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사람들은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다. 낯설기 때문은 아니다. 고독해서다.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공기는 너무 아찔하고 치명적이다. 잘못해서 지하로 흘러들어온 이방인을 보고 있자면 지하의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 실감나기 때문에, 모두 애써 모른척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의 사람들은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다. 대체로는 그렇다.
“오늘은 오겠지?”
해가 떨어지기 전이면 오름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는 내게 묻는다. 이방인이 다녀갔느냐고.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아니.
반기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지하의 사람들은 이방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방인의 동향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다. 오름도 그 사람 중 한 명이다. 살았던 때를 떠올리며 매일 선착장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올 때 됐는데.”
오름의 말은 생을 품고 있다. 산 사람에 대한 열망은 짧게 그치지 않는다. 그칠 수 있는 종류의 바람이 아니다.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 사람을 공연히 기다린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나눠주고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달릴 수밖에 없다. 죽음은 팔지 못하고 삶은 사지 못한다. 그것이 지하의 법칙. 나는 발만 구르는 오름에게 복숭아 하나를 건넨다.
“죽은 복숭아지?”
오름이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하의 작물은 모두 죽어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상의 것들과 다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맛이 다르다. 지하의 사람들은 그걸 ‘죽은 맛’이라고 부른다. 식감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유사하지만’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처음 지하의 음식을 먹었을 때는 심리적인 거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지내다보니 이해가 됐다. 지하의 음식은 살아있는 음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안 먹어?”
“됐어.”
오름은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하긴,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으니까. 죽은 사람은 다시 죽을 수 없다. 나는 오름에게 건네려던 복숭아를 한입 깨문다. 와삭. 아무리 들어도 지상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아주 맛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인가 복숭아를 더 씹는다. 그러는 동안에 상념에 잠긴 오름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이번에는 좀 예쁜 여자가 오면 좋겠는데.”
“나도 예쁘잖아.”
내가 짤막하게 대꾸하자, 오름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물론 그 표정에 활기는 없다.
“넌 죽었잖아. 죽었는데 예쁜 게 무슨 소용이야?”
“그래서 안 예쁘다고?”
“복숭아나 줘.”
복숭아는, 아니 오름은 잘도 말을 피하면서 내게 손을 뻗는다. 나는 가방에서 새 복숭아를 하나 꺼내 오름에게 건넨다. 순간적으로 손이 닿는다. 맞닿은 손은 차갑기만 하다. 죽어있기 때문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좀처럼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티를 내지 않는 건 서로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자신에 대한 배려일 거다. 오름은 아무렇지 않게 복숭아를 받아든다. 복숭아를 크게 베어 문 오름이 말한다.
“차가워.”
그게 복숭아를 말하는 건지, 내 손을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