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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저 나무가 쓰러지는 날까지
게시물ID : panic_192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2
조회수 : 169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9/05 18:12:26
"사랑해요. 저 나무가 산산조각이 나, 쓰러지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해요." 난 남자다. 사지 멀쩡하고, 게다가 여자들을 한 눈에 뻑 가게 만드는 얼굴을 가진 남자다. 난 특유의 말재주와 사교성으로 남들보다는 조금 빨리 성공이란 것을 움켜쥘지도 모르는 능력 있는 남자다. 여자란 무조건 사랑해줘야 하고, 존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매너 있는 남자다. 그리고, 벗겨진 여체를 두고 귀를 후빌 정도의 자제력 따위는 전혀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럽게 건강한 남자다. 그래서 나는, 바람을 핀다. 이건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 거지만 처음에는 단순히 바람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평생 밥만 먹고 사냐 이거다. 가끔은 라면도 먹고, 빵도 먹고, 그러는 게 다 사람 사는 거 아니겠는가? 내게는 평생 남자란 나 하나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자가 있다. 맹세컨데 난 결혼은 반드시 이 여자와 할 생각이었다. 다만 가끔씩 내 감성을 자극해 오는 여자들을 라면이나 빵 차원에서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딴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겨워 지고, 곧 밥 생각이 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내가 정아영이라는 여자를 만났다는데서 발생했다. 청순한 외모에 C컵 바스트를 가진 그녀는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물론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바람 정도의 만남이었다. 아영은 내게 꽤 괜찮은 라면과 빵이 되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행의 시작은 라면이나 빵인 줄만 알았던 그녀가 알고 봤더니 근사한 와인을 곁들인 스테이크였다... 이거다. 그랬다. 그녀는 굉장한 재력가의 외동딸이었다... 아영에게 빠져드는 속도는 빛의 그것이 무색할 정도로 재빨랐다. 그리고 내 이성의 대부분은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는 판단을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게 필요한 것은 아영을 질리게 하지 않을 능력과 -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다 -, 내 현모양처 순옥을 떼어버릴 수 있는 건덕지였다. 그리고 젠장, 후자의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순옥을 떼어버리기 위해 첫 번째로 쓴 방법은 무작정 연락을 끊기였다. 약속을 펑크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녀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모조리 무시했다. 착한 그녀의 인내심은 항상 내 오피스텔 앞을 어슬렁거리게 했고, 타이밍이 맞지 않아 그녀와 딱 마주친 그 순간조차도 나는 그녀의 기다림을 무시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핑계는 '피곤하다'였다. 그렇게 두 달,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빈말이라도 '헤어지자' 혹은 그 비슷한 멘트정도는 날린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정말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하며, 이때 담배를 연속으로 몇 가치 피워주면 좋다, 아무튼 눈물을 글썽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널 놓아줄게. 부디 나 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해." 이런 애절한 대사 몇 마디만 쳐주고 돌아서면 만사 오케이다. 그렇게 되면 난 여자에게 차인 속 편한 놈이 될 수도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너무나도 나만 사랑하는 순옥에게서는 절대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두 달을 공들여온 이 계획은 우리 회사 로비에 그녀가 맡기고 간 보약 박스를 받아듦과 동시에 끝이 났다. 정말이지 그건,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가 실패로 돌아가자 나는 곧장 차선책을 찾아야만 했다. 생각해 보면 제 삼, 혹은 제 사의 계획이 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방법을 쓰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아영이 드디어 결혼에 대한 얘기를 꺼냈던 것이다. 한번에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 나는 며칠을 벼루고 벼루다 드디어 강력 접착제 보다 더 끈질긴 그녀를 만났다.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우리... 정말 오랜만이죠?" 순옥은 단 일초라도 내게 대한 원망은 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을 내버려둔 나의 이기심에 한번쯤은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그녀가 내 천생 배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착한 기질이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짜증으로 다가왔다. "넌... 내가 밉지도 않니? 그동안 네게 연락 한번 없었던 내게 화조차 내지 않는 구나."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당신이 제게 소홀했던 그 순간까지 사랑해요. 