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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사람(스압주의.고구마주의.똥글주의.남혐접근금지)
게시물ID : menbung_581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육현사무라이
추천 : 31
조회수 : 2685회
댓글수 : 22개
등록시간 : 2018/04/28 08: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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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지만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었던
나의 소소한 사람들 이야기.
주로 안좋은 일에 휘말려 멘붕을 겪었던 적이 많았던 터라 멘붕게에 올립니다.
편하게 쓰려하니 반말에 주의해 주세요.
 
 
어릴적 자주 놀러가던 작은 고모네 집이 있었다.
우리집에서 버스로 한시간남짓? 먼 편은 아니었다.
깡 시골이라 버스편이 많지 않았던 게 불편했을 뿐.
고모네 집은 계곡에서도 가까워서 거의 여름방학마다 놀러갔었던 것 같다.
고모네 집에는 딸들이 셋 있었는데 큰 아이가 나보다 한살 어렸다.
고모는 너무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모네 집을 찾지 않게 된 건 어느해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다.
술을 잔뜩 마시고 온 고모부가 아들 타령을 하며 아이들을 차례차례 봉당으로 집어 던졌다.
심지어 포대기에 쌓인 갓난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날 그림일기에 썼다.
그림도 그렸다. 아직도 기억한다. 눈에서 빨간 불이 튀어나오던 고모부의 야차같던 모습.
결국 고모는 나 국민학교 4학년때 농약음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내가 제일 처음 겪은 지인의 죽음이었다.
 
90년대 초반. 각 버스마다 재떨이가 달려있던 시절.
갓 국민학교를 졸업한 사촌동생 졸업식에 따라갔다 집에 돌아오던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아주 슬픈, 사람의 등을 보게된다.
멀미가 심해 버스에서 급히 내려 헛구역질을 하다 고개를 들었는데
저만치 또각또각 멀어져가는 우리 엄마의 뒷모습.
등은 두들겨주지 못하더라도 곁에라도 있어주지.
그때 겨우 열네살. 상처받았다.
 
고등학교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래봐야 주말과 방학때 뿐이었지만 우리집은 가난했고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면 하나를 반개씩 쪼개고 물을 붓고 국수를 넣어 먹는 찌든 가난이 싫어서
엄지 발가락이 헤져 비가 줄줄 들이새는 운동화를 바꿔야 해서
쑥쑥 커나가는데 교복 맞출 돈이 없어서
그 외 기타등등의 이유로 국도 휴게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고모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던 먼 친척분이 그 휴게소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덕분에 일자리를 쉬이 구했다. (이미 언급했듯 깡시골이라 알바 자리도 하늘에 별따기였던 때)
언니들은 데면데면했고 일은 고됐다. 하지만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음에 마냥 행복했다.
늘 먹던 라면국수를 먹지 않아도 되니 어찌나 좋던지.
휴게소 사장은 70정도 된 노인네였다.
혼자 사무실 지어놓고 안에서 뭘 하는지 거의 나와보지도 않았었다.
방학 끝난 주말. 다시 알바하러 찾아가 사장실에 인사를 드리니
미국식으로 해야한다며 강제로 포옹하던 빌어먹을 노인네.
미국에선 다 이렇게 한다며 입맞추며 혀까지 강제로 밀어넣으려던 노인네.
그길로 한달음에 산을 내려왔다. 다시는 거기 가지 않았다.
이따금 고모할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는 생활비가 없으니 일을 하러 가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못했다. 누군가 날 더럽다고 손가락질 할것만 같았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못 미더운 사람이었다.
 
