피하셨습니다." 질문을 받은 박진이의 눈에 불꽃같은 분노가 이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짐승같은 년이 그렇게 말했겠지." "그 짐승같은 년이라뇨?" "학생이 만난 사람은 차지수 박사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 짐승같은 년이 박사의 몸을 가로챘지."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쏟아진 말은 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녀의 말을 들은 후 다시 차지수 박사를 찾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녀와 박사의 실험은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박진이는 매일 밤 감방의 풍경을 보기 시작했고, 최지현 역시 일정기간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느낌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박사는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수준의 성공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둘은 차근차근히 법적인 절차와 박사의 학계 발표 및 검증을 계획했다. 그러던 중 박진이와 최지현의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넉넉잡아 두 세달의 시간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잡고 최지현을 찾았을 때 최지현의 의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고 한다. "다 알아. 엄마의 그 위선. 날 이렇게 살인마로 만들어 놓고 이제는 혼자서 잘먹고 잘살겠다는 거지? 날 구해주지 않을 작정이라는 거 다 알아." "무슨 말이야. 조금만 기다리면 된대두." "흥. 조금만, 조금만. 언제나 그 말만 계속하잖아. 실험이 성공한 게 벌써 언젠데. 아직도 조금만. 나도 이미 짐작했어." "도데체 왜 그러는 거야." "쳇. 살인마는 내가 아니고 엄마야. 그렇지 않아? 난 죽이지 않았어. 엄마가 죽인거야. 그런데 내가 왜 감옥에 있어야 하지? 내가 왜?" 최지현의 의심은 계속 정도를 더해가서 박진이와 차지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둘이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지? 이미 계획된 거였어. 그렇지? 아버지를 살해할 때에도 이미 처음부터 나에게 뒤집어 씌울려고 계획했던 거야. 그리고 이번에는 이따위 실험을 구실로 항소조차 못하게 했잖아?" 나는 이 대목에서 그간 궁금하던 것을 박진이에게 물을 수 있었다. 바로 어떻게 박진이와 최지수 박사가 서로 알게 되었는지에 관해서였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왔어요. 재판 참관인 명단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가 어느날 저를 먼저 찾아왔어요." 이는 먼저 말한 차지수 박사의 설명과는 정반대였다. 박사는 박진이가 먼저 자신을 찾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하튼 그년이 날 의심했어. 난 그토록 저를 위해 발이 닳토록 뛰어다녔는데....." 박진이는 이 대목에서 눈물을 지었다. "너무 분해서. 너무 분해서 그날밤 잠이 들었더랬어. 그런데 그날밤도 내가 지현이 몸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상한게 그렇게 혼이 씌이면 너무나 충동적으로 변해. 내가 지현이를 죽여버렸어. 내가 죽여버렸어." 마침내 박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내 예상이 맞은 것이었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목을 졸라 숨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진이의 다음 고백이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한 박진이는 돌연 분노섞인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년이 내 몸 속에 남아있었던 거야. 그년이 내 몸 속에 남아있었어." "몸 속에 남아있었다니요?" "그 년 혼이 내 몸 속에도 들어와 있었던 거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년과 내가 내 몸뚱아리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을 했어." 그랬던 것이었다. 환혼이 서로의 혼이 겹쳐지는 형태로 나타난 가운데 그 상태에서 최지현의 육체가 죽어버리자 박진이의 몸 속에 둘의 영혼이 공존해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와 헤어진 후 그녀의 병원 기록을 조사함으로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최지현의 자살 후 약 2년간을 이중인격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담당의의 소견에는 별다른 징후없이 장애가 저절로 치유되었다고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상으로 돌아오신 거죠?" "그년이 떠났지." "떠나다니요?" "차지수 박사의 몸을 빼앗았어." 그녀의 말을 듣자 순간 섬뜩해옴을 느꼈다. 내가 만난 차지수 박사가 최지현이었다고? "어떻게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나도 몰라. 그년이 알아서 했으니까. 미친 년." "그렇다면 차지수 박사는 어떻게 된겁니까?" "그년이 죽여버렸어. 박사의 혼을 소멸시켜버렸어." 나는 더욱 궁금해져만 갔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해주지 않았다. 남은 것은 차지수 박사 본인에게 가서 물어보는 것 뿐이었다. 사실 박사를 다시 찾기 전까지는 나 역시 그녀의 이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다. 다시 찾은 박사는 지난번 만났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약간 더 초췌해진 얼굴 표정만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들어서자 마치 내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이 반기는 기색이었다. 예의 그 괴기스러운 벽화를 배경으로 선 박사는 결코 그 속에 최지현의 영혼이 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박진이의 말을 너무 곧이 곧대로 들은 것은 아닐까? 경찰의 말대로 그녀는 처음부터 정신 이상을 앓았던 게 아닐까? 나는 이 모든 궁금증을 한 번에 풀고 싶었다. 해서 성급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진이씨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신은 최지현씨라고 하더군요." "하하." 의외로 차지수 박사는 냉소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들어와 앉으세요." 나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냉장고에서 포도주를 꺼내왔다. 냉장고를 뒤지는 그의 그림자가 뒤쪽편의 벽화에 비치자 더욱 해괴한 풍경으로 변모했다. 