아마도 당신에겐 이유가 있었을 거란 생각... 해요. 그것을 미안해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이유? 그래, 이유야 있지. 내가 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이유, 이렇게 너와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이유,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네 고백을 듣고 있는 이유, 나는 지금 이 순간 널 차버릴 거다. 그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제가 말한 적이 있나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즐거운 일에 웃음 짓고, 슬픈 일에 눈물짓는 것들과 같아요. 당신은 제게 있어 그런 사람입니다. 제 일상 그 자체, 제 생명 그 자체, 제가 속한 우주의 전부가 바로 당신이죠. 당신을 모르고 지냈던 이십 오 년을 어떻게 살아낼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지난 내 인생이 얼마나 초라하고, 슬픈 것이었는지 말이에요. 사랑해요, 동현씨. 제 목숨 보다 더... 사랑하고 있어요." 순간, 나도 모르게 커피 잔을 집어 던져 버렸고, 그것은 바닥이 난 내 인내심과, 이성을 짓누르는 조바심과,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내 자비심의 발로였다. "그만해!!" 불쌍하게도 그녀의 두 눈은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동현씨..." "이제 그만 하자. 더 이상 아닌 척 널 대하는 것도 고역이다." "동현씨..."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맞지 않아. 이제 그걸 알겠어."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렇다면 말해줘요. 그런 무서운 표정으로 모를 말만 하지 말고 말을 해 줘요. 고칠게요. 제가 고칠게요." 그녀의 큰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 나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왜 그때, 그 불쌍한 여자를 보며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난 지금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너와 나, 이 이상은 의미가 없어. 부디 나 같은 놈은 잊고 잘 살아라." "그러지 말아요, 동현씨. 사랑하는 거 알잖아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소용없는 것들이야." 난 울고 있는 그녀를 두고 계단을 내려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 - 계산을 했고, 종업원에게 친절하게 인사까지 한 후 카페를 나왔다. 그녀가 뛰어 나온 것은 내가 차에 시동을 막 걸려고 했던 순간이었다. "동현씨, 제발 얘기 좀 해요. 갑자기 저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지 얘기 좀 해요." "니가 싫어졌어.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떨어져!!" 멍하게 서 있던 그녀를 남겨 둔 채 차는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그렇게 그녀와 멀어져 갔다. 이것으로 찰거머리 같았던 그녀와는 끝이다. 난 이제 돈 많은 미인과 결혼만 하면 된다. 세상일이라는 건 알고 보면 굉장히 쉽다. 순옥을 떼어버리고 온 한 달여 동안은 행복한 비명을 질러 대기에 바빴다. 일이 풀리려고 하니 한 군데 막힘 없이 순탄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비록 가진 건 없지만 매사에 당당한 내 모습에 후한 점수를 주셨다. 돈은 있는 집이니 돈 욕심은 없고, 단지 인간성이 좋아 보이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도 하셨다. 인간성이 좋아 보인다... 적어도 그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은 그랬다. 내 인생의 화려한 2막은 그 커튼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아영과의 결혼 날짜가 잡혔고,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는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인의 회사로 출근하기 하루 전, 내 꿈같은 행복에 파장을 일으키기 충분한 일이 발생했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순옥과의 떨떠름한 재회에 있어서 나는 조금의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를 만나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결론은 백해무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일방적으로 정해버린 그 시간과 장소에 동의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다시금 내 의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매달리는 여자를 보며 얻을 수 있는 남자의 우스운 자긍심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한달 만에 만난 그녀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움푹 들어간 눈, 초점 없는 눈동자, 거칠어진 피부, 메마른 입술, 그녀는 완벽하게 실연 당한 여자였다. 정말 퍼펙트 한 연출이었다. "얼굴이 안 돼 보인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 미친놈, 이 순간에도 작업성 멘트를 남발하다니... 나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본능에 가까운 매너에 고개를 저어 경고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오늘로 완벽히 정리를 끝내야만 한다. 그런 다짐을 하는 동안 내 표정은 점점 차갑게 굳어져 갔다. "이번에는 너무 길잖아요, 동현씨... 예전에는 금방 돌아오곤 했잖아요." "무슨 말이야?" "당신이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거, 다 알고 있었어요. 