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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화기록] 호랑이에 대한 기록
게시물ID : panic_1013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달루
추천 : 16
조회수 : 45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2 1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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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랑이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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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의 어원


순우리말은 '범'이라고 합니다.


호랑(虎狼)이는 '범호' + '이리랑', 즉 범과 늑대를 합쳐서 부른 말로서,

'잔인하고 모질고 욕심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들면 점차로 호랑이라는 말이 범을 대신하게 되어

북부지방에는 주로 범을, 남부지방에는 호랑이로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참고로 '범'이라고 하는 말도

실은 호랑이와 표범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갈범, 칡범 : 칡 줄기 처럼 무늬가 있는 범 → 호랑이

알락범 : 동그란 무늬가 있는 범 → 표범

이러했다고 합니다.


호랑나비도 원래는 '범나비'였다고 합니다.


● 구한말 외국인들의 눈으로 본 조선의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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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에서 잠을 자게 됐는데,

불을 어찌나 때는지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너무 숨이 막혀서 문을 열었더니

주인이 급하게 소리를 치며 닫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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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호랑이 들어옴매"


어쩔 수 없이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숨을 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방안의 온도는 40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은 정말 호랑이가 많은 나라입니다.


어느 마을에 한 아줌마가 호랑이에 물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물을 길러 간다고 잠깐 나갔다가 그만 변고를 당한 것인데..


나중에 보니 사람은 없고

핏자국과 사람 다리 한짝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중국 사람들의 속담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1년의 반은 사람이 호랑이 사냥을 다니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


그런가 하면, '은자의 나라, 코리아'를 썼던 윌리엄 그리피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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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은 빚을 크게 지거나, 쫓기는 몸이 되면

으레 자기 옷을 벗어다가 찢고 나무가지에 걸어두고는

호랑이한테 물려 죽은 양 헛소문을 내고 숨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다만 그리피스는 한번도 조선에 와본 적 없이, 오직 일본에서 줏어들은 얘기로만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선교사들이 쓴 글을 보면 이런 것도 있습니다.




마부를 데리고 다녔는데,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을 때 입니다.

갑자기 마부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Why?"


"시방 해 떨어져서 호랭이 나온당게요"


아래는 1909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의 호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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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의 호랑이가 집 안에 침입해서

사람을 헤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호환의 피해


태종



전국적으로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많았는데,

경상도에만 석달 동안 수백명이 물려죽었다.



인조


평안도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벽을 타고 넘어와

시내를 활보한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호랑이는 단독생활을 하는데,

이처럼 무리를 지어 도시 안에까지 활개를 치고 다녔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숙종


18세기 초 기록에 보면

강원도에서만 300여명이 물려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굶주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한양 도성은 물론,

궁궐 안에까지 출몰한 일들도 있었다.


특히 북한산에 살던 호랑이가 내려와서

경복궁 근정전 뜰에까지 왔다 갔다 서성거리기도 했다.


선조


창덕궁에서 갑자기 사람이 호랑이한테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창덕궁 후원 숲 속에 암범이 새끼를 쳤던 것.

이에 화가 난 임금은 담당 관리를 크게 벌하였다.


세조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체구가 조그만 환관 박씨가 평소 이런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다.


환관 박씨


"호랑이 놈, 나한테 걸려봐. 한 주먹에 처리해주지."


그런데 궁궐 후원에 정말로 호랑이가 나타났다.


세조


"잘됐구나. 니가 한번 나서봐라.

평소에 늘 그랬지,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환관 박씨

(사색이 되어)

"전하, 사실 제가 말은 그랬게 했으나.."


환관 박씨

"맨손으로는 무리옵고,

장창 하나와 사람 한명만 붙여주면 제가 잡아보겠습니다"


세조

"그래? 그럼 사람 하나 붙여줄테니깐 함 해봐라."


환관 박씨

ㅠㅠ

그러고 가는 모습이 하도 처량하여..


세조


"마, 그만 둬."

도로 불렀다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쓰여있다.


이러한 호랑이의 궁궐 침입은 삼국사기에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 때도 나온다.

그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호환의 피해는 그 뿌리가 깊다고 합니다.



