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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그리고 영력이야기
게시물ID : panic_986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늘은이거로
추천 : 3
조회수 : 118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6/08 21: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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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명상의 종류

명상하는 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번째 명상하는방법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이야.
대표적으로 호흡에 집중하는 방법이 있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과정에 모든 감각과 신경을 집중시키는 것이지.

쉬워 보이지만 초보자들한테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야.
처음하는 사람들은 1분만 지나도 잡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지. 
잡생각이 들 때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호흡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지.

이렇게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면 흔히 말하는 무아지경 상태에 빠지는 데...

물론 무아지경같은 궁극의 경지가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굳이 무아지경을 목표로 명상을 할 필요는 없어.
명상은 행위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들을 보이기 때문이야. 이런 것을 보통 화두수련이라 하지.


근데 만약 이게 힘들다면 밑의 두번째 방법을 추천할게

두번째 명상하는방법은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이야. 잡생각이 나면 그것을 뿌리치지 말고 그대로 따라가는 거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잡생각에 자신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잡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야.
쉽게 말하면 명상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관찰하라는 얘기이지. 내가  말한 '위빠사나' 처럼...

예를 들어 명상 도중 머리가 간지러우면 ‘난 지금 머리가 간지럽구나’하고 관찰하라는 것이지.
이렇게 자신의 감정, 생각, 소리, 자극 등을 관찰하게 되면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내면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이지.

명상은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모두 앞서 말한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야.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명상법을 찾는 것이지. 
자신만의 명상법을 찾고 싶다면 꾸준히, 하루 5분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명상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1-2. 첫번째 방법 -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 = 화두

근데 이 설명이 너무 어려울 수 있으니 여기다가 보충 설명을 한번 더해봤어.

즉, 쉽게 말하면 화두라는 것은 일종의 '이야기'이지. 
옛날 관점에서의 화두를 정의하자면,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묻는 물음에 대한 수행자들의 대답, 혹은 수행자들이 제자를 진리로 이끄는 언어, 행동을 기술한 일종의 이야기'야.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정의되는 화두는 이런 수행자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에서 무언가 지속적인 관심이나 몰입의 대상이라는 의미'로도 흔히 쓰이지.

화두는 기본적으로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어. 
그 물음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근본적인 진리, 혹은 원인 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야. 
화두라는 것은 어떤 핵심적인 진리를 묻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서는 안되며, 이것을 해결하여 답을 구할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넘어야할 관문이라고도 하지.

그래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 거야. 여기서 공안이란 '관청의 공문서'를 말해. 관청의 공문서는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야. 

화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형태이지. 
이 화두의 일반적인 형식을 밑에 적어볼게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여기에서의 '한 물건'이란 어떤 진리를 가리키는 거야)
본래부터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항상 작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어떤 근본진리를 가르키는 말은 원칙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화두의 예로는 수천 가지가 있어. 그것을 다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논리적인 말을 구사하는 거야.

먼저 일상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예로 대표적인 것은 앞에서 얘기한 "뜰 앞의 잣나무"야. 이 말은 곧 "진리는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이지. 

여기서 잣나무는 진리가 구현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화두 참구라고 할 수는 없어. 그 이유는 근본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답이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야.

이걸 비유하자면, 어떤 초등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철수야 6X9는?"라고 말했을 때, 철수는 '54'라고 말하지 않고,  "사과 6개를 한 묶음으로 치고 그것이 9묶음 있는거요"라고 말하는 식인 거지. 

따라서 그 답은 답이면서 답이 아닌거지. 답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답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심의 대상이 되는 거야. 그 의심을 푸는 것이 화두 수행이지.

그 다음으로 비논리적인 예로는 "남산에 비구름이 있는데 북산에 비가 온다"는 것을 들 수 있어. 도대체 상식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지. 이로써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진리'라는 것이 우리의 언어와 사유의 법칙을 초월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거지. 이 역시 묻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의구심을 품게 하지.

만약 이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을 거치야 그 화두를 소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여기서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이치로 무엇을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야. 오직 그 말 자체를 의심하는 것만이 요체가 되는거지.

그래서 먼 옛날 같은 경우 스승과 제자가 있으면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던져주고 제자는 화두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제자가 그것을 깨닫는 식으로 이렇게 화두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전수하는 것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이라고 했었지.