계속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아찔한 느낌마저 들었다. "박진이씨가 그러던가요? 내가 최지현이라고?" 양 손에 포도주 두 잔을 들고 들어오면서 그가 물었다. "네. 실험이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신이 딸을 죽였다고, 아니 엄밀히 말하면 딸의 육체를 죽였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믿어요?" "글쎄요. 이제부터 박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달려있겠죠." 나는 건네받은 포도주를 한모금 넘기며 대답했다. "네. 실험은 성공적이었어요. 그렇지만 박진이가 최지현을 죽여버린게 문제였죠. 이제는 연구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박진이와 최지현이 한 몸에서 살았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박사는 내 물음에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연구의 초기에는 이러한 환혼 현상이 모녀 간에만 일어날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연구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전혀 다른 사례도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가령 이탈리아 북부 고대 남프칸 족은 성인 남자 사이에 그러한 환혼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구요. 이집트 고대 부족에서는 늙은 왕이 젊은 후계자에게 직접 환혼하여 들어갔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매우 공격적인 주술도 있었죠." "공격적인 주술이라뇨?" "그러니까 여태껏 연구해 왔던 것은 아주 일시적이고 이른바 혼이 겹치는 형태로 환혼이 이루어졌는데, 터키 북부 치와빌라 부족의 주술은 그것과는 다른 무엇이었어요. 그러니까 대상이 되는 이의 혼을 소멸시켜 버리고 그 육체를 다른 영혼이 차지하는 형태이죠." "그것도 연구의 대상이었나요?" "첨엔 아니었어요. 왜냐면 내가 연구한 주술은 주로 약물을 이용한 주술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공격적인 주술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어요." "다른 형태라면?" 나의 물음에 박사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내 눈을 쏘아보면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다. "솔직히 말할께요. 난 차지수 박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 최지현이예요. 난 박사의 몸이 필요했어요. 언제까지나 엄마의 몸 속에 한께 살 순 없었으니까." 나는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렇다면 왜 하필 차박사의 몸을 택한 거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의 몸으로 완전히 들어갈려면 공격적인 주술의 형태로 그의 혼을 소멸시켜버려야만 했으니까요. 공격적인 주술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어요. 그는 터키의 옛 부족의 잔재를 찾아 다녔고 마침내 한 동굴에서 주술의 그림을 보게되었어요. 그는 그걸 찍어와서 똑같은 크기로 이곳에 그렸죠. 뒤에 그림이 보이죠?" 나는 눈을 돌려서 차지수 아니 최지현의 뒤에 그려진 그 거대한 그림을 쳐다보았다. "주술을 저 그림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고대인들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계속해서 저 그림의 영향력 아래에서 생활하죠. 그러다 어느 순간에 혼이 스며들어가는 거예요. 따라서 그림을 계속해서 보아온 차지수 박사만이 주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어요. 난 어쩔 수 없이 그의 몸을 택해서 들어왔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나는 다시 한번 그 그림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기운이 쏟아지는 듯 했다. 어쩌면 그러한 주술 벽화라는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운 그림이죠? 첫 눈에도 뭔가 신비한 느낌이 오잖아요." "네." 난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자꾸만 머릿속이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의 주술에 내가 빨려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사람의 얼굴 형상 같기도 하고 어떤 풍경 같기도 한 그림은 내 눈앞에서 마치 요동치는 듯 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그러면서 그림도 따라서 어떠한 알 수 없는 형체로 변해가는 듯 했다. "난 지금은 차지수 박사의 몸에 들어있지만, 여기서 영원히 머물 수 없어요. 난 내 또래에 맞는 젊은 여자의 몸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요. 당신 같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몸으로..." 그가 뭐라고 말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의 눈앞에 있는 그림은 자꾸만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자꾸만.. 자꾸만... 꿈틀거리며 온 공간을 휘기 시작했다. 내 앞에 앉아있던 박사마저도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하늘 끝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나를 싸고돌며 내려왔다. 나는 무척이나 두려우면서도 또 한켠으로는 설레임을 느꼈다. 전혀 새로운 경험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이끌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점점........ 점점......... 나는..... 점점..... 내가 아닌........ 누군가로........... 자꾸만.......... 이제는 내가 이 모든 사실을 믿게 된 까닭을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최지현이라는 삶에서 어머니의 육체를 거쳐 저 둔한 차지수 박사의 몸을 거쳐 이렇게 젊은 여인 '강민정'이 되어 다시 태어난 나의 고백을........... 믿을 수 있겠는가? 끝으로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그 주술의 벽화를 공개한다. 다만 이 그림을 본다면 언제고 내가 당신의 육체에서 당신의 혼을 빼앗아 내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만 명심하길.........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자주감자 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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