그녀들과 무슨 짓을 하는 지, 다 알고 있었다구요. 그래도 전 믿고 기다렸어요. 당신은 항상 돌아오곤 했으니까... 당신이 매번 나 아닌 다른 여자들과 수많은 밤을 보내도 항상 마지막은 나였으니까... 전 당신을 믿었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럼 그동안 내가 바람 핀 것을 다 알고도 모른 체 했단 말인가? 매번 다른 여자들과 매번 다른 밤을 지새웠던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자기를 기만했던 내게 항상 신뢰로 가득한 눈빛을 보여 줬다는 것인가? 가끔 여자들이 무서울 때가 있다. 그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절대로 남자들에게 들키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다는 자비심을 베푼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 중에서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여자가 제일 무섭다. "정말 끔찍한 여자구나, 넌. 그걸 다 알면서 날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어. 세상 여자들이 모두 등을 돌려도 너만은 내 곁에 있을 거란 어이없는 믿음을 가지게 했다구. 정말 무서운 여자야. 그걸 다 참아내면서 날 봐주는 듯 그렇게 곁에 있었던 거니?" "당신을 믿었다고 했잖아. 결국엔 내게 돌아왔으니까. 난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니까요." "그만해!! 그 사랑 타령도 지긋지긋해. 차라리 잘된 거 아냐? 난 어차피 너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는 놈이야. 너도 그걸 알고 있었다니 얘기가 수월하겠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난 그런 놈이야. 그러니까 나 같은 놈에게서 제발 좀 떨어져 줘."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내게는 쉬웠을 줄 알아? 매번 다른 향수를 묻히고 날 안는 당신이, 내게는 수월했을 것 같냐구?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죽을 것 같은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어. 당신이 내 삶의 전부였으니까. 당신 때문에 숨은 쉬고 사니까. 그걸 포기해 죽을 수는 없잖아..." 이 여자도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채기를 드러내 아파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천사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봐 준 지난 몇 년 보다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이 보다 인간적이다. 그래... 지긋지긋하긴 해도 니가 사람이었다는 거 하난 확실히 알겠다. "그러니까 이젠 참지마. 더 이상은 안 그래도 돼. 내가 그렇게 해 준 대잖아. 너도 이젠 너만 바라 봐 주는 남잘 만나야 하지 않겠어? 지금은 아파 죽을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곧 내가 고마워 질 거야. 나 같은 놈이 니 인생에서 빠져준 걸 다행으로 여겨질 날이 있을 거라구. 그러니까 가라고 할 때 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면 되는 거야." 이 이상 그녀와 대면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이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난 제법 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여유 있는 동작으로 코트를 집어 들고,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마지막으로, 흐느끼는 그녀를 돌아보며 위로의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그건 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잔뜩 여유를 부려대던 나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이후로는 신속히 움직였다. 사실 일초라도 빨리 이 곳에서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달리는 여자는 정말이지 귀찮다. "동현씨!!"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돌아서 나가던 내 다리를 그녀가 붙들어 버린 것이다. 겨우 가슴을 진정시킨 나는 내 발 아래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신파란 말인가... "동현씨, 날 버리지 말아요. 사랑하는 거 알잖아요. 당신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나한테 이러지 말아요." "너야말로 이러지 마!!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만나는 여자, 곧 정리 할거잖아요. 당신, 그렇게 오랫동안 한 여자만 만나는 사람 아니잖아요. 나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럴게요. 네?" "너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들어. 넌 이제 내 관심 밖의 여자야. 세상 여자가 너 하나밖에 없다해도 난 너 필요 없어. 알아?" "동현씨..."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 그래, 그 여자와 나, 곧 결혼 할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 난 이제 공식적으로 그 여자의 남자가 되는 거라구. 그러니까 너도 니 살 길 찾으란 말이야!!" 결혼... 드디어 그녀에게 말하고야 말았다. 이 정도까지 충격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 줬으면 좋았다. 내 다리를 붙들고 있던 순옥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금 힘을 주어 다리를 빼내려 했다. 거의 동시에 그녀의 팔이 다시 내 다리를 감쌌고, 그것은 나보다 조금 빨랐다. 결국 난 다시 그녀에게 잡혀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안 돼요, 동현씨. 날 버리면 안 돼요.