1-3. 두번째 방법 -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 = 위빠사나

위빠사나란 외계와의 공명으로 인한 분별의식을 없애는 수련법이야. 왜곡된 정보가 아닌 순수한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수련법이지. 여기서 '분별의식'이란 상대의 개념으로서 절대의 반대야. 그리고 이 절대라는 것은 즉 '분별을 하지않은 순수한 것'을 의미해. 그리고 생각이란 우리의 뇌가 분별을 하여 생겨난 정보이지. 즉, 그 생각을 없애서 절대에 다가가는 것이 위빠사나의 목적이야 
    
 물론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생각을 거두는 것이지. 그래서 모든 수행은 결국 생각과의 한판 싸움이라 하지. 생각을 반복된 습관으로 다스려서 사람의 도덕성에 걸림이 없게 하려는 것이 유도, 생각을 축기와 운기로써 가라앉혀 자연을 닮게 하려는 것이 선도, 생각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없앰으로써 절대로 돌아가려는 것이 불도이지. 생각을 다루는 방법에 따라 유불선 삼도를 이렇게 나눌수 있어 
    
하지만 생각이 일어난 순간 이미 주관으로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어.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생각을 훈련하여 방향을 바꾼다 해도 왜곡됐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의 공명은 사실상 물 건너 간 것이고, 남은 것은 얼마나 공명의 흉내를 잘 내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
  
하지만 이것은 눈높이의 문제. 사람들의 영력을 일보 전진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면 원력을 세우고 이루는 훈련은 매우 설득력이 높지. 하지만 그 이상의 영력증진에 목적을 둔다면 어디나 그렇듯 한계는 있게 마련이야 
즉, 일반인들이 영력을 높이기 위한 계단으로서의 공효는 충분하다는 말이야. 계단의 디딤판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라고 할 수있지

흉내라고 말했지만 그 흉내가 근간이 되어 영력증진의 탑을 세울 수 있는 거지. 흉내도 없이 영력증진의 생각을 한다면 그게 사다리를 놓고 하늘에 오르려는 바보짓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이론적으로 보면 생각을 제어하는 방법이란 없지. 제어하려는 마음조차도 생각이니까. 옷감에 물든 먹물을 빼려고 또 다른 먹물로 문질러는 것과 마찬가지니깐. 
    
...하지만 위빠사나는 생각을 제거하는 특수한 방법이 있어.

이런 위빠사나의 요체는 바로 '심식관구'에 있어. 심식관구를 풀어서 설명해볼게

앞의 심식(深息)은 '호흡을 깊고 고르게 하라는 뜻'. 즉,  코로 들이쉬고 입으로 내뱉다가 어느 정도 지나서는 그냥 자연그대로 놔두면 돼. 마음을 다스리기 전에 일단 기운부터 다스려 몸을 자연에 최대한 가깝게 하는 것이지. 
  
뒤의 관구(觀口)는 글자 그대로 ‘입구를 보라는 뜻' 
  
여기서 입구는 바로 오감을 말해.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정보가 들어오는 다섯 입구. 
그걸 봐서 뭐하냐는 의문이 들수있어

위빠사나가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이지.

그럼 있는 그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자신의 주관으로 정보를 왜곡하지 말아야지

그럼 시시각각 오감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왜곡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정보에 자신의 생각을 섞지 말고 순수하게 바라봐야겠지

그럼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나? 
 > 불가능하지. 정보가 들어오는 동시에 자신의 의식이 섞여 들어갈 텐데, 이건 마치 엎질러진 물처럼 돼버린 것이지 
   

오감을 통해 정보가 들어오는 동시에 자신의 색깔이 입혀지게 되지. 한 마디로 찰나에 왜곡된 것이야. 이런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지 ‘생각 = 주관’이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난 이상 왜곡을 막을 수는 없지. 우리가 정보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주관인 것이지. 이미 왜곡됐는데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유도를 비롯한 일반적인 가르침에서는 내가 위에서 말한 대로 사후처리에 중점을 두고 있지. 가령 ‘객관적으로 보라’, ‘역지사지.’ ‘한 발 물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보라.’··· 등등 사고의 방법을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런 식으로 가르쳐서는 일모의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지.

