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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스압]자화상
게시물ID : panic_192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3
조회수 : 20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9/05 18:30:58
1. 살인자 수기 그림을 바르게 그리는 자세라 함은 사물의 선이 가진 특성을 정직하게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익히기 위해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반사선 그리기, 거꾸로 그리기, 그림자 그리기 등 여러가지를 공부한다. 미술학원에서는 그것을 몇 년간 계속 트레이닝하게 한다. 같은 캔버스를 펼쳐 놓고 같은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냈는지에 따라 점수를 얻고, 그것으로 평가받는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맞기도 한다. 그렇게 몇 년동안 계속 사물의 정확한 모습을 그려내도록 훈련받은 미술 지망생들은 훌륭한 미대생으로 성장한다. 이후에 그들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위의 이야기들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청소년들 중 한 유형인 미대 지망생들의 모습을 허술하게나마 꾸며내본 것이다. 예체능으로 진출하는 학생들은 그 길로 나가서 자신들의 진로를 찾으려 한다. 즉, 먹고 살 길을 일찍부터 파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문화되고 특수한 교육이 그 위에 있다. 그것은 그들을 ‘그림그리는 기계’ 로 만든다. 반면 그림이라는 예능분야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거리이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 넘쳐난다. 의외로 그 중에는 놀라울 정도의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그림으로 뭔가를 해내고 싶다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이 투영된 뭔가를 해내고 싶다는 다소 엉뚱한 공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림으로 먹고 살 것이냐(그림을 그리는 기계가 되느냐), 그림으로 뭔가를 만들어낼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일까? 이것이 내가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미대 지망생들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이다. 하지만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애초부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내게 중요했던 것은 내가 그런 밥벌이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파리똥 같은 재능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스물 두살의 평범하지는 않은 청년이다. 10년이 넘게 그림에 손을 대고 있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 그림은 먹고사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도 내가 마음을 먹고 미대를 나온 뒤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서 그것으로 먹고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내 충분한 관찰력과 표현력, 즉 미술적 재능은 충분히 날 뛰어난 디자이너로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래 전 끔찍한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그리고 그들에게서 혼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평생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은 나는 특별히 어떤 일을 해서 먹고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나는 내게 주어진 관찰력을 통한 사물의 분석과 그것을 내 몸을 통해 화폭의 그림으로 만들어 넣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부터 써 보고자 하는 글은 그 지대한 관심이 내 앞에 불러낸 어떤 끔찍한 사고에 대한 서술이다. 그림에도 관심이 많지만 관찰을 통해 뭔가를 창조해내는 일에는 대부분 관심이 있는지라 나는 글에도 꽤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될 누군가가 이제부터의 수기에 대해 글에는 전혀 조예가 없는 어설픈 화가의 두서없는 문장을 기대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다만 지금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 어떤 힘을 방해하고 있는 심각한 요소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곧 내 눈앞으로 다가올 차가운 죽음의 그림자가 내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기 직전의 캔버스에 덮여 무서운 눈초리로 날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글을 다 쓰는 대로, 어쩌면 이 글을 다 마치지 못하고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을 다 쓰고도 마지막 할 일이 남았다. 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필생의 공을 들이는 일들을 하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지만……그만두자. 어쨌든 덜덜 떨리는 손마디가 키보드를 놓쳐버리기 전에 빨리 이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것의 본질을 파악한 뒤 묘사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내 그런 취미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었던 그림의 장르를 따진다면 그것은 인물화, 좀더 범위를 좁힌다면 초상화였다. 