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요. 세상에 어떤 여자도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을 거란 거 다 알잖아요." "지금 이러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 이건 사랑도 뭣도 아냐. 너 지금 이러는 거 집착이다. 잘 생각해봐, 순옥아. 넌 날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건 조금은 습관과도 같은 감정일 거야. 습관이 몸에 배어 그걸 못하게 하니까 집착이 생기는 거라구.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다. 사랑도, 나도, 다 무의미해 질 거야." "아뇨. 이건 집착이 아니에요. 전 정말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제 사랑이 변할 거라구요? 동현씨, 당신을 아직도 절 모르시는 군요. 어떻게 제 사랑이 변할 수가 있겠어요. 당신은 내가 가진 전분데, 내 생명 그 자첸데... 어떻게 그것이 변할 수가 있다는 거죠? 제 사랑은 변함이 없어요. 처음에도 그랬고, 이렇게 모질어진 당신을 보는 지금도 그래요. 기억해요? 당신에게 했던 얘기? 저 나무가 산산조각이 나 쓰러지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해요. 제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오... 신이시여!!! 순옥이 원래 이렇게 고집이 센 여자였던가? 그러고 보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성격이었고, 또 어떤 기질이었는지 말이다. 내겐 한번도 보여주지 안 않았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웃고, 말하고, 행동하는 여자였을 뿐이다. "괜한 나무까지 들먹이며 그러지 말아. 시간이 지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오늘 이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말이야. 이제 그만 하자. 날 놓아줘. 너와 이러고 있는 게 지옥 같으니까." 그렇게 말을 마친 나는 조금 전 보다 힘이 더 들어간 다리로 그녀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가 빨랐다. "아기를 가졌어요." 순간 귀가 멍해진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뭐, 뭐?" "당신의 아기를 가졌다구요. 우리들의 아기에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이 무슨 유치한 레파토리란 말인가? "수, 수작 부리지마. 어떻게 아기를 가졌다는 거야? 우리가 만난 지가 언젠데? 말도 안 돼." "3개월이래요. 당신과 보냈던 마지막 밤에 운명처럼 생긴 아기에요. 우리 둘의 사랑이 맺은 결실이라구요. 이 아이 마저도 부정할건가요?" 3개월...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날이 있었다. 헤어질 결심을 하고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녀를 안았던 밤. 젠장, 그녀와 몸을 섞은 게 어디 그 날 뿐이었냔 말이다. 왜 하필 그 날 아기 따위가 들어서 버린 건지, 이건 말도 안 된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수많은 영상이 내 눈앞을 스쳐 달아났다. 아름다운 아영의 눈부신 미소, 장인의 회사에 마련된 내 자리, 화려한 결혼식, 달콤한 신혼...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은 아이를 안은 채 날 노려보고 있는 순옥의 모습이었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순 없다. 여기서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으헉!!! 커...억....." 내가 어떻게 한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난 다만 그녀의 억센 팔에서 내 다리를 자유롭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의 배를 걷어찼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카페 구석에 쳐 박히다 시피 엎어져 있는 그녀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고, 치마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선열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를 황급히 빠져 나온 것은 배를 움켜쥔 채 신음하고 있는 그녀를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고통에 일그러진 그녀의 눈이, 날 삼켜 버릴 듯이 노려보는 그녀의 새까만 눈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서 도망쳐 온 일주일은 거의 내 정신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도 순옥이 날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노이로제 상태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이주 째에 접어들면서 그런 것들에게서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내겐 어떠한 연락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연락도, 또는 그녀의 부음(訃音) 조차도... 그리고 드디어 아영과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루 하루가 더할수록 아영에 대한 내 사랑은 어이없이 커져만 갔다. 그래서 알았다. 난 한 여자만 사랑할 수 있는 기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상대를 이제서야 만났다는 것을 말이다. 행복했다. 가끔 내 인생에 불어온 이 핑크빛 행복이 꿈이 아닐까 하는 기우가 들 정도로 행복했다. 그리고, 덕분에 순옥이라는 여자는 완전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랬는데... "자기, 자기한테도 이런 로맨틱한 면이 있었어?" 내 가슴을 파고들며 뇌 세포를 자극하는 콧소리로 아영이 말해왔다. "무슨 말이야?" "핸드폰 메시지 말이야. 나 정말 감동 받았어." "응?" 나 같은 완벽한 작업맨도 절대 되지 않는 것이 그것이었다. 핸드폰 메시지. 