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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괴담]눈 감고 걷기
게시물ID : panic_921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닷디
추천 : 34
조회수 : 1362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7/01/18 19:09:15

내가 고3 때의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야자를 안하고 대신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언제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막차에서 내린 버스정류장 근처는 간혹 있는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는 아저씨들을 제외하면 거의 사람이 없었다.
차도에서 드문드문 자동차가 지나가는걸 제외하면 사람 한명 없는 길을, 나는 눈을 감고 걷곤 했다.


눈을 감고 걸어본 적 있는가?
별 것 아닌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내 앞으로 100m정도는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걷다보면 10초도 안되어 무언가에 부딪힐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진다.
보통은 그 쯤에서 눈을 뜨겠지만, 그걸 참고 10초, 20초, 30초, 그리고 1분쯤 걷다보면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 지다가 어느덧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마치 이 세상에서 내가 유리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나는 그 묘한 감각을 은근히 즐겼었다.


전방을 확인한다. 건널목 편의점까지 약 300m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발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는다.

10초.
심박수가 오르며 불안감이 샘솟는다. 꾹 참고 계속해서 눈감고 걷는다.

30초.
적응이 됐는지 차츰 몸이 진정된다.

60초.
바람소리와 풀벌레소리, 그리고 어제 내린 비의 냄새가 코에서 느껴진다.

100초.
예민했던 감각들이 차츰 둔해지며 바닷속에 가라앉은 듯한 부유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고독감과 해방감이 나를 엄습했다.

그리고 눈을 뜬다.
흐릿한 시야가 점점 맑아지면서 비현실적인 감각이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눈 앞에 횡단보도가 보였다.

'조금만 더 늦게 떴으면 무단횡단 할 뻔 했네'

내심 피식 웃으며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곳에는 편의점이 있다.
출출한 김에 야식이나 사먹을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은 꽉 잠긴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바가 화장실 갔나?"

편의점의 불은 켜져있었고(애초에 24시간 영업하는 곳이라 불 꺼진걸 본 적이 없다), 영업하는듯 했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쉬움에 혀를 차고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10분만 걸으면 집인데 그냥 가서 냉장고나 뒤지자



위화감을 느낀건 5분쯤 걸은 뒤였다.
버스정류장에서 편의점까지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편의점 인근 주택가에는 동네 장사를 하는 가게가 제법 있었다.
그곳에서 밤늦게 늦은 식사나 술한잔 하는 사람은 언제나 몇명씩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사람이 없다.
정확히는, 사람만 없다.

24시간 영업하는 국밥집을 바라보았다. 유리 너머에 보이는 풍경은 사람 없는 가게 안. 하지만 전등은 켜져있다. 심지어 테이블 위에는 김이 오르고 있는 국밥그릇과 소주잔이 올려져 있었다.

동네의 모든 가게가 그랬다. 영업중인양 불은 켜져있는데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무언가가 일어났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온 그 짧은 사이에 전 인류가 멸망했나?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상까지 진지하게 할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공포와 혼란이 정신을 휘젓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세계에 나 혼자만이 남은 그 고독감은, 묘하게도 눈을 감고 걸을 때의 느낌과도 닮아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국밥집 안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와장창"

마치 유리병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끄아아악!!"

가게 안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가게 안을 제대로 바라보자, 그 광경은 아까와 달라져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지런했던 테이블이 어질러져있고, 바닥에는 소주병이 마치 파열한듯이 깨진채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새빨간, 피가



그것을 인식한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최대한 빠르게, 집에 가겠다는 일념만으로 전력질주를 했다.
달리는 도중에 새벽까지 영업하는 갈비집이 스쳐지나갔지만 역시나 사람은 없었다. 그 광경이 내 발을 더 빠르게 채찍질했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 동의 3층으로 널뛰듯이 껑충껑충 올라가 집 앞에 서서 잠시 쉼호흡을 하였다. 숨은 차지 않았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의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아..."

눌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마치 건전지가 끊어진 전자기기처럼 아무리 눌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엄마!! 엄마!!!!!!"

현관문을 쾅쾅거리며 외쳤다.
그래, 재수없게 건전지가 끊어졌을 뿐이다. 문을 두드리면 곧 엄마가 "한밤중에 왜 소리질러"라고 핀잔주며 나올것이다.

"엄마!! 아빠!!! 나 왔어!!!
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소리지르면 성격나쁜 옆집 아줌마가 짜증내며 나올만 한데 옆집의 현관문도 미동이 없다.

"엄마.. 아빠.. 제발"

그리고 한참을 부르다 지쳐 내 목소리가 사그라 들려 할 때,
내 애원이 통한건지, 삑하는 전자음과 함께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저절로
문을 연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고, 열린 문을 통해 집에 들어갔다.

"쾅"

마치 내가 들어오길 기다렸다는듯이 문이 닫힌다. 그리고 들려오는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
집 안을 바라본다.

거실의 불이 켜 있었다.
TV에서는 심야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고, 소파 앞에 아빠의 술상으로 보이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역시,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

"촤아아악"

갑자기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잠궈져 있었을텐데...

아아,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건가.
나는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TV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을까. 중간에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TV가 갑자기 꺼졌지만 나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잠시 후, 거실의 불이 꺼지고,


나는 진실로 혼자 남았다는 고독감을 느끼며, 이윽고,


조용히, 잠에, 들었다.





"아이고, 이 양반아!! 내가 술좀 그만 쳐 마시랬지!!"

"아니, 내가 돈벌어오는데 술도 맘대로 못마시냐!!!"

"그럼 얌전히 먹던가! 왜 술먹고 싸우다가 술병으로 머리를 쳐맞고 자빠졌어!!!!"

"응급실 전세냈어요? 조용히 좀 합시다!"

시끄럽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다.
그러자 침대 옆에서 눈이 동그래진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

"의사 선생님!! 저희 아들 일어났어요!!"

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은 병원인 모양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나는 편의점 근처에서 쓰러져 있었다는 모양이다. 그걸 본 편의점 손님이 119에 신고해서 그대로 응급실로 실려왔다고.
아무 이상도 없어보이는데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정밀검사를 하기 직전에 내가 깨어났다고 한다.
이후에 혹시나해서 정밀검사를 받아봤지만, 역시 이상은 없었다.
검사를 끝낸 후,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어제 밤에 설거지 하던 중에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들린것 같지 뭐니. 그래서 물 끄고 현관문 열어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잘못들었나 해서 다시 설거지하는데 30분 있다가 네가 실려갔다고 병원에서 전화가 오더라.
무슨 예지같은 거였을까?"




그 이후로 나는 눈을 감고 걷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만에 하나라도 또다시 그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이번에는 돌아올 수 없다면, 그런 생각을 하자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기가 생겼는지, 가끔 영혼같은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번 무서움을 참고 말을 걸어봤었다. 하지만 영혼들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듯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었다.
그걸 보니 사람이 영혼을 인식하지 못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여태껏,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그 날 밤의 나처럼 고독 속에서 살고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무서움은 사그라들고 애잔함만이 느껴졌다.
출처 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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