내게 있어 얼굴이라는 그림의 소재는(얼굴이라는 소재 그 자체인지, 아니면 얼굴로 그림을 그려내는 과정인지는…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화가적 재능을 발현시켜 줄 수 있는 거대한 출구와도 같았다. 대체 어떤 풍경이, 혹은 어떤 정물이나 내 안의 추상적 형상이 인간의 얼굴, 갖가지 감정과 표정이 뒤섞인 그 형상의 묘한 역설적 하모니만큼 좋은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여러가지 특성을 가진 얼굴색들을 가진 얇은 피부 아래의 섬세한 근육 조직들의 조화, 인간의 두뇌는 근육조직들로 연결된 신경 세포들에 미세한 명령을 내리고 그 신호를 받은 근육들은 바늘의 명령을 받은 실처럼 꿈틀거리며 조금씩 움직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움직임이다. 모기눈물만한 규모의, 그것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조합되고 조합되어 인간의 수백가지 표정들을 만들어낸다. 물리적 절차에 의한 물리적 움직임이 물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얼굴 바깥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전혀 관계없는 근육들의 떨림과 그로 인해 드러난 인간의 표정들…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지만 그의 안에 존재하는 가장 예술적인 것들 중 하나이리라.. 그 아름다운 절차와 움직임과 감정의 표현들을 포착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화폭에 담아낸다는 것! 내 안의 화가적 재능으로 이루어진 인화지에 사진을 찍어 재구성한 뒤 화폭에 옮기는 과정… 진정한 예술가에게 진정한 예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무서운 전율이다. 글로 옮기는 도중에도 그것을 다시한번 머릿속에서 되돌려 보자니 내 안에서 뭔가 부르르 떨려 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최고가 아니면 하지 말라! 이것은 부모님을 잃고 외로운 생활을 시작한 뒤로부터 내 인생의 어떤 방향 지침을 제시해 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인간의 얼굴!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화재(畵財)의 최고봉인 것이다. 그 이외의 어설픈 것들은 내게 있어 어떤 그림도 그리게 해 줄 수 없었다. 철없던 시절 눈앞에 널려 있는 정물들이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아 보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스케치를 하려고 구상선을 한줄 그을 때 바로 싫증이 나버렸다. 지금 내 쓰레기통에는 박살이 난 오래된 캔버스들이 꽤 많이 쌓여 있다. 그중 절반 정도는 아마 인물화가 아닌 그림을 그리려다 부숴버린 캔버스들이 아닐까 싶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간의 얼굴을 제외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관찰과 분석의 즐거운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얼굴을 화폭에 옮기는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싫어하는 것도 있었으니 바로 그 얼굴들을 가진 인간들과 직접 마주치는 일이었다. 그것은 어릴 적 내 유화용 기름이 폭발해 부모님을 잃은 뒤 내게 있어서는, 고귀한 신념과도 같은(내 주위의 사람들은 그것을 강박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겠지만..)것이었다. 그렇다!. 기름이 폭발한 뒤부터였다! 영원히 물과 섞일 수 없는…자신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는 불에 친한 이단적인 존재…. 저주받은 액체가 아닌 액체들이여…. 처음에 나는 사진을 구했다. 부모님을 잃고, 인간과 마주치는 것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던 그때…그렇지만 인간의 얼굴을 그려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천천히 자각하기 시작했던 그때에는 직접 사람의 얼굴을 마주치고 그림을 그려낼 자신이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내 안의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내 절대적인 미술적 재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걱정되었던 것 뿐이다. 나는 부모님이 내게 남겨주신 수많은 재산들을 이용했다. 그들이 내게 남긴 재산을 절반만 사용해도 여러 면에서 가치가 높아 기천만원을 호가하는 사진들까지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사진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것에 드러난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으로 나의 천부적 재능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점에 흥미가 있었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 혹은 아름다운 표정, 아니 인간 얼굴의 아름다운 특성들이 드러날 수 있는 사진들이면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컴퓨터 뒤쪽으로 보이는 책꽂이에는 10년 전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전까지 수집해온 훌륭한 인물 사진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언뜻 살펴봐도 수천점이 넘는다. (너무 많아서 몇 점이나 수집했는지 정확한 수치는 잊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그 훌륭한 인물 사진들 속에서 내 특별한 재능의 소재가 될 자격을 갖출 만한 사진을 골라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오랫동안 난 사진들을 뒤졌다. 몇점의 지극히 훌륭한 인물의 사진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고심과 고심을 거쳐 내 그림의 소재가 되도록 선택받은 사진들 안의 인물들의 표정엔 인간의 사고의 본질을 드러내는 절차와 과정, 그리고 그것의 결정체인 너무나도 예쁜 무언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내 특별한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는 정신없이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10년의 세월간 아마 7,8년동안, 하루의 시간으로 나누어 본다면 24시간중 16시간 이상을 캔버스와 물감, 화구들과 함께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에 전력을 바쳐 투구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나에게도, 그리고 그것의 대상물인, 내 그림의 소재가 되어 준 그것들에게도…. 