그걸 두드리고 앉아 있자면 닭살부터 돋아났다. "저 나무가 산산조각이 나 쓰러지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기... 날 정말 그렇게까지 사랑했던 거야? 응?" 아영은 행복에 들뜬 목소리로 계속 재잘거렸지만 난 이미 그것이 들리지 않았다. 한 순간 머리 속이 새하얘진다는 말, 그제서야 알았다. 등줄기가 오싹하고, 머리가 쭈뼛 선다는 느낌도 그제서야 알았다. 그 짧은 순간, 난 참 많은 것을 몸소 깨달았다. 그녀다!! 찰거머리 같은 그 년!! "근데, 자기야. 어디에 있는 거야?" "으, 응?" "이 나무 말이야. 도대체 어떤 나무 길래 자기가 이런 메시지를 다 보냈어? 응?"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저 나무... 순옥과 함께 첫 여행을 간 곳, 푸른 산이 있고, 그 보다 더 푸른 바다가 넓게 펼쳐진 곳, 그리고 사랑하는 두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아 있었던 바닷가 앞 새하얀 벤치. 그 곳에 있었다. 100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던 그 것, 수 백 번의 태풍이 불고, 수 천 번의 해일이 일어났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그 어마어마한 나무. 그 위대한 생명 아래서 순옥은 내게 속삭였었다. 저 나무가 산산조각이 난 채 쓰러지는 날까지 사랑한다고... 그녀의 집착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사진이 아영에게 배달된 것은 내가 그녀를 위해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던 날이었다. 고급 유람선, 가장 경치가 좋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철없던 시절의 그것처럼 마냥 설레어 왔었다. 그녀와 나의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내게 있어서 그녀와의 매 순간은 모두 기념일이었다. "설명해 줘."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내 앞에 앉은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먼저 나왔다. 그녀가 내 앞으로 내민 봉투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스틸마다 주인공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매일 아침 거울로 보는 얼굴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제각각 얼굴이 틀린 여자들이었다. 물론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 사진들... 어디서 난 거야?" "자기한텐 그게 중요한 모양이지만 난 아냐.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수 십 명의 여자들이 왜 당신과 이런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느냐 하는 거야. 대답해 봐." 사진 속의 그녀들은 분명 내 바람의 상대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과 이런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누군가가 몰래... 찍은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가 하는 인물의 정체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사진들 중에서 유일하게 빠져 있는 그녀, 내 인생을 구질구질하게 만드는 그녀, 난 마치 눈으로 본 것 같은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순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흔들고 있는 그 모습을 말이다. "변명하지 않을게. 그래, 내가 만났던 여자들이야. 널 만나기 전에 내 외로움을 달래준 여자들이지. 난 그녀들에게 고마워. 적어도 그녀들과 만나고 있는 동안은 그 순간에만 충실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순간은 너야. 내가 지금 충실한 사람은 그 사진 속의 여자들이 아니라 너라구. 난 내 과거가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하지만 평생을 사랑할 니가 그 사진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뼈져리게 후회가 돼. 난, 널 왜 이렇게 늦게 만났을까?" "동현씨..." 금새 눈물을 글썽이며 내 품에 달려드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최순옥... 대체 어디까지 할 셈이냐...?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도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다지 선택적이지가 못했다. 그녀를 만나 추궁하는 것이 어쩌면 벌집을 쑤셔 놓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 불쾌한 기다림에 응답이 왔고,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왠지 모를 허탈감을 안겨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환장할 노릇은, 그 응답이 내려진 쪽이 내가 아닌 아영이었다는 점이다.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아영과 만나기로 한 시간 보다 30분을 늦어 버린 내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달리던 걸음을 멈추던 순간이었다. 점심 시간이 지난 터라 레스토랑은 조용한 편이었고, 언제나 그랬듯 사랑스러운 그녀를 한 눈에 알아 봤었다. 내 눈이 그녀를 찾자 내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어렸고, 30분을 기다리면서 토라졌을 그녀를 달래기 위한 수 만가지 방법들이 머리 속에 가득했었다. 하지만 그 유쾌했던 내 감정은 그녀에게 거의 다 다가섰을 무렵 완벽하게 불쾌해졌다. 아니다. 불쾌가 아니라 불안이었다. "어, 동현씨 왔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나 많이 기다렸어." 아영은 탓하는 듯한 말들을 내뱉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전혀 토라진 기색이 없었다. 