즉, 주관으로 오염된 생각을 객관으로 바꾼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엎질러진 물을 최대한 많이 스펀지로 빨아들여서 그릇에 담는 것. 쏟아진 물을 전부 다시 담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일부나마 되돌릴 수 있듯이, 주관으로 오염된 것 역시 조금은 객관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들수도 있어 
  
  
하지만 이것은 생각의 문제를 생각을 가지고 해결하려 하는 것. 이러니 생각에 녹아있는 주관을 지우는 동시에 또 다른 주관이 들어가고, 이런 모순이 영원히 되풀이 되는 구조. 그래서 조금도 개선되지 않지. 
그건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아. 생각해 보면 수행이란 건 결국 생각에서 일어나서 생각으로 끝나는 문제지. 그리고 이때 일어나는 모든 생각은 주관이야. 주관이 없이는 생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소치이지. 주관이 없다는 것은 나도 없다는 것이니 말이야. 
   

따라서 생각이란 걸 가지고 아무리 지지고 볶으며 객관을 흉내 내 본들 근본이 주관인 것에는 변함이 없어. 밑 빠진 독에 물 들이 부어봤자 차오르는 게 없듯, 주관인 생각에 온갖 색을 입혀 객관을 만들려 해봤자 말짱 도루묵이란 것이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사람들이란 실제로 주관이 객관으로 바뀐 경우가 아니야. 한 마디로 주관이 객관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지. 생각이 있는 한 객관의 위치가 되어「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요원한 일이야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생각을 없애면 돼. 하지만 생각을 없애는 것은 쉽지 않지. 
    
...그래서 여기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야

 이제껏 생각을 일러 타파해야할 적으로 규정했지. 과거에 수행자들이 생각과의 싸움을 벌여왔지만 결과는 참패.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싹트게 되었지. 「생각을 적으로 돌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놔두면 어떨까?」하는 생각말이야. 
'하지만 생각을 그냥 놔두면 또다른 생각을 일으켜 수행을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나? 사실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인데'라는 의문점이 들수 있어

하지만 생각을 구경하게 되면 얘기는 달라져

한마디로 생각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가지. 생각이란 호응해 줄수록 더 깊은 생각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그 정도가 심해 헛된 생각이 어지러이 춤추게 되면 망상이라 하지. 
  
그렇다면 생각에 호응해 주는 대신 한 발 물러나서 구경만 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되면 생각은 에너지를 잃고 착 가라앉게 돼. 제2, 제3의 생각으로 진화하지 않고 제1의 생각만이 바닥에 고요히 맴돌게 될 것이야. 오염되지 않은 순수 정보의 상태는 거울처럼 맑게 빛날 것이고 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데 어려움이 없게 될 거야.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핵심은 심식관구이고, 여기서도 관구에 있어 
    
지금까지 나왔던 것을 종합해보면 그건 생각과 다퉈서는 백전백패라는 것. 그래서 생각과 싸우지 말고 그저 옆으로 피해 관망만 하라는 것. 쉽게 말해 백기를 번쩍 들어버리는 것이야.

그렇다면? 
  
  
'심식관구'의 입구를 보라는 것은··· 정보가 들어오는 입구를 말해. 정보가 의식에 들어온 순간 생각이 되고, 생각이 된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돼버리니까, 정보가 들어오는 입구에 의식을 둠으로써 생각에 꼬리표를 붙이는 것

즉, 생각이 만들어지기 전에 정보의 입구에 마음을 둠으로써 ‘생각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생각 = 외부정보’라는 등식이 성립되면서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은 한 편의 영화처럼 돼버리는 것이지. 여기서 생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거야.

한마디로 관구(觀口)란 정보가 들어오는 것을 인식하여 정보가 일으킨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닌 외계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지. 이렇게 되면 자신이 일으킨 생각들을 마치 관객이 되어 영화를 보듯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정보가 들어올 때 ‘남의 것’이란 꼬리표를 붙여 놓고, 그런 뒤엔 정보가 일으키는 생각에서 손을 떼는 거야. 생각해 보면 남의 것에 일일이 대응하며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그러니 저절로 한 발 물러나서 생각이 노니는 것을 구경하게 되고, 이렇게 되니 생각은 에너지를 잃고 제2, 제3의 생각으로 분화되지 못하고 가라앉게 되는 것이야. 이때 생각의 대부분이 제1의 생각에 머물러 있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 공명이라 하지. 실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지.