의미없는 순간의 포착일 뿐인 사진기의 거무튀튀한 필름 속에 담겨 있다, 역시 어두침침한 현상실 안에서 겨우 세상빛을 본,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일회적, 혹은 인스턴트적인 느낌을 절대 지워버릴 수 없었던 수많은 인물사진들은 나로 인해 화폭 안에서 살아 있는 그림으로 변화해가는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려 생명을 부여한 소재들로부터 감사받는다는 느낌…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희열이었다. 일반적인 기쁨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황금빛 감정이었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난 창조주였다. 어리석게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인간 따위와는 격이 다른…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으로 창조주에게 감사할 줄 아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훌륭한 예술품을 창조해낸 창조주였던 것이다. 완벽한 생명의 부여! 멋진 예술품의 가치는 영원한 법이다. 그들은 그 예술품으로 태어났고 내가 그들에게 부여한 생명의 가치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나는 내가 수집한, 그리고 내 그림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얻은 사진들에게는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창조주이자, 절대자였다. 내 위대한 재능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들도, 생명을 얻은 사진들이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적어도 화재 사고를 당한 직후의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는 그랬다. 사진이라는 것이 내 관찰력과 표현력, 특별한 재능을 세상으로 내놓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건 1년 전부터였다. 막 스무살이 될 때의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더 이상 사진을 보면서 인물화를 그리는 데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진들을 수집하고 그것에 드러나 있는 인물의 특성들과 인물의 모습들을 그려내는 것에 무엇보다도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 거짓말처럼만 느껴졌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사진을 통한 인물화를 포기한다면 나는 내 고귀한 신념과도 같은 인간과의 마주침에 대한 거부 역시 포기하는 셈이었다. 내 고귀한 신념…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내 재능을 나에게 주신 나보다 높은 단계의 신이 내리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남에게 의미있을 뿐인 사진은 더 이상 너의 관찰과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 사진…인간의 살아 있는 모습들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사진사’라는 의미없는 직업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그 환상은 그들에게만, 그리고 맹목적으로 그들을 추종할 뿐인 어리석은 자들에게나 의미있을 뿐 화가이자 창조주인 내게 의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들이 대체 정물과 다를 점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차가운 인화지에 싸구려 재료로 인화된 한장의 개 같은 종이쪼가리가 아니었던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깡통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왜! 이 따위 소재에 내 특별한 재능을 수년간 내 모든 것을 바쳐가며 허비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세한 정물화를 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왜 인물화에 그토록 집착했던가! 살아 있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모습이 드러나는 그 아름다운 과정에 매료되어서가 아니었던가! 지독한 착각과 환상에 빠져 있었던 수년의 세월들에 대한 후회가 날 감쌌다. 그것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휩쓸었다. 깊은 물속에서 헤메이고 허우적거리며 나는 후회의 깊은 심연 속에서 한참동안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뒤로 몇 달간 열병에 시달렸던 것이다. 날 괴롭힌 그 열병은 상당히 지독했다. 석달동안 일어나 있었던 시간이 2주일이 채 안되었으니… 힘들게 병이 낫고, 세찬 후회의 파도에서 겨우 빠져나온 나는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 그림을 그려야 했다. 훌륭한 인물화를 그리고만 싶었다. 정말 내 뛰어난 재능을 제대로 표현해 줄 수 있는 완벽한 모델을 만나야 했다. 완벽한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너무나도 완벽한 모델….그것이 필요했다. 모델을 구하던 중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을 감상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끔찍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병에 시달리면서 나는 우연히 TV에서 방영하는 미술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매주 한명의 위대한 미술가를 선정해 그들의 작품세계와 인생을 소개하는 그 프로그램이었는데 우연찮게도 내가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주의 미술가는 고흐였다. 