● 호랑이로 인한 가축들의 피해


가축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는데

특히 말(馬)이 자주 해를 입어, 파발이 끊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목장이 통채로 사라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기도 의정부에 '녹양목장'이라고 있었는데

그곳은 호랑이의 습격이 심각해서 결국 폐쇄하고 사냥터로 만들어 버린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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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녹양역 앞 조형물


조선시대 유명한 목장들을 보면, 대게 섬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호환'의 피해를 막고자 함이 커다란 이유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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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목장은 원래 원나라가 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운용했던 것이 시초였지만

그 후에도 계속 말 목장으로 운용을 했던 것은

바로 제주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시대 고을 수령들의 재정 문서(해유문서) 등을 보면

가축 소비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그곳에는 어김 없이 양, 소, 말, 돼지 등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곳 기록을 보면 주로 우리 안에서 키웠던 돼지에 비해

방목을 했던 말, 소, 양 등의 피해가 특히 많았다.



임진왜란 때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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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라는 왜장에게는 아주 아끼는 애마가 있었는데

그만 호랑이한테 물려 죽은것입니다.


이에 기요마사는 화가 잔뜩 나서

수하 병사들에게 호랑이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을 했는데,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다 많은 왜병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합니다.




기록을 보면 체구가 작은 왜병들이

호랑이 입속으로 한입씩 삼켜졌다는데.. 매우 무섭군요




● 조선시대는 호랑이 사냥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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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러했으니 조선 정부는


호랑이를 사냥하는 전문적 군대까지 따로 두었다.


이들을 '착호갑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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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대는 평안도에 특히 많았는데


그쪽에 가장 많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국적으로 호랑이 없는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나라에서는 호랑이 사냥을 권장해서

1년에 자기 고을에서 호랑이를 10마리 이상 잡으면

그 고을의 사또를 승진 시켜주곤 했습니다.


또 군사들도 사냥을 나가면

제일 먼저 누가 창이나 활로 맞추냐가 중요해서

먼저 맞추는 사람은 2계급 특진을 시켜줬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도 사냥을 다녔다고 합니다.

이성계 집안이 무반 출신이라서

당시 왕은 호랑이 사냥도 다니고 그랬던 것이라는데요.


하지만 그런 사냥을 나가면 백성들은 죽어났습니다.


추운 날에 꽹가리를 치고 짐승 몰이해야 했으니깐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라에서는 강제로 호랑이를 몇 마리씩 잡으라고 할당을 하기도 하여,

할당량을 못채운 고을은 벌금을 내도록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목민심서에서 정약용은



"너무 호랑이 사냥을 하라고 다그치지 말아라. 민폐를 끼친다"

라고 말 할 정도다.


호랑이 사냥과 관련해서 유명했던 왕이 연산군인데..

그 방법이 조금 비겁했습니다다.




호랑이를 사로잡아 오라고 시키더니

공자님 위패 모시던 사당을 정리하여 그 속에 호랑이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더니 사당 안에 구멍을 만들어서

그 구멍을 통해 호랑이를 쏘아 맞춰 사냥을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호랑이 때문에 쿠데타의 빌미를 준 왕도 있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이규라는 문신을 황해도 평산 부사로 임명하면서 이리 말한다.


광해군

"듣자하니 황해도에 호랑이가 많다던데,

가거든 호랑이 좀 잡아라."


"알겠나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규는 광해군한테 상소문을 올립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하, 호랑이를 잡아야겠는데

자꾸 호랑이가 관할구역을 벗어나 달아나니 제대로 소탕이 안되옵니다.

호랑이 사냥을 할 때만은 군사들이 관할구역 밖으로 이동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광해군


"알았어. 그렇게 해"


이걸 빌미로 해서 이규는 인조반정 때

군사를 이끌고 한양까지 쳐들어 오게 됩니다.

어찌보면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은 호랑이가 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 호랑이는 어떤 식으로 사냥을 했을까요?


옛날에 호랑이를 사냥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방법은 함정을 파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구덩이를 파서 창을 꽂고 풀로 덮어


호랑이가 빠지면 죽게 만드는 식으로 함정을 팠는데,


이런 함정을 '정창'이니 '식산'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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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틀'이라는 함정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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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과 같은 장치를 하고

아래에는 새끼 돼지나, 강아지를 미끼로 넣어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랑이나 곰이 와서 건드리면 활대가 풀리면서

위에 있는 돌들이 무너져서 호랑이나 곰이 압사를 하게됩니다.