이것은 고승들이 흔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읊던데, 바로 생각을 바라볼 줄 아는 공명의 경지를 노래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경지, 그것이 바로 물아일체가 된 경지, 바로 위빠사나의 법방이야



음..  최대한 한자 없이 설명해볼게

참고로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영력이란 일종의 영적 수준, 쉽게 말해 정신 수준을 말해
보통 도교에서는 영천, 불교에서 영륜 이란 단어로 쓰여
 
그리고 이 영력을 올리는 방법은 간단해, 철학 공부를 해도 올릴 수 있고. 자신만의 목표(동양철학에서는 원력이라고 함)를 세워서 그것을 이루어 나가면서도 영력은 올라.
쉽게 말해 자신이 어느 한 분야에서 도를 이루는 중이면 영력은 오른다는 말
예를 들어 구두 닦이도 구두를 딱는 방법을 연구하여 영력이 오르고
프로게이머도 게임을 하는 것으로 영력이 오르고 뭐 이런 식으로

영력은 짧게 말하자면 영혼의 개방성을 의미하고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자신이 절대에 근접한 정도를 말해.

영력의 상승이라는 것은 즉 절대에 가까워진다는 의미야. 그런데 절대에 가까워 진다는 것은 '절대'에, 즉, 허공에 근접한다는 것이야.

이것이 무슨 의미냐면 즉, 영력이 높을수록 자신이 남과 다를 게 없고 결국에는 다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

즉, 영력이 높다=자신과 남의 경계가 희미해진 정도가 높다.

영력을 높이는 수련인 위빠사나, 단전호흡, 명상등의 수련, 그리고 영력이 오르기 위한 세가지 조건....

이것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바로 나와 남의 경계가 희미하게 되어 진짜 나인 절대에 가까워 진다는 것이지.

위빠사나,단전호흡,명상,영력 상승의 세가지 조건의 공통점이 왜 나와 남의 경계가 희미하게 되어 진짜 나인 절대에 가까워 진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줄게.


위빠사나의 어원을 살펴보자... 일단 위빠사나는 불교의 수행법이라. 일단 불교틱하게 접근을 해야 하지. 

그래서 위빠싸나(Vipassana)'의 어원을 한번 따져보자. 

중세 인도아리아어인 팔리어 사전에 의하면 '위(Vi)'란 접두사로서 '여러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어. 
그러나 여기서의 '위'란 중점적으로 세가지를 의미하는데 그 세가지란 불교에서 깨달음의 핵심이 되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등을 의미하지.

제행무상은 쉽게 말하자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비롯해서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보면, 나가면 들어가게 되고, 먹으면 내어놓게 되고, 또 내어 놓으면 먹게된다는 것이지. 공기도 들이쉬면 내쉬고 또 들이쉬어야 하듯이 모든 만물이 순간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덧없음의 이치를 가슴으로 깨닫는게 위빠사나의 목표야

일체개고도 쉽게 말하자면,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픔과 같은 일반적인 괴로움을 비롯해서 미운 사람이나 싫은 환경에서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환경을 함께 할 수 없는 괴로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는 괴로움,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상하게 변화되는데 느끼는 조건적인 괴로움들을 의미하는 불만족들의 통칭이라고 할 수 있지. 이런 고통들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현상이기에 이 고통의 특성을 이해하면 더 이상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않고 감각적인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게 위빠사나의 목표이지.

제법무아도 쉽게 말하자면, 우리들이 나, 너, 그이, 그녀 등 모든 개체를 실체시 해오던 관념에서 벗어 나라고 일러주는 일종의 메세지라고 할 수 있어. 즉, 이것은 나와 남이 결국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도 위빠사나의 목표이지.

다음 으로 위빠싸나의 '빠(Pa)'란 '자세히, 면밀히'라는 뜻이며 '싸나(Ssana)'는 '꿰 뚫어 관찰하다'라는 의미야. 

즉, 정리하자면...

위빠사나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등을 바르게 관찰한다, 즉 이것들을 자세히 본다' 라는 의미가 되겠지.


단전호흡은 철저히 자연을 그 중심에 놓지. 만물(삼라만상)의 바탕인 절대, 그것의 마음이 흘러나와 이루어진 것이 자연이고, 따라서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삶이 절대로 돌아갈 수 있는 첩경이며 정도라고 여기는 것이지.

절대의 마음인 자연, 그것을 등지고는 결코 절대를 깨달을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선도의 단전호흡은 무위자연을 최고의 기치로 내세우지. 우리들이 단전호흡을 수련하는 것은 자연의 호흡을 닮으려는 것이고, 유체이탈을 하고 양신을 만들려는 것도 자연 속으로 한 층 더 깊게 몰입하려는 거야. 단전호흡, 즉 선도의 모든 것은 그저 자연을 닮아 자연이 되려는 것이고, 이로써 절대가 되려는 것이지.