진정한 예술가만이 진정한 예술가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고통속에 꽃피운 메마른 해바라기의 참을 수 없는 예술적 느낌!! 가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허접쓰레기 같은 미술가들의 그림을 코웃음치며 비웃던 나였지만 고흐는 달랐다. 고흐의 처절한 감정과 인생을 지배하던 자신 안의 모든 괴로움들을 미친 듯이 쏟아부은 듯한, 굵은 선과 투박한 터치의 그 그림들을 보았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던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 진정한 예술가만이 진정한 예술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예술적인(예술적일 수밖에 없는!) 작품들을 골라낼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그것은 ‘자화상’ 이었다. 고흐는 인생의 고통은 삶 그 자체라고 말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도 대변될 수 없는 예술가만이 느낄 수 있는 커다란 인생의 고통, 그리고 자신의 완벽한 재능에서 발견하게 된 단 하나의 허점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집약된 그의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잘라낸 귀!!!!! 모델의 이름은 세희라고 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사진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모델을 선택했다. 그녀의 얼굴모습이나 몸매, 혹은 눈매나 아름다운 말투…이런 것들 따위는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 관심을 끊고 살아온, 즉 사회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 생활과 성격, 태도들에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여성의 평가 기준들이 치고 들어올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천 장의 사진을 고를 때보다 더욱 신중을 기했던 나의 모델 선택 작업에서 그녀가 낙점될 수 있게 해주었던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녀의 살아 있는(정말 살아 있다고 생각되는!) 웃음과 미소, 그리고 생생한 수많은 표정들이었다. 내가 느끼고 있었던(내가 인물화를 그리도록 해준 이유였던) 인간의 표정과 감정, 근육의 움직임과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미소,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의 아이러닉한 조화를 그녀만큼 완벽하게 얼굴에 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게는 보였다. 그녀의 두뇌와 근육 조직들 사이에서의 빛살만큼 빠른 정보 교환의 과정과 그것에 반응한 그녀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생생하고도 환한 수많은 표정들.. 아름다운 얼굴 이면의 ‘표정 변화’ 라는 물리적인 현상과 감정적인 변화의 모습에 신경을 쓰느라 그녀의 얼굴마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나이다. 그렇지만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 짓는 무섭도록 아름다운 미소가 주는 (보는 내가 처절하도록) 밝은 그 느낌만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녀의 미소를 비롯한 수백가지의 표정들은 그런 것이었다. 내게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그녀는 아름다웠다. 신은 어째서 내게 이런 여인을 진작 보내주지 않았을까? 이런 여자가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데도 왜 나는 저기 바보같이 쌓여 있는 사진들 속에 파묻혀 괴상한 정물들을 그려내느라 내 아까운 시간과 재능과 화구들을 하늘에 날려버렸단 말인가? 두말없이 나는 그녀를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모든 재능을 남김없이 쏟아부어 나는 이틀밤낮을 새서 그림을 완성했다. 완성과 파괴의 비극은 어느날 밤늦은 시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마지막 마무리를 끝마쳤을 때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나는 화폭을 집어들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내 예술적 감각의 조화, 그림의 완성의 환호성을 지르며….. 하품을 하며 일어난 그녀는 잠시동안 잠이 덜깬 듯한 눈으로 그림을 살펴보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눈에 가득했던 잠은 없어졌지만 그녀의 얼굴에는(나를 미치게 만들었던..)표정이 전혀 없었다. 천천히…아주 천천히 그녀는 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뜯어보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화가로서 모델의 평가 따위에 귀를 기울일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그렸다는 설레임? 혹은 내 그림들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어떤 평가에 대한) 두려움? 복잡한 생각들은 계속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중에서도 나는 그녀의 반응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천천히 내 그림을 뜯어보던 그녀는 여전히 아무 표정없이 그림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나에게 돌려주면서 환한 미소를 짓지도 않았고 내 능력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흔해빠진 감탄사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잠시 나는 멍해졌다. 날 둘러싼 세상이 하얗게 변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귀가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얼마 전 내 머릿속에 천둥같이 울리던 ‘잘라낸 귀’ 라는 단어가 다시 내 영혼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귀와 내 그림 속의 그녀의 귀의 미세한 각도차이를 그녀가 가리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귀가 잘라진 그녀의 모습이 거울 속에 비추어졌다. 