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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 진실보다 아름다운 가상 (스포)
게시물ID : movie_635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약밀매상
추천 : 12
조회수 : 156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12/10 22: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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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는 오프닝부터 30~50년대의 활기와 율동감으로 보는 이의 기분을 즐겁게 만든다. 2.55 : 1의 화면비와 35mm 필름이라는 고풍스런 그릇에 플레이팅 된 영상은 어쩐지 데미언 차젤의 고집스런 예술관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의 선택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재즈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몇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독립적인 악기들이 싸움을 하듯 자기 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해치지 않는 유기적 선율'. 이것이 세바스찬이 생각하는 재즈의 본질이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현장성, 일회성, 흉내낼 수 없는 원본성 같은 것들은 전통적 예술의 중요한 미덕이었다. (미아가 추구하는 1인극도 비슷하다. 한번 시작한 연극은 컷이 없는 유기적, 현장적 예술이다) 이런 요소들은 결코 복제되거나 모방될 수 없는 원본만이 가진 강렬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세바스찬이 지향하는 예술과 다른점이 많다. 실시간으로 진행되지 않고, 현장감은 죽어 있으며,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매체다. 파편화된 필름 속에 배우의 호흡과 아우라는 사라져버린다. 뮤지컬과 재즈가 가진 생생한 미덕들을 모조리 포기하면서까지 필름을 고집한 차젤은 왜 이런 자기모순적 선택을 한 것일까. (아니, 그러면 오프닝에서부터 전해지던 활기와 율동감, 색상의 향연들은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세바스찬의 동료 키이스에게서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재즈는 전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는 것'. 키이스가 바라보는 예술은 세바스찬보다 훨씬 현대적이다. 키이스는 현대 예술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그는 재즈에 현대적 장점을 접목 할 줄 아는 캐릭터다. 키이스에게 있어서 현대적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은 재즈에 대한 변절이 아니다. '혁명가가 되어 가는 것'이다. (세바스찬은 나중에 '철이 들어가는 것grow up'이라고 표현했다) 


세바스찬이 생각하던 음악에 비해 현대 음악은 많이 변했다. 50~60년대까지 대부분의 공연은 현장에서 이루어 졌고 레코드를 만드는 경우에도 실제 합주를 통해 한번에 녹음되었다. 반면 현대 음악은 개별악기를 따로따로 연주하여 박자와 피치를 수정하고 그 소리의 파편들을 하나로 정교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음악은 mp3 같은 기술매체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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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예술에서 원본은 복제품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아무리 실력 좋은 예술가가 똑같이 모방하더라도 그것은 원본을 흉내낸 가짜일 뿐이었다. 그러나 현대 예술에는 진짜와 가상의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코드를 만들어내고 그 코드는 비슷 비슷한 형태로 무한히 복제되어 가는 것이 현대예술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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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YK 색분해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장면)


 

왕십리에서 볼 수 있는 라라랜드와 제작사가 가지고 있는 라라랜드 영상에는 차이가 없다. 모두 하나의 코드에서 나온 똑같은 사본일 뿐이다. 영화가 말짱 허구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동안 내가 느껴왔던 감동을 생각하면 어쩐지 가짜 명품을 구매한 것처럼 화가 난다. 무한히 증식해가는 가짜들 속에서 진짜 예술과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진 것일까.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성경들이 존재한다. 제임스 1세의 흠정역, 정교회의 70인역, 가톨릭의 불가타 성서, 루터 성경 등 수많은 종파들이 자신들의 성경이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기준이 되는 원본이란 히브리어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수많은 사본의 홍수들 속에서 맛소라 성경, 사마리아 5경, 70인역 성경의 세 흐름을 인정한다. 헬라어 70인역도 히브리어 원전과 동등한 자격을 갖는 원본이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예수의 사도들이 신약성서를 만들때 헬라어 70인 번역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구약성서의 번역본이 신약성서의 원전이 된 셈이다. 

이제 성서학자들은 원본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왜냐고? 성서는 애초에 하나의 원본이 아니었으니까. 다양한 사본으로 태어나 사본으로 증식되어 왔을 뿐이다. 즉, 진리는 무한히 복제되어가는 사본의 파편들 속에 끈끈히 녹아 있는 셈이다. 그 사본들의 파편이 서로 상호작용 하는 가운데 진리는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파편들 사이로 흩어져 간다. 이것이 진리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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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만들어 지는 과정은 놀랍도록 이 과정과 유사하다. 미묘하게 변화하며 무한히 복제해가는 필름들의 파편 속에 개별 컷은 다른 컷과 상호작용하며 전혀 새로운 미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이미지a와 이미지b가 부딪힐 때 발생하는 제3의 이미지 c'. 이것이 바로 고다르가 말한 몽타주인 셈이다. 


메인 테마 'City of stars'는 휘파람 소리가 되었다가 다른 악기로 연주되었다가 노랫말이 붙여졌다가 그렇게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장면마다 작지만 미묘한 차이를 만들낸다. 그 비슷 비슷한 선율의 파편 속에서 상상적 공간인 라라랜드가 서서히 제 모습을 갖추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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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로 만든 그림자 예술)


 

플라톤은 이데아가 실체이고 그 덧없는 그림자가 현실 세계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가짜 현실에 다시 거짓말을 보태어 만든 영화는 한낱 지독한 거짓말의 놀이일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림자가 실체보다 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우리 현실이 이데아계 보다 더 진실함을 뿜어낼 때가 있는 것처럼, 허식을 걷어낸 진실한 연기는 1초에 수십 프레임의 그림자들 속에 녹아들면서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오프닝에서 느꼈던 활기와 율동감의 실체다. 다미엔 차젤은 거짓들의 파편들을 모아 라라랜드라는 예술적 진실을 창조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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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는 진리와 가상이 그대로 공존하는 장소다. 고속도로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화내는 사람과 공존하는 세계, 햇빛 아래에서는 황량한 천문대일지라도 별빛 아래에서는 황홀한 마법적 공간으로 변하는 세계. 그곳이 바로 라라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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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흩어진 별들의 파편 사이에서 어느날 문득 별자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불현듯 라라랜드의 문이 열린다. 그때 영화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한 현실에 마법처럼 촉촉한 빛과 향기를 가져다 준다. 아마도 우리는 문이 열리는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 각자의 라라랜드를 찾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세바스찬의 마지막 연주 동안 스쳐지나간 영상들이 꿈인지 현실인지 중요하지 않다. 꿈은 현실 사이 사이에, 진리는 거짓 사이 사이에 촘촘히 녹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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