어쩌면 자연을 많이 닮게 되면 그런 절대, 도, 진리, 열반, 영생, 진공··· 따위에 초연해 질 수도 있을 것이지. 그런 것들이 고고하게 보이는 건 그만큼 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겠지. 만일 자연과 융화되어 그런 거창한 명제들에 가까워지게 되면 도리어 그런 개념들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보다 평범하게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이야. 농부로 한 평생 살다가 죽던, 사후에 귀신이나 신명이 되어 어둠속을 배회하다 먼지처럼 흩어져 소멸되던 그런 것들은 어떤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야. 그냥 바람처럼 살다 구름처럼 사라지면 그 뿐인 것이 선도의 수련방식인 단전호흡의 삶이란 것이지. 

무위, 그건 비움의 도리이며 단전호흡에서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야. 그건 어떤 특출 나고 돋보이는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데에 있는 것이지. 그것만이 자연에 가장 가까우며,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허공이 되어 절대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이렇게 자연에서 시작해서 자연으로 끝나는 무위의 수련방식이 선도의 단전호흡이야.

그리고 명상도 위와 마찬가지... 


그리고 영력이 오르는 세가지 조건 도 마찬가지야. 이 세가지 조건을 본질적으로 따져볼게.

첫째 외계와의 공명
둘째 창조적 구조
셋째 진리 습득과 반야

첫번째에서 공명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비움이 전제된 것이지. 자신이 주관으로 꽉 차 있으면 남(외부)을 담을 수 없기에 공명은 힘들기에.... 얼마나 비워져 있느냐가 일단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지. 자신의 관념의 벽이 꽤 허물어져 나와 남의 분별이 차츰 옅어지고 타인의 마음이 전해져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과 같은 것이지. 이렇게 서로의 마음이 잘 전달돼 함께 어우러지는 상태.

두번째에서 창조적 구조는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해. 예를 들어 음... 태어난 의미, 자기가 존재하는 의미를 찾는 것. 

세번째는... 역시 남과 나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일종의 깨달음이라고 해야지..

내가 앞에서 프로게이머를 예로 들어서 뭐가 착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츠로그래머의 직업에 초점을 맟추지 말고 행동에 초점을 두라는 거야. 그러니깐 꼭 직업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왜냐하면 여기에서 프로게이머는 자신의 원력이 게이머라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단다.. 그래서 이 게이머는 자신의 '직업'과 '원력'이 같은 경우였어. '원력'에 대한 레스는 내가 2판에 적어놓긴 했지만..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이유'를 말해. 그래서 예로 든거였어...


영력 증진에 대해 구체적인 예들이라... 

이것은 구체적으로 뭔가 예를 들어주어도 너가 공감못할거야.... 왜냐하면 사람마다 원력이 다르기 때문이야. 자신의 '원력'을 일단 가져야, 영력이 오르는 세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지.

그리고 내가 독서나 서예 등으로도 영력을 올렸다는 것 말이지? 정확히는 독서랑 서예는 읽거나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정도로 한 것이지. 즉, 명상과 같은 마음수련과 비슷한 것이지.


그리고 운동이나 다른 활동으로도 영력을 올릴 수 있냐고 물어봤지? 있어. 그걸 보통 무도라고 해. 

운동으로 영력을 올리는 경우도 결국 자신과 남이 다르지 않다는 절대의 마음에 가까워 지는 것이야. 운동으로 영력을 올리는 과정은 무술>무예>무도 이지.

무술은 신체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모든 기술을 말해. 오직 상대방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쓰는 신체적 기술을 총칭하는 것이지. 

무예는 몸을 이용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을 말해. 오랜 수련을 하여 몸과 마음이 일체되는 동작이 이루어질 때에 그 모습이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무예이지. 

무도는 무엇일까? 몸과 마음을 일체시키는 것을 말해. 즉 몸이 내가되고 내가 몸이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무도라 하지. 나와 몸이 일체가 된다는 것, 즉 여아의 구분 없이 하나의 경지에 이름을 지향하는 것이 무도인 것이지.

즉, 운동으로 영력을 올리는 무도도 결국 절대에 가까워 지는 것이지.
 

ㅎㄹ도는 내가 진짜 우연히 들어갔지...

내가 어릴 적부터 책을 좀 많이 좋아해서 애들과 토론도 많이 했었거든. 