그녀는 붉은 피가 샘솟는 관자놀이 부근을 양손으로 감싸쥔 채 무서운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 온몸은 충격과 공포로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노려보는 데에서 오는 공포는 아니었다. 나는 예술가였다. 그것도 이 하늘 아래에서 맞수를 찾기 힘들 정도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완벽한 모델을 찾았었다. 완성 이전까지 모든 것은 너무도 자명한 다이어그램을 그려내고 있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익숙치 않은 충격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미세한 균열이 어떤 이유로 급격하게 커져가고 있었다.. 그 표정이 아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아름다운 미소와 환상적인 표정의 조화로 날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물화를 그려내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술가인 날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녀의 얼굴 양 옆에서 흘러내리는, 내가 언제나 넋놓고 바라보던 그 얼굴의 피부 아래에서 모든 것의 움직임을 컨트롤하였을… 그녀의 피도 아름다웠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피의 만연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로 솟아올라 내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느끼고 있던 모든 아름다움의 결실과 결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그렇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표정 따위가 내가 원했던 이유는 아니었다! 신이 내게 내린 계시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표정은 더 이상 이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날 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지겹도록 보았던 악의와 고통의 마이너스적 표정들이 그녀의 얼굴에 너무도 생생히 드러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였지만 완성에의 열정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여유가 없었던 나는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미친듯이 그림을 집어든 나는 거울 속에서 날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익숙치 않은 표정과 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거울 속에 비추어진 그녀의 얼굴과 내 그림 속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천지차를 보이고 있었다. 지독한 카오스다. 나의 능력부족이었나? 아니면 그녀가 개 같은 모델이었던 것인가! 그때 그런 것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잘 익은 방울토마토처럼 붉은 그녀의 입술은 내 그림에서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지금 거울 속에서는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것은 아니다! 잘 깎인 물렁뼈가 안에 있으리라 생각되는 그녀의 오똑한 콧날도 지금은 흉하게 주름져 우스운 몰골로 변해 있다. 이것도 아니다! 그리고 초승달처럼 아름답게 굴곡진 그녀의 눈매 안에서 날 향해 아름답게 구르며 선망의 시선을 보내던 그녀의 눈도 지금 거울 속에서는 창녀의 그것처럼 천박하게 변해 있었다.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들을…이것들을… 그녀는 출혈과다로 죽어가고 있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거울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남김없이 도려내진 그녀의 피투성이 얼굴이 비춰진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 아름다움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이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더불어 내 예술의 결정체였던, 지금 그녀의 시신 옆에 피투성이로 굴러다니고 있는,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초상화가 처참한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그녀의 얼굴 옆에 역설적으로 남아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후 병원에서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와 나는 다른 것 같다. 그녀의 얼굴,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순간적인 악마적 충동으로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지금, 내 정신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서야 말하는 것이지만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내 손목에서는 거무스름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이런 상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들었다. 나도 지금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글을 마치고 내 마지막 작품을 그려낼 수 있는 힘이 아직까지 내 몸속에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처참한 비극은 이제 내 죽음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얼굴의 모든 부분을 잘라낸 세희의 초상화를 그릴 것이다. 이제 글을 마치고 그녀의 눈알이 파내진 채 아직까지도 끈적끈적한 피를 쏟아내고 있는 눈만 그려내고 나면 완성이다. 그러고 나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지…. 