'찰코'라는 덫도 있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쥐덫처럼 생긴 것이지만, 실제 크기는 굉장히 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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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찰코'는 주로 눈 덮힌 겨울에 주로 사용했는데

한 쪽 발을 찰코에 물린 호랑이는

눈구덩이 빠져서 힘을 못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 호랑이 사냥꾼들은 설피를 신고 썰매를 타고 다니면서

창이나 활로 호랑이를 사냥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썰매'에 대해 잠깐 설명 하고자 합니다.


썰매는 '눈 위의 말', 설마(雪馬)에서 나온 말로


원래는 지금의 스키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 설마(썰매)를 신은 사냥꾼들



조선 후기부터는 조총이 등장하면서

주로 포수들이 호랑이 사냥꾼으로 다녔는데




당시는 '화승총'이라고 해서 심지를 붙여서 발사하는 총이 기본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방법이 조악했냐 하면,



총을 쏘려면 조총에다 화약을 담고, 납탄을 넣고, 꼬질대로 쑤셔서 다지고


심지에 불을 붙여서 발사하고, 쏘고 난 다음에는 약실을 청소하면 1사이클 왕복.


이렇게 한 발 쏠 때마다 반복하는 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능숙한 사수라도 1분에 2발 정도 밖에는 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비바람이 불면 화승 심지가 꺼져서 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포수들은


일발필살이 아니라면 생명을 담보로 해야만 했고


때문에 기본적으로 여러명이 뭉쳐서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도 포수들은 무서웠으니 담력을 기르는 차원에서

호랑이 고기와 뼈를 넣어 만든 고깃국을 만들어 먹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옛말에 '강원도 포수'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의미도 '지리산 포수'도 있었고


모두 '함흥차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한번 나가면 소식이 없었다는 뜻으로 불리워졌던 이름들이다.




호랑이 잡는 포수들은 굉장히 용맹해서


병인양요때, 신미양요때 징발된 병사들의 상당수는 포수들이었습니다.





유명한 포수들로는 '평안도 강계포수'가 있는데

이들은 호랑이 사냥과 더불어 국방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 호랑이를 잡으면 떼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사냥에 성공하면 여러 가지 호랑이 부산물이 생겼으니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그야말로 버릴게 없었습니다.


호랑이 뼈는 단단해서 고급 칼자루로 쓰였고

빻아서 약재로도 사용됐다고 합니다.


특히 호랑이 앞발의 정강이뼈는 '호경골'이라고 불렀는데,



온 힘의 정기가 모였다 해서 귀하게 취급하였고

이걸 가루로 만들어 빚은 '호골주'라는 술은 '천하의 명약'으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


호랑이 머리는 힘이 세지고,

귀신을 쫓는다고 해서 중국 사람들은 베고 잤다는 말이 있습니다. .


호랑이 꼬리 가죽은 칼집으로도 쓰여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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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비싼 것은 호랑이 가죽, 호피였으니

호랑이를 잡으면 호랑이 값의 반이 가죽값이었다고 합니다..




16세기 명종 때 기록을 보면, 호랑이 가죽 한필의 값은 쌀 60가마니였다. (현재 가치 1200만원)


당시 관료들의 월급 수준이 쌀 2가마니 정도였으니


호랑이 한 마리를 잡으면 가죽만 팔아도 거의 3년치 연봉을 뽑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리를 모두 팔면, 기와집이 한 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호랑이 가죽은 진상품으로도 올려져서


\왕이 대신들에게 내리는 특별 하사품, 외국에 보내는 예물로도 곧잘 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호랑이 가죽보다 더 비싼게 있었다. 바로 표범가죽입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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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표범은 나무를 타는 등 더 날렵했기 때문에 잡기 더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유독 표범 가죽을 깔고 앉아 그린 그림이 많은데


당시 표범 가죽 하면 '부의 상징'으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 고위 관료들은 가마를 타더라도 '표범 가죽'을 깔고 탔다고 합니다.




참고로 당시 표범 가죽은 '아닷개', '아자개'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는 만주족의 말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원래는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이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원래 중국 속담입니다.



● 호랑이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호랑이는 기본적으로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애증의 대상이라는 거죠 .


호환을 막아 보자는 의미로 '범굿'을 많이 했었는데

이러한 '범굿'은 특히 경상도 동해안 지역에서 많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범굿은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닭을 잡아먹는 시늉을 하는데

이때 포수가 나타나 호랑이를 쏘고

가죽을 벗기는 퍼포먼스로 굿을 마친다고 합니다.


어떻게 경상도 바닷가까지 호랑이가 출몰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태백산맥과 가까워서 흔하게 출몰했던 장소라고 합니다.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가기 전에 있었던 포항의 유배지에서도


이런 회고록을 남겼습니다.