보통 아주 어린나이에 부모님들이 별 학원을 다 보내잖아? 근데 그중에 단전호흡 수련장도 있었어. 그런데 그게 ㅎㄹ도 수련장이었어.. ㅎㄹ도 수련장에서 동양학 리더쉽 교육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책 관련 교육을 하던 중이었는데 내가 창의성을 키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그곳에 보내셨더라...

 그러다가 정식 수련생교육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거기에서 정식수련생 코스가 재밌어보여서 시작하게 되었지. ㅎㄹ도 기본 수련생 과정 6년차 후에 정식 수련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어...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원력'을 일단 세우고, 즉 자신의 삶을 한번 성찰해 보고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까 등 '자신의 존재이유'를 한번 생각해보고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사는것이야. 

그 '원력'을 세우고 그것으로 영력이 오르는 세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그것을 '삶 자체의 수련화'라고 하지.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마침 말이 나왔으니깐

힌두교에 대한 요가수련을 한번 적어볼게 ..

요가는 선도의 단전호흡과 달리 자연의 숨결에 더욱 주목하는 수련법이지. 그 숨결을 그들은 빛이라 불러. 빛은 창조의 에너지이며 허공의 숨결이야. 그것을 익힘으로써 가장 순결한 빛으로 거듭나려는 것이 요가이지. 

그래서 요가의 차크라는 순전히 빛덩어리이야. 빛을 모을 수 있는 장소를 기점으로 더욱 크고 환한 빛을 모으려는 것이지. 그렇게 빛을 모아 빛의 존재인 천신이 되어 존재의 가치를 만끽하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진리를 깨달아 허공이 되려는 것이지.

뭐 요가와 단전호흡을 비교하자면,  요가는 한 마디로 빛이 되려는 수련이며, 이것은 선도와 일정부분과 상통하지만 분위기와 느낌은 사뭇 달라. 단전호흡의 자연이 요가의 빛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지, 이런 범위의 차이에서 오는 약간의 괴리는 문화라는 양태를 띠면서 더욱 이질적으로 거리를 벌리게 되거든... 그니깐 이 둘을 비유하자면 겉모양이 비슷해도 그 향과 맛에 차이가 나는 과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이제 그 초월의식이 뭔지를 설명해줄게. 보통 초월의식의 완성을 '깨달음'이라고도 해. 그래서 완성된 초월의식인 '깨달음'에 대해 설명을 해줄게...

'깨달음'은 ‘깨다 + 알’로, 알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야. 
알은 업장이 닳아 없어질 때 남은 마지막 한 겹의 장막이다. 이것이 뚫릴 때 깨닫게 되며 '참다운 나(=얼나)'로 거듭나게 되지.

깨달음과 정반대인 것으로 막달음이 있어. 막달음은 ‘막다 + 알’로, 알을 깨지 못하고 막히는 것이지. 업장이 점점 두터워져서 얼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야.

막달게 되면 冂(울타리)에 갇혀 어둡게 되지. 그래서 무식하고 막나가게 되지. 아래 설화를 한번 보도록 하자.

-조선 초에 벽송(1464~1534) 스님이 있었다. 벽송은 도를 배우려고 큰스님인 정심(正心) 선사를 찾아갔다. 정심 선사와 같이 나무를 해다 시장에 내다 팔며 생활하기를 3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정심 선사는 단 한 마디도 불법에 관하여 얘기하지 않았다. 벽송이 “부처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면 “나중에 말해 주지” 하는 식이었다. 어느 날 벽송은 정심 선사가 없는 사이에 짐을 꾸려 떠나면서 밥 짓는 공양주 보살에게 말했다.

“저는 오늘 떠나야겠습니다. 제가 스님을 찾아온 것은 도를 배우러 온 것이지 이렇게 나무나 패러 온 것이 아닙니다.”

벽송은 분노를 머금은 채 발길을 산 아래로 옮겼다.

얼마 후 정심 선사가 나무를 해 가지고 돌아오자 공양주 보살이 다급하게 말했다.

“벽송 스님이 지금 막 떠났습니다. 도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무식한 놈,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나 제놈이 눈 귀가 멀어 그렇지. 자고 나서 인사할 때도 가르쳐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 팰 때도 가르쳐 주었는데…….”

이렇게 말하고는 정심 선사가 토굴 밖으로 나가 그 아래로 내려가는 벽송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벽송아, 내 법을 받아라!”