2. 기자와 형사 7장의 A4용지를 다 읽은 영민은 잠시 숨을 내쉬었다. 카페의 잘 닦인 테이블에 그는 그것을 내려놓았다. 언제 나왔는지 모르는 에스프레소 커피가 그의 앞에 놓여 차갑게 식어 있다. 한번 더 숨을 내쉰 영민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혁수를 바라보았다. “이 글이 범인이 남긴 글이야?” “그래. 이정도면 미스터리한 사건인가?” “후우…” 영민은 다시한번 숨을 내쉬었다. 미스터리 잡지 기자인 영민은 얼마 전 고양 경찰서 형사계 형사반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 혁수로부터 좀 말도 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사건인지 물었지만 전화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고 보여줘야 이해가 되는 일이라며 혁수는 영민을 만나길 원했다. 가끔 풀리지 않는 사건을 영민에게 취재거리로 물어다 주며 영민에게서 담뱃값 정도를 뜯어내곤 하던 혁수는 이번 일은 영민의 기자생활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커다란 일이라면서 10만원을 요구했다. 거금을 주는 대신 별일 아니면 20만원을 받아내기로 한 영민은 혁수의 계좌로 돈을 입금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영민은 돈을 입금한 다음날 혁수를 만나기로 했다. 형사가 사적인 정보를 흘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일이라 영민은 취재를 명목으로 혁수를 방문했다. 그와 함께 서 주변 카페로 나선 혁수의 손에는 상당히 넓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자신에게 보여 줄 자료라는 예상을 하면서도 지나칠 정도의 넓이에 영민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카페에 도착해 서로 마실 것을 시킨 뒤 혁수는 영민에게 임양태라는 사람이 남긴 ‘살인자 수기’ 라는 7장의 두서없는 글을 넘겨주었다. 영민은 10분 정도의 시간을 들여 그것을 설렁설렁 읽어냈다. 꽤나 정신없는 글이었지만 읽기 싫을 정도의 문장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글을 써내려간 사람이 상당한 싸이코에 괴상할 정도로 자신 속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이상한 글이었다. “싸이코는 싸이코네…언제 일어난 사건이야? 최근에 이런 끔찍한 뉴스는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건 두달 전 사건현장에서 두 점의 그림, 그리고 시체와 함께 발견된 종이들을 복사한 거야. 그렇지? 대단한 싸이코같지?” “두달 전?” 영민은 혁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깐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살인자 수기라는 내용의 글은 사람의 얼굴을 도려낸 미치광이 살인마의 이야기였다. 신문기사 1면은 아니어도 사회면 정도에는 실릴 수 있는 이야기였고, 만약 기사화되었다면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미스터리하거나 끔찍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월간 미스틱의 기자 영민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고보니까 이상하잖아…” 영민은 눈앞에 표정없이 앉아 있는 혁수를 향해 말했다. “넌 살해 사건 담당이 아니잖아. 사람의 얼굴을 도려낼 정도의 끔찍한 범행이라면 당연히 강력반 담당 아니야?” “후훗…” 혁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자신이 가져온 넓은 봉투를 뒤적였다. “그렇지…강력반 담당이지….그렇지만 이 사건은 내 담당이야.” “왜?”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거든…” “뭔 말이냐!?” 기사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하면서 어제 자신에게 10만원을 뜯어간 친구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영민의 신경이 살짝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 다 뻥이야?” “뻥은 아니야….” 봉투를 뒤적이던 혁수가 뭔가를 꺼내 영민에게 내밀었다. 한장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범인 임양태의 사진이다.” “흠…헷갈리잖아. 사실이 아니라면서 범인이 있긴 있는거냐? 이 사진은… 우욱…” 눈앞에 놓여 있는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영민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사진 속 인물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어느 한곳 예외없이 울퉁불퉁한 화상 흉터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 눈 부분은 거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어올라 오른쪽눈과 괴상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 모습은 ‘살인자 수기’ 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혼자 머릿속에 떠올렸던 천재 미술가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뭐..이런 얼굴이 다있어…” “옛날엔 안그랬나봐….글 속에 보면..화재사고라는 말 나오지? 이녀석이 6살때 일어났던 일이야. 부모를 잃고, 자신의 얼굴도 흉하게 타버렸지….임양태가 정신병적 증세를 보인 건 아마 그것에서 시작된 것 같다고 심리분석가들이 이야기하더군…” “정신병적 증세?” “녀석은…대인 기피증을 지니고 있었어. 그리고….” 혁수는 다시 자신의 봉투를 뒤적이더니 반으로 접힌 4절지 한장을 꺼냈다. “이건 피해자의 모습이다. 임양태가 그린, 칼질로 얼굴이 죽판이 된…그 모델이지.” “피해자? 사실이 아니라면서 범인도 있고 피해자도 있냐…?” “보면 아니까 그림이나 펼쳐봐.” 반으로 접힌 4절지를 영민은 조용히 펼쳐보았다. 순간 영민은 얼어붙었다. “후후…현실은 글보다 지독했지….이 사건이 내 담당인 이유를 알겠냐?” “그….그래…알 것 같다…” 범인의 미술적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와 눈과 코가 있었더라면 무섭도록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얼굴의 초상은 대단할 정도의 현실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림 속의 피해자의 모습은 눈물이 날 만큼 처절했다. 