스물한살. 첫 직장에서 남자를 사귀게 되었다.
나보다 열살이나 많았다. 소위 말하는 노총각.
2년정도 되었을 즘.. 바람이 났다.
동갑내기 여자라고 했다. 익히 아는 터였다. 예전에 사귀던 사람.
자존감이 낮아졌다.
나보다 늙고 다단계 방판하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존심 상하고 우울했다.
자주 따졌으나 돌아오는 건 매질 뿐이었다.
바람을 피운 뒤로 폭행은 나날이 잦아졌고 강도도 세졌다.
어느 날 밤 술 취해 찾아와 죽여버린다며 칼을 쥐었을 때
응급실에서 오른손 엄지 열세바늘 봉합이 끝나자마자 난 도망쳤다.
집도 직장도 한순간에 잃었다. 하지만 살아야했다.
엄마는 역시 내 편이 아니었다. 나보다 내 남자친구를 더 믿고 있었다.
그렇게 온순하고 착한 사람이 때릴리가 없다며 나를 거짓말쟁이 취급했다.
또 한번 내 주둥이는 오그라들었다.
 
고등학교때부터 베프로 지내던 아이가 뜬금없이 결혼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사귀던 사람이 있던 친구가 아니라 어리둥절했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났고 당연한듯이 피로연에 우리는 초대받지 못했다.
신부가 와서 수줍게 건네고 간 수표 한장 십만원.
미안해 너희들끼리 저녁먹어.
반 당황 반 어리둥절로 친구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는데 들려온 이야기들.
대학 다니던 친구가 방학을 맞아 잠깐 집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 빌어먹을 신랑 군바리 새끼가 내 친구를 강간해서 임신을 시켰다는 거였다.
그전부터 계속 졸졸 따라다니며 스토커짓을 일삼았다고 했다.
아이까지 생겼으니 별수 없이 결혼하는 거라 했다.
훗날 알고보니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매하신 신랑측에서는 신부가 촌년인것도, 듣보 대학을 다니던 것도, 돈이 없는 집안인것도, 전부 다 싫고 창피해서
같은 깡시골 출신인 신부 친구들도 창피했던 거였다.
그래서 우리는 돈 십만원에 마치 적선당하듯 결혼식에서 쫓겨났다.
그 뒤로 친구와는 결국 사이가 멀어졌다.
 
 
직장에 자주 찾아오던 거래처 납품직원이 있었다.
거래처 사장과는 형제간이라고 했다.
물건을 다 내려놓고도 가지 않았다.
괜스리 지분지분 날씨 이야기나 경제 이야기 흥미도 없는 이야기들을 주워 섬기며
빙글빙글 돌기 일쑤였다. 무시했다. 그때까지 쌓은 경험상 좋은 꼴 못보는게 확실했으니까.
퇴근 시간이 다 된 늦은 저녁 여덟시. 연락도 없이 납품 직원이 찾아왔다.
같이 저녁을 먹자 했다. 이미 먹었노라 답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 체질적으로 술을 한잔도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말했다.
끈질기게 쫓아왔다. 이미 술을 몇잔 마신것 같았다. 술 냄새가 역풍을 타고 간간히 풍겨왔다.
위험했다. 이건 정말 위험했다. 집으로 갈 수 없어서 편의점을 돌았다.
큰길로 사람 많은 곳으로 하릴없이 걸었다. 계속 쫓아왔다.
핸드폰을 열고 신고를 하려는 찰나 그 사람 어깨에 내가 들춰메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내 몸이 들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데
내가 지금 어깨에 들춰메진 상태로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놀라서 핸드폰은 떨어뜨렸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지나가던 남성분들께서 구해주셨다.
경찰서에 갔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좋게~를 강요했다.
또다시 일과 집을 잃었다.
 