이 순간 벽송은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자..  여기에서 정심 선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를 무언의 행동으로 보여 주었지. 소박하고 한결같은 모습을 통해 벽암이 도를 깨닫게 되기를 바랬어. 이렇게 늘상 도를 전했지만 벽암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에만 집착했지. 그래서 3년 동안 일만 죽도록 하고 가르침은 배운 바가 없다고 성을 내며 떠난 것이야.

이 때 정심 선사가 “내 법을 받아라” 소리 친 것은 최후의 방법이다. 이렇게 하여도 법송이 깨닫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이 순간 법송은 법이란 무형의 존재임을 깨달았지. 무형인 것을 유형으로 배우려 하였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스치며 깊은 의식에 빠져들었지. 그리고 마침내 업장의 굴레를 뚫고 깨달음을 이룬 것이야.


...화두(話頭)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뭐꼬’이지.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 해결을 위해 일으킨 의심의 말로 공안(公案)이라고도 해.

화두란 ‘말 보다 앞서 있는 것’ 또는 ‘언어 이전의 소식’이란 뜻이며, 공안이란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이란 뜻이야.《제행무행경》에 이르기를, “부처는 보리도 보지 않고 또한 불법도 보지 않나니,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불도를 이룬다” 하였지. 이와 같이 법을 갈구하는 마음 자체도 커다란 집착이라는 것이야. 그래서 그런 마음을 엉뚱한 화제로 돌려 마음 자체를 날려 버리는 것이지. 이것이 ‘뭐꼬’의 묘술이라고 할 수 있지.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만 하여도 무려 1700 종류가 넘는다 하지. 그 가운데 한 예를 들어볼게.

-오로지 좌선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던 도일(道一)이 좌선을 하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 때마침 조실 스님이 숫돌에 기와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궁금하여 다가가 물었다.

“스님, 무얼 하시려고 기와를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그러는 걸세.”

“아무리 오래 갈으셔도 거울은 안될 겁니다.”

“그래? 그대는 여기서 무얼 하는가?”

“좌선하고 있습니다.”

“앉아만 있다고 해서 깨쳐지겠는가?”

“……”

“견성은 좌선에 있는 것이 아니지.”

도일은 그제야 큰스님의 참뜻을 알아 차렸다.




옛날 대혜선사(大慧禪師)가 말하기를, “보통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려 하면 수레에 병기를 가득 신고 와서 차례대로 꺼내어 휘두르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나는 단지 촌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였지. 여기서 혀 하나로 사람을 죽인다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나왔어. 사실 말 한마디로 몸뚱이로 사는 나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지. 만일 조실 스님이 도일을 불러다가 직선적으로 가르침을 폈다면 도일은 한 동안 冂(울타리) 속에서 헤맸을 것이야. 그런데 우회적인 비유를 들어 도일의 빈틈을 공략하자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冂(울타리)을 뚫고 일각(一覺)을 얻게 된 것이지.



또 사례를 들어볼게..

-한 젊은 스님이 도인으로 알려진 노승(老僧)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에 바른 해답을 주신 부처님 가르침의 참 모습입니까?[如何是不法的大義]”
이 질문에 대하여 그 노승이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라 하였다.

이 대답을 이해할 길이란 없어. 그러나 대답인 것만은 틀림없으니, 어쨌든 이 대답의 내용만 알게 되면 알고자 하던 것을 바로 알 수 있게 되지. 그러니 알아보려고 해야 할밖에·····.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아무리 궁리해도 묘안이 없어. ‘뜰 앞의 잣나무’를 그대로 알아봐야 할밖에 별 도리가 없겠지...

어떻게 그대로 알아볼 것인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그 대답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봐야 할 길만이 남아 있는 것이지. 그러나 ‘뜰 앞의 잣나무란 도대체 뭐냐?’ 라는 의심밖에 날 것이 없어. 딴 생각 하나 없이 ‘의심’이라는 이것 하나만을 응시하고 일관하는 수밖에 딴 길이 없지.

이런 식으로 말이야..

‘뜰 앞의 잣나무란 도대체 뭐냐?’

‘뜰 앞의 잣나무란 뭐냐?’

‘뜰 앞의 잣나무?’

‘잣나무?’

‘뭐?’

