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6년 5월 18일 오전 11시경 동경 아라카와 구에 있는 여인숙 “만사키”에서 1주일 전부터 묵던 남녀 커플 중 남자가 침상에서 살해당한 것을 이 여인숙의 하녀가 발견하였다. 남자는 분홍색 허리 끈으로 목이 졸려 죽어 있었으며, 요에는 검게 변한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이유는 시체의 음경이 도려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왼쪽 허벅지에는 피로 “사다키치 둘”라 써 있었으며 방석에는 “사다키치 둘만이”라고 써 있었다. 왼쪽 팔에는 “사다”라는 글이 써 있었으나, 이 부분만 예리한 칼로 보이는 것으로 글자를 세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동반하고 있던 여자는 이날 아침 8시경 “잠깐 나갔다 오겠지만 방 안에 지금 푹 자고 있으니 그대로 놔 두세요”라고만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남녀는 묵고 있는 동안 밤이나 낮이나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1주일이나 묵고 있었기에 여인숙 점원들은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 20일 오후 5시 반경 타카와파출소의 경찰이 시나가와 역 앞에 있는 “시나가와 관”이라는 여관을 조사하던 중, 한 여자가 혼자 묵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는 양지로 싸인 꾸러미를 들고 있었는데, 형사가 이에 질문을 하자 끝까지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오랜 실갱이 끝에 형사가 그 꾸러미를 열어보자 피해자의 음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이를 보고는 다시 소중히 양지로 곱게 포장하였다. 여자는 아베 사다(당시 32세)라는 이름으로, 살해된 남자는 나카노 구의 요리점 “요시아댜”라는 가게의 주인인 이시다 키치조(당시 42세)였다. 현장의 “사다키치”는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온 문자였던 것이다. 아베아베는 1905년 동경 간다의 타타미(일본식 마루 재질) 집의 딸로 태어났다. 7명 남매 중 4녀로 막내였는데, 일가는 가족이 많아도 그럭저럭 생활 고를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 간 봉재 일을 배웠다. 그간 아베의 집에서는 자주 가족간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때마다 부모는 아베에게 “밖에서 놀다와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베는 자연스레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15살 여름 친구 집에서 하숙하던 케이오 대학생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를 어머니에게 털어놓자 아베의 어머니는 이제 결혼도 못하게 되었다면서 막내를 불쌍히 여겨 더욱 더 애지중지하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베를 과보호하여 용돈도 많이 주는 바람에 아베는 점점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동료들로부터 “칸다의 사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어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아버지가 아베의 불량한 태도를 고치기 위해 다른 집에 아르바이트를 시켰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베는 도저히 규칙적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가게 집 딸의 옷과 반지 등을 걸치고는 영화를 보러 나가다가 경찰에 심문을 받는 바람에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바른 성품의 아버지는 이러한 딸의 비행에 대해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게이샤로 팔아버린다”라고 화를 냈지만, 이 말을 들은 아베는 “그러는 편이 좋겠다”라고 생각을 전화하게 되었다. 그 무렵, 아베의 오빠와 예전 화류계에 몸을 담았던 오빠의 전처가 화류계에 관심이 있는 아베에게 “게이샤가 되면 예쁜 옷도 많이 입고 돈도 실컷 쓰고 놀면서 산다”라며 권유하여, 부모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가출을 했다. 그 길로 바로 아사쿠사의 게이샤 집 앞까지는 갔으나 저녁이 되자 갑자기 집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1921년 부모는 간다에 있던 집을 판 후 아베의 언니가 살던 사이타마 현으로 이사를 했다. 이 곳에서도 아베는 밖으로만 돌아다닐 뿐, 한 번은 갑자기 실종한 채 남자와 카와코시의 한 여관에서 3일 동안 숨어 있다 부모에게 들켜 다시 집으로 끌려 들어온 적도 있었다. 