 
한때 IT계열 종사자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 뒤죽박죽이라 새벽에 해장국 데이트를 한 적도 있고 아침 일곱시에 조조영화를 보러 만난적도 있다.
야근은 필수였고 주말에도 쉬지 못하는 날이 많아 평일 새벽이나 아침에 주로 만났다.
난 그당시 핸드폰이 없었다. 백수였다. 핸드폰 요금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핸드폰 없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주로 네이트온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메신저 대화로 데이트 약속을 잡고 도착하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별 문제 없었다. 아니 난 별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몸이 조금씩 안 좋아졌다. 잦은 병치레로 병원을 들락날락 했었으니까.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겼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들으려하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인데 기다려줄 수 없다고 했다. 헤어지자 말 했다.
난 억울했다. 그저 체념했다. 날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고 넘겨버렸었다.
6개월 후 지금까지 잘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다. (햇수로 11년차)
헌데 헤어진지 1년 후 그 남자에게 네이트 쪽지가 와 있었다.
여러 사설들과 함께 보고싶다는 말. 가볍게 무시했다.
헌데 1년 후 또다시 쪽지가 왔다. 보고싶다고 했다. 또 무시했다.
그때 페이스북을 처음 알게 됐다. 아무 생각없이 친구들과 교류 하려는 마음에 계정을 만들었는데
또 연락이 왔다. 페이스북까지 찾아오다니. 영문을 알 턱이 없었다.
근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발신자 표시 없는 문자가 하루에 수십통이 넘게 왔다.
어제입은  치마보다 오늘 입은 치마가 더 예쁘다는 둥
야식 가져다주러 온 남자친구를 가리켜
그 쪼끄만 녀석이 니 남친이냐 어울리지 않는다는둥
(남친이 저보다 키작고 왜소합니다)
헤어스타일 바꿨네
한창 바쁠 시간에 어딜 나가냐는 둥
마치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듯한 무서운 문자들.
혼자 야근하던 어느날 밤 침입한 남자와 같이 경찰서에 갔더니
몇년에 걸쳐 쌓여있는 내 사진들이 나를 먼저 반기더라.
장장 2년이 넘는 시간동안 날 쫓아다니며 찍은 사진은 어쩐 일인지 죄다 남자들과 같이 있는 사진 뿐.
나를 꽃뱀취급했다. 그때당시 직업의 특성상(건설회사 현장직이라 외근도 잦았고 소장님들이나 직원들과의 회식도 많은)
하루에도 남자를 다섯명 이상은 만났는데 나조차 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놈은 전부 사진으로 남겨놓고는
내가 마치 꽃뱀인양 경찰에 진술했다.
정말 우습게도 남자친구가 관계증명서까지 써서 내야만 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날 원망하게 되었다.
왜 내게만 이런 인간 군상들이 꼬여가는지.
또다시 일과 집을 잃었다.
 
 
정신적인 데미지를 추스르다보니 너무 오래도록 쉬었다.
생계가 아슬아슬해서 일자리를 찾아야지 싶었다. 사람인 구직사이트에 신상정보를 올려뒀다.
하루에도 꼬박꼬박 두통씩은 전화가 왔던 것 같다.
그 중 기억나는 전화통화 한건과 면접 한건을 이야기하고 싶다.
평일 낮이었다. 휴일인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구직사이트 보고 전화했다는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낮고 소근소근했다.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가 물었다. 지금 밖이냐고.
그렇노마고 답했더니 이따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꼭! 혼자 있을 때!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다.
당연히 이상함을 느꼈으나 너무 궁금해서 전화를 걸기로 했다.
어디서 내가 일해야 하는지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자신의 부와 축적된 재산에 대해서만 설명하던 남자는 내가 전화를 끊으려하자 그제서야 본론에 들어간다.
자신이 7층짜리 건물을 가지고 있는데 지하엔 단란주점이 있고 노래방도 있고 (유흥빌딩이었음)
자기한테 말만 잘 하면 그 건물 관리직을 주겠으니 일단 만나보자는....
이런식으로도 세컨드를 구하는구나. 그때당시 내 나이 이십대 후반인데
살다살다 (오래도 안 살았지만 기간에 비해 경험치가 좀 많은 나는) 몸 팔으라는 제안을 직접 받을줄은 몰랐다.
어떻게 끊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구직사이트에 올린 신상을 폐기하고 한동안 일자리 구할 생각조차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면접볼 곳이 한군데 생겼다.
사무직에 경리직이라고 하길래 회사 이름도 적혀 있길래 (그때당시는 스마트폰도 없고 회사 이름으로 무언가 검색해 내기 쉽지 않은 시절)
전화를 하고 약속 시간을 잡고 근처까지 찾아갔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죄다 술집에 모텔에 술집에 모텔에 (이런곳에 무슨 회사가 있지?)
전화를 하고 자세한 위치를 물으니 데리러 오겠다는 거였다.
한참 멍하니 서서 기다리니 말끔한 양복쟁이 한명이 두리번대며 날 찾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아뿔싸.... 머리가 기름져도 너~~~~~~~~무 기름지다. 직장인의 양복이 아니라 생활? 하시는 분들의 양복같다.
일단 면접 보기로 했으니 줄레줄레 기름쟁이의 뒤를 따라가는데.
세상에나. 바다이야기다.ㅠㅠㅠ
환전해주고 요구르트 서빙해주고 그걸 날 보고 하란다.
훗날 좋은 직장을 구하긴 했지만
그밖에도 어이없는 전화나 면접 정말 많지만 속이는 것들은 정말 가만두면 안된다.
 