난 굳어진 얼굴로 애써 웃으며 그녀 옆자리에 앉았고, 약속되지 않은 게스트를 마주 봐야만 했다. "아, 자기야 인사해. 여긴 최순옥씨. 자기 기다리는 동안 내 말상대가 되어 주신 분이야. 순옥씨 아니었음 굉장히 지루했을 거야." 난 떨려오는 입술을 겨우 추스르며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켜댔다. 맞은 편에서 날 바라보는 순옥의 너무도 초연한 태도가 오히려 더 끔찍했다. 그녀는 악마였다!! "기다리시던 분이 오셨으니 전 그만 일어서야 겠네요." "그러지 말고, 점심 같이 해요. 순옥씨도 점심 전이시죠?" 순옥을 잡는 아영에게 난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내 눈을 힐끔 보던 순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닙니다. 점심은 두 분이서 하세요." 아영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했다. 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정리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이 두 여자는 마치 이웃 사람을 만난 듯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결혼... 축하드려요. 남편 되실 분이 듣던 대로 좋아 보이시네요. 행복하시겠어요." "그렇죠? 우리 둘, 굉장히 잘 어울리죠?" 내 팔을 붙잡으며 기대오는 아영이 처음으로 불편해졌다. 적어도 순옥의 저런 눈빛만 없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잘 가요, 순옥씨. 말상대 해줘서 고마웠어요. 꼭 이쁜 아기 낳으세요." 순간, 아기란 말에 심장이 털썩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그럼..." 순옥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내 시선은 출입구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대체 어떻게... "자기, 뭐 먹을 거야?" "으... 응?" "무슨 생각해? 자기 무슨 일 있어? 약속 시간에도 잔뜩 늦구 말이야." "일은 무슨... 아무것도 아냐." "피..." "근데, 저 여잔..." "아... 순옥씨?" 그녀의 이름을 아주 친근하게 부르는 아영이었기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알게 됐어. 내가 자기 거래처 사람인 줄 알았나봐." "넌 왜 모르는 사람하고 앉아서 그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너같이 곱게만 큰 여자한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하니?" "동현씨..." "후...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난 니가 걱정이 돼서 그래. 저런 모르는 여자하고 30분 가까이 얘길 하고 있었다니 정말 불쾌하다." "아니야. 순옥씨 나쁜 사람 같진 않았어.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다구." "암튼 다시는 모르는 사람하고 이러지 마. 알겠니?" "알았어. 자긴 내가 그렇게 걱정이 돼? 어린애도 아니구. 우리 아빠 보다 잔소리가 더 심해. 피..." 그녀는 다시 내 팔에 안겨왔다. 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조금 쓰다듬어 주었다. "근데 순옥씨, 대개 불쌍한 사람이야." "왜...?" "십 년을 만났던 남자한테 버려졌대. 아기까지 생겼는데도 말이야." 등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남자 곧 결혼한대나봐. 상대는 돈 많은 집 외동딸이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어떻게 돈 때문에 버릴 수가 있어? 세상이 끔찍한 건 그런 남자들이 있기 때문이야." 젠장... 이건 말도 안 된다. "정말이지... 그런 놈들은, 다 죽어야해... 안 그래, 동현씨?" 아영을 집 앞에서 그녀에게 가벼운 작별 키스를 하며, 잘 자 라는 말을 속삭이고 있는 내 얼굴에는 천사의 탈이 씌워져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그 탈은 확연하게 벗겨지고 없었다. 난 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핸드폰의 연결음이 울리는 내내 손은 떨리고, 입술은 바짝 말라붙었다. "당신에게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어요." 순옥은 너무도 태연한 음성으로 내 전화를 받아 들고 있었다. "너... 무슨 짓이야? 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예요. 당신이 돌아오는 것... 그걸 바라는 게 잘못된 일인가요?" "넌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제 그만해요. 당신 때문에 그 여린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요." "하? 누가 불행해진다는 거야? 난 누구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어. 너야말로 더 이상 날 화나게 하지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당신의 아이는요...? 지금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당신의 아이는요? 이 아이의 아빠는 당신 밖에 없어요. 우리에게 당신... 이러면 안 되요." "닥쳐!! 내 아이라고 인정한 적 없어. 그걸로 내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너도 니 살 길 찾으려면 그딴 건 지워버려. 알겠니? 이 이상 날 귀찮게 한다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다." 양심의 가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손에 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순옥은 여린 여자였다. 이 정도 해뒀으면 말귀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게 잘 될 거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믿음을 비웃듯 그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순옥의 마지막 발악이자 히든이었음에 분명한 그 사진이 아영에게 보내진 것은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물론 나와 그 빌어먹을 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받아 든 아영이 충격을 받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혼절한 그녀를 보며 그녀의 부모가 날 질책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했다. 