크고 예리한 뭔가로 파낸 듯한 두 눈의, 안구가 빠져나온 신경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잘려나간 귀와 코, 그리고 얼굴 피부의 일부분들도 사라진 자신의 일부분들을 찾으며 허우적대고 있는 듯했다. 처절하고 끔찍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만약 실제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 모습을 모델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악마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잘려나간 눈, 코, 입, 귀를 제외하면 그림 속의 얼굴은 방금 영민이 확인한 사진 속의 얼굴의 윤곽과 무서울 정도로 일치했던 것이다. 보기흉한 화상 흉터 하나하나까지도…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정신병원에서 녀석을 담당하고 있던 최박사가…말하더군….복잡한 이야기지만…”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영민을 바라보며 혁수는 조용히 말했다. “임양태란 인간은…어려서부터 미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고 하더군…그러다가 여섯살때 부모님을 화재 사고로 잃었는데…그것이 창고에 쌓아둔 자기의 유화 기름 때문이었어. 정신 분열증을 일으켜서,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고…쭉 거기서 살았지. 이런 모습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말이야. 부모가 죽은 충격에서 회복될 즈음부터 녀석은 심각한 자기도취 현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하더군…괴물같이 변해버린 자기의 얼굴과 화재 사고에 대한 기억, 그리고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게 된 허무감에서 도피하기 위해서…녀석에게 남은 것이 미술적 재능뿐이었기 때문이라던데…나도 잘은 모르겠어. 심리학적인 이야기니까…그리고 녀석은 정신없이 사진을 수집해서…초상화를 그렸다고 하더군. 1년전에 녀석이 심한 열병을 앓은 뒤로 이상하게 그녀석의 사진 수집벽이 없어졌대. 그리고….”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민을 바라보며 혁수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지독한 자기 도취의 성격적 특성이라고 한다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장점, 그러니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잘난 점에 영혼까지 빠져든다는 것, 그리고…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멋대로 자신의 주변 현실을 바꿔 버린다는 거라더군. 자신의 예술적 능력에 대한 자기 도취는 녀석의 세계 안에서 점점 확대되었어. 하지만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녀석의 그림을 보고 감탄해준 사람은 없었다.그럴수록 녀석의 안에서의 불만감은 더욱 확대되어 갔고…존재하지 않는 현실이 임양태를 지배해 갔지. 그러던 중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이 필요했던 거야. “ “그래서?” “글쎄…녀석은 독방에 있었어. 모델이 될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었겠지. 대인 기피증에 있다 보니 사람을 모델로 구하기는커녕…사람들한테 말 한마디 걸지 못했던 녀석이야. 하지만 미친듯이 모델을 찾아야 했지. ‘천재적 재능’ 은 신이 내린 것이었고, 자신은 신의 명령에 따라야 했으니까…그리고 녀석의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모델이 등장했지. 그 녀석의 생각으로는 너무나도 완벽한 모델이었겠지만….사실 그 모델은 거울 속에 비춰진 자기 자신이었던 거야.” “……” 영민은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자기도 모르게 눈이 뽑히고 귀와 코가, 그리고 입술이 잘려나간 끔찍한 초상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건…” “그래…녀석의 마음 속에 있었던 가장 완벽한 모델에 대한 열망…자신의 자화상이지….아쉽게도…임양태는 그 모델의 완벽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고…어느 늦은 밤…그녀의 얼굴을 난도질해버리고 말았지만…..” “….” 잠시 말없이 앉아 있는 영민에게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혁수는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물었다. “후우…최박사의 말을 듣고…이해는 됐지만…한가지 궁금했던 건…” “음?” “자신의 눈을 뽑아버린 사람이…어떻게 귀가 잘리고, 코가 잘리고, 입술이 잘려나가고…무엇보다도 눈이 없는…그 얼굴을…그토록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었느냐…그거였어.” 영민은 혁수의 말을 들으며 자화상의 눈을 보았다. 원래는 인간의 검은 눈동자와 흰자가 어떤 감정을 그려내고 있었어야 할 그곳에 허전한 붉은색이 고함치는 끔찍한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방금 보았던 모습이었지만 혁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알 수 없는 끔찍함이 가슴 속에서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순간 그것이 자신에게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였다. 그 허전함의 절규가 자신의 뇌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있는 듯했다.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영민은 자신의 눈앞에서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혁수를 내버려둔 채 찬바람을 쐬기 위해 카페 밖으로 잠시 달려나갔다. 날이 많이 짧아졌지만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카페 밖 건물들은 하나 둘 간판에 네온사인을 켜고 있었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mypre 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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