‘ ? ’

‘ ’




바로 내가 위에서 적어놓은 것, 이것이 화두참구(話頭參究)야. 의심으로만 일관하는 수밖에 없으니 일관하는 것이지. 의심의 형태를 ‘어떻게?’, ‘어째서?’로 하면 따지는 생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오직 ‘무엇’이라야 따질 길이 없게 되어, 끝에 가서는 곧바로 ‘뜰 앞의 잣나무?’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

이렇게 딴 생각 하나 못나도록 목을 졸라맨 의심의 일관이라야 화두참구(話頭參究)라 할 수 있고, 깨달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지.

일반적인 참선이 생각을 없애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라면 화두는 생각을 일으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야. 대개 생각을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생각이 더 나는 법이지. 그래서 ‘뭐꼬’를 생각하게 되면 나중에 그 결과가 텅 비게 되어 생각이 멈추는 것이지.

요컨대, 화두참구(話頭參究)란 사람이 생각하는 버릇을 이용하여 도를 깨달으려는 수행이야. 화두를 하면 생각은 쉴 새 없이 일어나게 되지. 그러나 생각한 결과란 아무 것도 없게 되어 본래 생각 없는 마음의 제 자리에 이르게 하지. 의심이란 생각하는 작용이긴 해도 생각한 결과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 생각 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뭐꼬’의 묘술이라고 할 수 있지.


진리를 알려면 자신의 본심을 깨닫는 길이 있을 뿐이지. 자신의 본심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본심이야.

 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이지. 생각과 생활에 집착되어 있던 모든 버릇을 깨끗이 털어 버리고 본심만이 순수히 남게 될 때 진정한 자기 자신과 하나 되어 진리를 깨닫게 되지. 인생 문제의 해결은 오직 깨달음의 길만이 있을 뿐이야.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깨달음의 과정에는 크게 점수(漸修)와 돈오(頓悟)가 있지. 점수란 깨닫기 위해 점진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이고, 돈오란 순간적으로 업장의 막을 뚫고 한얼을 깨달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그런데 요즘 점수와 돈오의 순서를 가지고 논란이 일고 있어. ‘돈오점수’라 해야 한다느니 ‘점수돈오’가 맞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아. 여기에 어떤 스님은 ‘돈오돈수’라는 말까지 하고 있어... 이런 것이 보조 국사 지눌이래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은 한국 불교의 수치 아닐까..?

일단 불교에서 견성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는, 견성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몇 십 년을 수련하였건 단 몇 일을 하였건 다 같은 꿈속의 중생인 바 도를 논할 바가 못되지. 견성을 하지 않은 한 큰스님이건 불목하니이건 다 같은 중생일 뿐이다. 물이 없으면 배를 띄울 수 없듯이 실눈도 뜨지 못한 깜깜한 꿈속에서는 나아감도 물러남도 없다는 논리이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돈오[견성]를 한 후에야 비로소 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야. 돈오를 하여 눈을 한 번 뜬 후에 점수로써 성불로 나아가는 것이 정도라 하여 ‘돈오점수’가 맞다는 것이지.

그러나 기준을 돈오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맞추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게 되겠지. 가만히 앉아 견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야.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돈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

《대학》에 보면,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라.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하였어. 이렇게 날로 새로워지다 보면 冂(울)이 남아 있지 않게 되지. 일모의 冂(울)마저 날아가 버릴 때 깨달아 참다운 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지.

깜깜한 꿈 가운데 있어도 노력을 해야만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야. 이것이 점수야. 비록 돈오를 이루지 못하여도 다음 생에 또 다음 생에 노력하면 기필코 깨달을 수 있지. 그래서《대학》에 이르기를, “마음으로 정성껏 구한다면 비록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이 에서 시작해야 하고, 높이 오르려거든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行”고 하였던 것이 겠지.

다음 《장자》의 구절에도 나와있듯이 말이야...

-나는 그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소. 그는 3일이 지나자 세상 욕심을 버리게 되었소. 그리고 7일이 지나자 사물의 허상을 탈피하여 실체를 보게 되었소. 그리고 9일이 지나자 실체를 보는 그 자신마저 잊게 되었소. 그러자 눈부신 깨달음을 얻게 되었소. 절대 경지를 보게 되자 시공을 초월하게 되고 결국 영생의 경지에 이르렀소.
-《장자》-

이렇게 돈오점수와 점수돈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야. 다 같이 올바른 수행을 가르치고자 함인 즉 논란을 벌일 하등의 대상이 못돼. 만일 그나마 정확히 표현을 한다면, '점수돈오정수대오(漸修頓悟正修大悟)' 라 해야 할 것이겠지....
출처 한국 고유 선법 수련생님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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