 
동네 자주가던 음식점이 있었는데 우연찮게 거기 단골과 친해질 수 있었다.
알고보니 나랑 동갑이고 더구나 동성친구라 더 거리낌없이 친해진 것 같다.
종종 밤에 술자리가 생겼다며 술마시고 가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몇 번 술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두번째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창 유행하던 채팅사이트에서 술벙개 때려놓고 회비 잔뜩 걷어서 자기 배불리는 그런...
그 친구도 그 유형이었다.
남자들 잔뜩 모아놓고 회비 잔뜩 걷은 다음 알음알음 알던 친구들 불러서 얼굴마담 시키는.
어쩐지 식당에서 엄청나게 친근하게 굴더라니. 썅.
결론을 말 하자면
술자리에서 진상이 났다. 예쁘장한 아이가 한명 왔었는데
개중 여러명이 그 아이를 찍었는지 서로 싸움하다가 덩치 제일 큰 녀석이 남자애들도 패고
심지어 그 예쁘장한 여자애까지 패고 손을 잡아 끌고 사라지려한 것.
경찰오고 가서 진술서 쓰고 당연히 그 친구는 도망쳤는데
나중에 길에서 마주쳐보니 아이 셋 딸린 유부녀더라.
그렇게 처녀행세 하면서 술자리에서 눈웃음 치더니......
세상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또 한번 느꼈다.
 
 
암에 걸렸을 당시.
옮는 병이라며 질색팔색하던 골빈 년놈도 있고
곧 죽을텐데 죽기전에 자신과 섹스나 실컷 하자던 도른자에
농담이라며 얼버무렸지만 너 보험든거 있으면 명의자 내 앞으로 해주면 안되냐는 개같은 친구에
암에 걸렸다면서 여기저기 놀러만 잘 다니는걸 보니 아프지 않은가 보다는 가족에
암 치료할 정도면 돈 좀 있는것 같으니 놀러갈때 착용하게 패물좀 보내라던 울 엄마.
그리고.....
다섯살부터 엄마를 인질삼아 내 몸을 요구해오던 친조부새끼까지.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글을 적고 있다보니 제가 더 멘붕터져서 그만해야겠네요.
신용을 빌미로 추행하던 피시방 사장님에
알바 했는데 벌금이 더 싸니까 노동부에 신고해도 일당 주지 않을거라던 피자집 여사장에
오피스텔 사줄테니 섹스파트너가 되어주지 않겠냐던 직장상사
자신이 계룡산에서 도닦던 사람인데 주변 여자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속세에 내려와 결혼하고 산다는 약간(빼고 전부)모자라 보이는 허언증 직장 동료에
가택 무단침입으로 이어지는 성추행으로 경찰 신세 진 일에다
요즘은 특히 집앞에서 광합성 하는데 자꾸 시비거는 놈이 있네요.
날도 맑은데 늘 장우산 들고 다니며 제 모자 벗겨 보려고 안달하는 놈인데
심지어 자기 입으로 자기 정신병원 네번 갔다 왔다고 말 합니다.
보는 앞에서 경찰에 신고했더니 일단 공권력은 무서운지 도망친 뒤로 아직까진 나타나지 않아요.
 
멘붕 터뜨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말하고나니 속이 시원하네요.
말한것보다 못다한게 더 많지만.
언제고 또 오늘처럼 속이 막막할때 터뜨려야겠어요.
긴 똥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병원나이로 37년 내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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