문제는 그 당연한 일들이 내게는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고지가 눈앞인데 여기서 돌아가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버님, 제발 아영이 얼굴 한번만 보게 해 주십시오." "돌아가게.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아영이 만나지 말게." "아버님!!" "젊은 사람이 세상을 왜 그렇게 살았나?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자네가 그나마 양심이 있고, 사내놈이라면 돌아가서 책임을 지게. 충격으로 쓰러진 우리 아영이 보다 자네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그 여자에게 가라는 말일세.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만 내 집에서 나가주게." "아버..." 난 결국 아영을 만나지 못한 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던져졌다. 내 맘을 아는 건지, 혹은 비웃는 건지, 시야를 흐릴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난 단지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난관이 발생했지만 나는 그것을 극복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마지막 난관 하나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 여보세요?" "어디야, 지금?" "동현씨?" "어디야!!!" 폭우를 뚫고 운전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충분히 미쳐 있었다. 순옥에게 가는 길이 그 어떤 험난한 길이라도 난 지금 그녀를 만나야 한다. 내 난관의 끝을 위해서... "여기... 우리가 처음 여행 왔던 곳이에요. 바다도 여전하고, 우리가 사랑을 속삭였던 하얀색 벤치도 그대로에요. 당신, 기억해요? 우리가 함께 감탄했던 그 나무 말이에요. 조금도 변함이 없네요. 이런 빗속에서도 그 경이로운 생명은 절 다시 감동케 하네요. 제 사랑도 그래요, 동현씨. 어떤 고난이 닥쳐도 변함 없어요. 사랑해요..." 조금전 통화에서 그녀가 한 말이 떠오르자 치가 떨렸다. 순옥은 미친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나도 미쳤다. 모든 건 저 나무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나무... 때문이다. 세 시간을 정신 없이 달렸다. 그것도 이런 폭우 속에서는 불가능한 속도로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난관이 있는 곳. 차에서 내리자 마자 내 온 몸은 흠뻑 젖어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빗방울들이 연신 얼굴을 때려댔다. 난 겨우 겨우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 봤다. 신기한 일이었다. 순옥의 말대로 이 곳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 폭우가 쏟아지고, 해일이 일어나고, 가끔 번개가 친다는 것말고는 모든 게 그대로 였다. 하얀색 벤치도 그 자리에 있었고, 또... 그 빌어먹을 크기의 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씨팔..." 난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언젠가 별장에서 썼던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사실 이것이 왜 내 트렁크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짐들과 섞여 들어갔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내 무의식이 그렇게 시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이 손도끼가 분명 내 트렁크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손도끼의 무게가 묵직하다. 난 씩씩거리며 나무를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따금씩 치는 번개로 땅에 비치는 내 그림자는 괴기, 그 자체였다. 비 오는 날, 도끼를 손에 들고 미친 듯 걸어가는 모습은 내가 상상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다. 그 나무에 다다른 나는 거친 숨을 몰아 셨다. 다가서고 보니 나무의 크기는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마치 날 내려다보며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저 나무가 산산조각이 나 쓰러지는 날까지..." 순옥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파도 소리, 천둥소리,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 산산조각이 나 쓰러지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해요..." 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환청은 계속되었다. 도끼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 간다. 난 붉어진 눈으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눈 속으로 떨어지면서 통증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무만은 이 폭우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날 비웃기라도 하는 듯 세차게 가지를 흔들어 댔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분명히 들었다. 저 끔찍한 나무가 내게 하는 얘기를... "제 사랑은 변함 없어요... 사랑해요..." "으아~~~~악!!! 그만해!! 그만해!!" 