아베가 18살이 되던 해 그녀는 드디어 그토록 되고 싶던 게이샤가 되었다. 자신의 먼 친척 뻘인 Y라는 남자를 따라 요코하마에 온 후 Y와는 애인관계를 맺은 후 매춘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 때 자신의 예명을 “미야코”라고 붙였다. 19살에 시내 게이샤 집으로 적을 옮기자 마자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다. 아베는 지진 직후 Y의 가족과 함께 토야마로 피난을 간 후 그 곳에서 “하루코”라는 이름으로 게이샤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곳에서 아베는 게이샤 가게의 샤미센(일본 악기)과 금으로 된 담배지갑을 무단으로 전당포에 맡기다가 경찰의 취조를 받게 되었다. 이 때 아베는 자신이 원하던 게이샤가 되기는 하였지만, 남자와 성관계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포주인 Y에게 낼 돈도 없었기에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였다. 1924년 말 아베와 Y의 가족은 다시 동경으로 돌아왔다. 반년 정도 Y와 같이 살던 아베는 Y가 자신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1925년 7월 신슈에 있는 이이다 마을에 게이샤로 자신을 팔아 “시즈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2살에는 잠시 게이샤 일을 그만 둔 후 오사카로 이동한 후 “엔마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반년 정도 일을 하였지만 진술에 의하자면 “이 때부터 손님과 성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싫은 느낌이 들지 않고 재미있기 시작했다.”라고 한다. 같은 오사카의 다른 가게로 이적한 후 4달만에 정부와 실종을 한다. 그리고 연말에는 나고야에 있는 게이샤 집으로 취직, 2년 정도 일하였다. 1929년 5월, 25살이 된 아베는 오사카로 다시 돌아와 다른 게이샤 집에 취직한 후 손님의 지갑에서 90엔과 반지 등을 훔치는 사건을 일으킨다. 다음 해 가게를 도망 나온 아베는 코베로 향한다. 이 때 더 이상 몸 파는 일을 그만두자고 생각한 아베는 카페에 취직을 하였으나 2주일 만에 다시 매춘을 시작했다. 다시 몸을 담은 게이샤 집에서 3달 정도 일을 하였으나 주인의 착취에 화를 낸 후 오사카로 다시 돌아와 매춘을 하다 어느 남자의 첩이 되었다. 그간 마작 도박 등으로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성관계에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더 이상 혼자서는 잘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아베는 남자가 옆에 없으면 불안하다면 의사에게 진단을 하였는데, 이 때 의사는 결혼을 하거나 정신 수양을 위한 독서를 하라 권유하였다. 1933년에 어머니가 나이로 사망하자 아베는 동경으로 돌아왔다. 동경에서도 아베는 다시금 고급창녀에서 첩이 되었지만, 아버지까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를 열심히 간호하였다. 그 후 반달 정도 요코하마에 있는 Y와 재결합하는 가 하였지만 다시 도망을 나와 1935년 1월에는 나고야로 이동을 하였다. 이 곳에서 그녀는 매춘이 아닌 요리점의 점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중경 상업 교장 O와 알게 되어 애인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나고야가 싫어서”라는 이유로 다시 동경으로 돌아와, 요코하마에서 어느 남자와 동거를 하는가 싶었으나 8월 O와 다시 아타미 지방에서 만났을 때 O의 사랑 고백에 감동을 받아 “이젠 성실하게 살면서 선생님의 말을 따르자”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매춘생활에서 이제 손을 씻자”라고 결심을 한 것이다. 또한 담배를 끊기 위해 신사 등에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1936년 2월, 신쥬쿠의 직업 소개소의 소개로 이시다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때 취직한 이유는 요리집을 경영하기 위해 그 수행을 쌓기 위해 취직을 하였으나, 아내와 자식이 있는 이시다에게 끌려 그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하지만 곧 아내에게 들키고는 해고 당하고 4월 23일 전국의 여관 과 여인숙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도중에 O로부터 돈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5월 11일, 문제의 “만사키”에 아베는 이시다와 함께 투숙을 하였다.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 5~6번의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시다는 대부분 아베의 요구에만 따랐다고 한다. 18일, 그 날도 성관계를 맺다가 아베가 엉겁결에 이시다의 목을 졸랐다. 