집집마다 목책을 만들고 집안 대청 안에는 그물을 쳐놨길래 물어보니




"이 동네 집들은 왜 이런가?"




"마 호랑이가 많아서리, 이러지 않고는 못삽니더"


그런가하면,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를 산군(山君 : 산의 임금)으로 모셔서

호랑이를 잡으면 그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는 미신도 있어서





호랑이 잡은 사람에게는 관아에서 가짜로 볼기를 치는 시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 잡고 볼기 맞는다"라는 말도 있을 입니다.




절의 산신각에 보면 수염이 허연 신령 옆에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호랑이가 신령의 분신이자,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모셔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해서 그린 것입니다.


이러한 풍습이 얼마나 유구한 것인지는,

2천년 전 쓰여진 후한서에 보면

동이족들은 호랑이를 모셔다가 사당에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호랑이에 대한 애증은 '민화'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까치와 호랑이가 함께 그려진 그림이 유명한데

호랑이의 모습은 상당히 해학적으로 그려졌다는게 특징입니다.




● 호랑이는 주술적 의미도 강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정초가 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호랑이 그림을 그리게 하여

궁궐 대문에 붙이도록 했는데

이러면 한 해 동안 벌레, 짐승, 귀신 등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호랑이를 가지고 질병 퇴치용으로 쓰기도 했다.


학질 걸린 사람은 웃통을 벗겨다가

호랑이 호(虎)자를 쓴 글을 붙이면

학질이 놀래서 달아난다는 미신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종기가 났을 때는

그곳에 개견(犬)자를 쓰고

옆에는 호랑이 호(虎)자를 써넣어서

종기를 무서워서 달아나게 하는 미신도 있었습니다.




팔뚝에 개구(狗)자를 쓰고

그 옆에 호(虎)자를 써서 부스럼을 퇴치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또 시집가는 가마 위에 호피를 덮었는데

이렇게 하면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고




혹시 여우같은 며느리가 들어와 집 안을 휘저으면 안되니깐

미리 호랑이를 이용해 여우를 몰아내겠다는 의미로도 가마 위에 호피를 덮었습니다.


하지만 호피는 비쌌기 때문에

담요에다가 호랑이 그림을 그려서 덮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노약자들은 호랑이 이빨을 고리로 만들어 달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러면 지네나 벌레들이 물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또 결혼한 여인네들은 호랑이 발톱으로 만든 '범발톱'이라는 노리개를 차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주로 가슴에 차고 다녔는데,




이러면 병에 안 걸리고 집안에 좋은 일만 생긴다고 믿었다.

또 남편이 바람을 피면 그 여우같은 여자를 범발톱으로 할퀴어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국가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호랑이 머리뼈를 물 속에 빠트렸습니다.


20.png



전통적으로 비는 용이 조화를 부려 내리는 것이라 믿었는데

가뭄은 용이 게으름을 피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봤습니다.


한편, 용의 라이벌은 호랑이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호상박'이라고 옛날 사람들은 흔히 라이벌전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연못이나 강에 호랑이 머리를 던지면

용이 화가 나서 비를 쏟는다는 미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 호랑이의 무서움


표현을 빌리자면, 곰이 앞발을 휘두르면 마치 철퇴로 때리는 것과 같고

호랑이가 앞발을 휘두르면 칼로 베인 것과 같다고 합니다.

(3Kg의 고양이가 할퀴어도 피가 나는데, 300Kg의 호랑이가 할퀸다고 생각해보시면.....)


또 호랑이를 쏘아 죽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라는데,

이는 고양이과 동물들의 신체구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정면을 향했을 경우엔 부풀린 털 때문에 실제보다 크게 보여

피탄 면적이 놀랍도록 줄어들어서

명중률이 10%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때문에 포수들은 정면은 포기하고, 측면을 통해 배나 옆구리를 노린다고 하는데

이조차 많은 경험이 없으면 명중하기 힘든 일입니다.


참고로 식인 호랑이의 경우 대부분 병약한 호랑이들이 많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날짐승들을 사냥할 수 없어, 사람을 덮치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19세기 당시 인도에선 한마리 병든 호랑이 혼자서

사람을 436명 잡아먹은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태백산에 가면

조선시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신들을 매장한 호식총이 200 여개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21.png




▲ 태백산의 호식총





출처 :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1941286211
출처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194128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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