난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가 나무에 닿는 둔탁한 느낌에 손바닥이 저려 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 이 나무만 없어지면 된다. 이 나무만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면 모든 게 다 끝난다. "없어져. 없어지란 말이야!! 날 좀 내버려 둬. 이제 그만해~~~~!!!" 내 비명 소리를 천둥소리가 잡아먹어 버린다. 난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아파 올 때까지 도끼질을 해댔다. 아무리 아무리 해도 만족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것이 내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도끼질을 계속 했다. 그리고, 끝났다. 나무는 사라졌다. 이제서야 난 겨우 모든 난관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다. 이제 됐다. 이제... 난 지금 아영을 기다리고 있다. 창 밖으로 어느덧 새하얀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눈 위로 내리쬐는 햇빛이 눈부시게 빛났다. 나무를 없애 버리고 난 뒤부터 두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순옥도... 그 지겹던 순옥도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다. 나무가 없어졌으니 그녀가 날 붙잡을 수 있는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다. 모든 건 완벽했다. 이제 아영과 결혼을 하고, 장인 회사에서 내 꿈을 펼치며, 그렇게 살아 주기만 하면 된다. 아... 어서 아영이 와야 할텐데...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 "환자의 상태는 좀 어떤가?" "별 변화는 없습니다. 일단은 스스로의 강박관념이 너무 강해서 말입니다." "끔찍한 일이었어... 하긴, 저 친구의 입장으로선 그렇게 알고 있는 지금이 덜 끔찍하겠지만 말이야." "치료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습니다. 오후에 김박사님이 귀국하실 겁니다." "흠... 자각을 시키겠다는 건가?" "며칠 전에 강검사가 다녀갔습니다. 재판 일이 다음 주로 정해졌다고 하더군요. 그는 이번 재판에서 어떻게든 결론을 짓자는 것 같았습니다." "결론이라... 이것 또한 딜레마군. 우리는 일단 의사가 아닌가? 무엇보다 환자의 안위가 우선인데 말일세. 자각이 끝난 후 저 친구가 받아 들여야 하는 현실이 만만치 않을텐데..." "그렇겠죠. 자신은 나무를 잘라 버렸다고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무가 있기는 했었나?" "그 곳이라면 저도 압니다. 대학 시절, 몇 번 엠티를 간 적이 있었거든요.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었죠. 그 나무는 분명 있었습니다. 100년은 넘게 그 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그 마을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겠구만." "그랬죠. 그랬는데 이년 전 어느 돈 많은 사업가가 그 땅을 매입했습니다. 그곳을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었죠.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이 그 나무를 베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 "외견상 안 좋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래되다 보니 을씨년스럽기도 했고... 아무튼 그때 동네 주민들 반발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가 없었다는 말인가?" "네. 이년 전 철거 작업이 완료 됐고, 서동현이 그 곳에 갔을 때는 이미 그 나무는 그 곳에 없었습니다." "그것 참..." "그 나무는 서동현의 망상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던 겁니다. 자괴감이나 두려움, 상실감 같은 것들이 만들어 낸 강박관념의 실체였죠." "인간은 때론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도 하는 법이지... 근데, 저 친구는 매일 왜 저렇게 창 밖만 쳐다보는 건가?" "약혼자를 기다리는 겁니다. 벌써 일년 째, 계속 저러고 있습니다." "약혼자라면 그 태화그룹 외동딸을 말하는 건가?" "네. 몇 달 전 GK 통신 장남과의 결혼식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여자 말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거로군." "태화그룹에서는 서동현과의 관계를 쉬쉬하는 분위깁니다. 몇 번 접촉이 있었지만 그룹 측은 유감이라는 입장만 내 보일 뿐, 더 이상의 액션은 없었습니다." "하긴 이보다 더한 이미지 실추가 어딨겠는가? 모두들 자기 앞에 놓여진 밥그릇이 가장 먼저니까 말일세." "이건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문제지만... 왠지 저 친구,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인간은 누구나 다 불쌍하다네. 누가 덜 불쌍하고, 더 불쌍하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지... 김박사가 들어오면 내게도 알려 주게." "그러겠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최태성 박사는 발길을 돌려 젊은 의사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일 불쌍한 건 죽은 여자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나... 도끼로 잘려나간 몸 보다 그 심정이 훨씬 끔찍했을 거라는 걸 말이야..." 잠시 후 젊은 의사 마저 자리를 떠나고, 아무도 남지 않은 315호 창문 안으로 벽에 붙어 창 밖만 쳐다보고 있는 불쌍한 남자의 비썩 마른 뒷모습이 보였다. 인간은 누구나 다 불쌍한 것이지... fin.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사빈 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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