얼굴이 충혈되고 기절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목을 조르면 더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며 아베가 이시다에게 전하였다. 이시다는 다시 기절 직전 다시 숨을 쉴 수 있었으나 “난 너무 피곤하다. 집에서 쉬고 싶다.”라고 말하자 아베는 그 말을 아내에게 돌아가겠다라는 의미로 듣고는 충격을 받는다. 아베는 이시다를 독점하고 싶었다. 오전 2시 경 자고 있던 이시다의 목에 허리끈을 졸라 매었다. “오카요…” 이시다는 동공이 열린 채 이렇게 아베를 불렀다. 오카요는 아베가 이시다의 가게에서 일할 때 쓰던 가명이었다. 아베는 더욱 더 목을 강하게 졸라 매어 이시다를 살해하였다. 이시다가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아베는 그대로 이시다를 껴 안은 채 아침을 맞았다고 한다. 이시다에게는 아베 외에도 “코하루”라는 게이샤의 애인이 있었다. 7년 동안 사귄 관계로 아베보다도 더욱 깊은 관계였으나, 아베는 코하루에게도 이시다의 아내에게도 절대 이시다를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지금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내 몸처럼 여기기 위해 가장 추억이 든 부분을 도려내어 양지로 포장하였습니다. 그 후 이 집에서 나가고자 하면서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 남긴 이시다의 몸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그대로 선 채 방금 도려낸 부분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 다리에 “사다키치 둘이서”라고 썼습니다. 당신 혼자 여기에 두는 것이 아니고, 나도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이번에는 방석에 크게 “사다치키 둘만이”라고 썼습니다. 이걸로 아내도 첩도 가까이 다가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본인의 진술) “만사키”를 나온 아베는 택시로 신쥬쿠까지 간 후 기차를 타고는 우에노로 향하였다. 그 곳의 마츠자카야 백화점 부근에서 자신의 옷을 판 후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는, 간다에서 일하던 카페의 단골 O와 만나 오오츠카에서 몸은 판 후 돈을 받았다. 그 후 다시 신바시에서 새로운 옷을 사서 다시 갈아입었다. 그 후 아베는 아사쿠사에서 영화를 본 후 추억의 장소인 관서지방으로 이동 후 동경의 산중에서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베는 일단 시나가와 역 앞에 있는 여관에 투숙을 한 후 조사를 마친 형사들이 들이닥치자 의연하게 “제가 아베 사다입니다.”라며 자수를 하였다. 이 체포 당일 “아베 사다 체포되다”라는 호외까지 나올 정도로 이 사건을 매우 당시 충격적이었다. 그 이유로 일단 시대 배경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사건 3개월 전에는 2.26사건(일본 군 쿠데타 사건. 실패로 끝남.)이 일어났는데, 역사의 움직임이 보이던 시기로 음울한 분위기 속에 사람들이 매우 불안하던 차, 이러한 충격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실 남자의 음경을 절단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음울한 사람들의 마음에 스릴과 유모어를 가져다 주었다. 아베도 엽기 살인자라 불리는 것보다는 동정표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유명인이 되어, 사건의 무대가 된 “만사키”와 “시나가와관”은 매일같이 최고조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후에 이 사건은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제 1 공판에서는 방청 희망자로 그 전날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1936년 12월 21일, 동경 재판소에서 징역 6년(구형 10년)이 판결 났다. 이에 대한 항소는 없었다. 그 후 옥 중에서 그녀는 매우 모범수로 활약했는데, 1940년 2월 11일 은사감형을 받아 다음 해 5월 17일에는 출소하게 되었다. 아베는 출소 후 “와카다케”라는 작은 요리점을 시작했다. 1969년 “메이지 타이쇼 쇼와 엽기여자범죄사”에서는 실제 인터뷰 모습까지 보였다. “그곳을 나올 때 그 사람을 두고 온다 하니, 뭔가 가지고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사람을 업고 갈 수 없으니까. 그러니 역시 남자 것을 가지고 가야지” 그 후 마지막으로 아베 사다의 생존이 확인 된 것은 종업원으로 치바의 한 호텔에서 1971년까지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에는 자살설과 노쇄설, 용양원 등의 소문이 떠 돌았지만 현재 행방을 알 수는 없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